좋은시

[스크랩] 봄비 시 모음

문근영 2014. 3. 8. 11:01

봄비/남진우

 


누가 구름 위에
물항아리를 올려놓았나
조용한 봄날 내 창가를 지나가는 구름


누가 구름 위의 물항아리를 기울여
내 머리맡에 물을 뿌리나
조용한 봄날 오후
내 몸을 덮고 지나가는 빗소리


졸음에 겨운 내 몸 여기저기서 싹트는 추억들

 

 

- 시집 『사랑의 어두운 저편』(창비, 2009)

 

 

 

봄비/정한용

 

 

강을 건너자 胄� 가늘어졌다
산발치에 닿아선 하늘까지 맑아졌다
땅은 이미 충분히 젖어
검고 부드럽게 나무뿌리에 담았던 향을 풀어냈다
포클레인이 모래흙 한 무더기
내 키만큼 쌓아놓은 뒤였다
새로 파낸 沙土는 새 봄비를 맞아 빛이 더 맑았다
이미 마음을 궁글렸으니
세상 전부가 함께 묻힌다 한들 이상할 게 없었다
흙을 가리고 방향을 잡아 자리를 정한 다음
조용히 내려놓았다
내 귀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평온한 세계로 들고 있었다
구름 걷히고 햇살 퍼지면서 흙내음 진한 달구노래 들렸는지
어머니는 하나님을 믿었으니
그후 어찌 되었는지는 잘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포르릉 산새가 날아간 것인지
산역을 마친 이들이 햇무덤에서 내려오고 나서야
나는 문득 손이 텅 비었다는 것을
상처가 아리다는 걸 느꼈다
봄비 걷히고
내 알몸 위로 울음이 쏟아졌다

 

 

-시집『흰꽃』(문학동네, 2006)
 

 

봄비/주요한

 


봄비에 바람 치여 실같이 휘날린다
종일 두고 뿌리어도 그칠 줄 모르노네
묵은 밭 새 옷 입으리니 오실 대로 오시라


목마른 가지가지 단물이 오르도록
마음껏 뿌리소서 스미어 들으소서
말랐던 뿌리에서도 새싹 날까 합니다.


산에도 나리나니 들에도 뿌리나니
산과 들에 오시는 비 내 집에는 안 오시랴
아이야 새밭 갈아라 꽃 심을까 하노라


개구리 잠깨어라 버들개지 너도 오라
나비도 꿀벌도 온갖 생물 다 나오라
단 봄비 조선에 오나니 마중하러 갈거나

  

  

(『아름다운 새벽』. 조선문단사. 1924.『불놀이』. 미래사. 1991)

(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4편 수록 중 1편. 2007)

 

 

봄비/변영로

 


나직하고 그윽하게 부르는 소리 있어
나아가 보니 아, 나아가 보니―
졸음 잔뜩 실은 듯한 젖빛 구름만이
무척이나 기쁜 듯이 한없이 게으르게
푸른 하늘 위를 거닌다.
아, 잃은 것 없이 서운한 나의 마음!


나직하고 그윽하게 부르는 소리 있어
나아가 보니 아, 나아가 보니―
어렴풋이 나는 지난날의 회상같이
떨리는 뵈지 않는 꽃의 입김만이
그의 향기로운 자랑 안에 자지러지노나!
아, 찔림 없이 아픈 나의 가슴!


나직하고 그윽하게 부르는 소리 있어
나아가 보니 아, 나아가 보니―
이제는 젖빛 구름도 꽃의 입김도 자취 없고
다만 비둘기 발목만 붉히는 은실 같은 봄비만이
소리도 없이 근심같이 내리누나!
아, 안 올 사람 기다리는 나의 마음!

 


-김희보 엮음『한국의 명시』(가람기획 증보판, 2003)

 

 

 

봄비/이수복

 

 

이 비 그치면
내 마음 강나루 긴 언덕에
서러운 풀빛이 짙어 오것다.

 

푸르른 보리밭길
맑은 하늘에
종달새만 무어라고 지껄이것다.

 

이 비 그치면
시새워 벙그러질 고운 꽃밭 속
처녀애들 짝하여 새로이 서고

 

임 앞에 타오르는
향연(香煙)과 같이
땅에선 또 아지랑이 타오르것다

 


-김희보 엮음『한국의 명시』(가람기획 증보판, 2003)

 

 

봄비/주용일

 

 

밤새 누에 뽕잎 갉아먹는 소리
자다 깨어 간지러운 귀를 판다
세상 잘못 살아온 나를
어디 멀리 있는 이가 욕을 하는지
귓속 간지러움 밤새 그치지 않는다
잎에서 잎맥으로 잎줄기로 옮겨가며
점, 점, 점, 사나워지는 누에들의
뽕잎 갉아먹는 소리,
내 귓속 간지러움도 달팽이관을 따라
점점 깊은 곳으로 몰려간다
세상 함부로 살아온 나를
이제는 가까이 있는 누가 욕을 하는지
뽕잎 갉아먹는 소리 갈수록 거칠어지고
자다 깨어 죄 지은 사람처럼
무릎 꿇고 앉아 간지러운 귀를 판다

 

 

-시집『꽃과 함께 식사』(고요아침, 2006)

 

 

봄비/장인성

 

 

네가 오는구나
손에 든 초록 보따리
그게 전부 가난이라해도
반길 수밖에 없는
허기진 새벽


누이야
네 들고 온 가난을 풀어보아라
무슨 풀씨이든
이 나라 들판에 뿌려놓으면
빈 곳이야 넉넉히 가리지 않겠느냐

 

 

-계간『시와 시학』(2005, 봄호/다시 읽는 좋은시)

 

 

그 봄비/박용래

 


오는 봄비는 겨우내 묻혔던 김칫독 자리에 모여 운다


오는 봄비는 헛간에 엮어 단 시래기 줄에 모여 운다
 

하루를 섬섬히 버들눈처럼 모여 서서 우는 봄비여


모스러진 돌절구 바닥에도 고여 넘치는 이 비천함이여

 

 

-시전집『먼바다』(창작과비평사, 1984)

 

 

봄비, 간이역에 서는 기차처럼/고미경

 

 

간이역에 와 닿은
기차처럼 봄비가 오네.
목을 빼고 오래도록 기다렸던
야윈 나무가 끝내는 눈시울 뜨거워져
몸마다 붉은 꽃망울 웅얼웅얼 터지네.
나무의 몸과 봄비의 몸은
한나절이 지나도록
깊은 포옹을 풀지 못하네.
어린순들의 연초록 발바닥까지
스며드는 따스함으로 그렇게
천천히, 세상은 부드러워져갔네.


숨가쁘게 달려만 가는 이들은
이런 사랑을 알지 못하리.
가슴 안쪽에 간이역 하나
세우지 못한 사람은
그 누군가의 봄비가 되지 못하리.

 

 

-시집『인질』(문학의전당. 2008) 

 

 

봄비/김규성

 

 

저 채점판은
지상의 누구에게나 만점을 준다


쓰레기장이나 장미 가시
밤짐승 걸려 넘어진 모난 돌에도
내내 투명하고 둥근 방점을 찍어준다


한 걸음 한 걸음
쉴새없이 문제뿐인 수험생이면서
만나는 것들마다
걸핏하면 함부로 가위표를 그어대는
내 거친 손등에까지도


그리고 활시위처럼 우산을 펼쳐
길목을 가로막지만
그 위에도 굵은 동그라미를 쳐준다

 

 

-시집『고맙다는 말을 못했다』(문학세계사. 2006)

 

 

봄비/김소월

 

어를 없이 지는 꽃은 가는 봄인데
어를 없이 오는 비에 봄은 울어라.
서럽다 이 나의 가슴속에는!
보라, 높은 구름 나무의 푸룻한 가지.
그러나 해 늦으니 어스름인가.
애달피 고운 비는 그어 오지만
내 몸은 꽃자리에 주저않아 우노라.


▷ 어룰 없이 : '어룰'은 얼굴과 대응하는 평안방언이다. '어룰 없이'는 '얼굴 없이'의 뜻이나 문맥상 '덧없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 그어 : [동] 그쳐. 그치다. 멈추다.

 

 

봄비/이형기

 

 

밤,
봄비는 창에 스민다.
기다림에 지친 마음에 젖는다.


봄,
밤에 내리는 비
반 옥타브 낮은 목소리


물기가 배인 육신의 무게를
가눌 길 없구나.
봄밤에 비 온다.


먼 사람아 당신의 손길은
봄비와 같이 성가시다.
잠 재워다오.

 


-김희보 엮음『한국의 명시』(가람기획 증보판, 2003)

 

출처 : 시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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