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새 두 마리와 큰 뱀과 나”의 세계
―이창수의 시세계
장석주
물물(物物)들은 서로 몸을 비벼 만든 날것들의 세계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 죽은 두루미, 기운 탑, 묶인 강아지, 무거운 양떼구름, 수양버들, 금 간 흙벽, 돌멩이를 안고 언 겨울강, 마른 웅덩이, 미륵불, 와불, 사루비아, 공터, 목련, 열쇠 꾸러미, 화석, 새, 나비, 맹꽁이, 완행버스……들이 주르륵 펼쳐지며 이루어진 물물의 세계가 있다.
여자가 집을 나갔다
고양이가 새끼를 배 왔다
슬레이트 지붕 위 뒤엉킨 덩굴이
꽃을 피워 물었다
흙벽에 금이 가고 달이 기울었다
솔바람이 울면서 산으로 갔다
먼 산에서 목탁이 울려왔다
「處暑」
여자가 가출하고 고양이가 새끼를 배고 지붕 위에 덩굴에서 꽃이 피고 흙벽에 금이 가고 달은 기우는 이 세계가 바로 물물의 세계다. 이것들은 본디 있고, 주체는 시간과 더불어 그것을 스친다. “흙벽에 금이 가고 달이 기울었다”는 구절은 시간이 스치며 남긴 퇴락의 흔적이다. 세운 것은 쓰러지고 찬 것은 기운다. 이게 물물의 세계에 작동하는 운동 역학이다. 세계는 여기-있음이고, 여기-있음은 운동 역학에 의해 유동하고 변전한다. 물물의 세계에 구비치는 생동과 쇠락은 이 운동 역학의 반향일 따름이다. 물물의 생동과 쇠락은 주체의 욕망과 무의식에 미적 쾌감의 대상으로 포획되는 한에서만 의미를 얻는다. 시인은 이것들을 훔친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미지로 덧씌워 보쌈을 한다. 그러니까 시는 이미지에 감싸여진 우주의 장물(臟物)인 셈이다. 시가 장물이라면 시집은 장물의 수장고(守藏庫)가 될 테다. 여기 또 하나의 수장고가 있다. 그 수장고를 열어보자.
물론 그 수장고를 채운 것은 물물들과 이미지들이다. 무생명으로 된 물들의 세상은 비바람에 씻기며 유동과 변전의 운명을 피동적으로 내재화한다. 그것들은 삭고 부스러지고 깨지고 무너진다. 아무리 견고한 것이라도 불변인 채 시간의 파괴력에 맞설 수 있는 것은 없다. 그것들은 엔트로피 현상 속에서 가장 안정된 무게중심으로 이동한다. 높은 것에서 낮은 것에로. 큰 것에서 작은 것에로. 그것의 마지막 존재태는 먼지다. 더 이상 분할할 수 없는 극소화된 입자들. 물물의 세계에는 이기주의나 기회주의, 혹은 밀고와 배신은 없다. 국가-법-정치도 없다. 경찰도 없고 금고를 잠그는 일도 없다. 있는 것은 벌거벗은 생명들의 스스로 그러함뿐. 누구나 이것 위에 제 삶을 세운다. 핏줄이라는 느슨한 결속력으로 얽힌 아버지의 이복형제들, 큰형님, 아버지, 어머니, 당숙들, 고모, 할머니, 사촌, 팔촌들의 삶들이 그러하다. 삶은 아무리 범박해도 그 안을 들여다보면 여러 곡절과 사연이 있고, 그것들은 저마다 균열과 아픔을 품고 있다. 삶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다. 살아 있는 것이기에 멈춤이 아니라 격류다. 삶은 사고-사건인 한에서만 삶이다. 이 욕망으로 요동치는 벌거벗은 생명 세계를 일찍이 한 지식인은 “만인의 만인에 대한 전쟁”이라고 규정한 바 있다. 이 세계에서는 뺏고 빼앗기는 일과 죽고 죽이는 일이 다반사로 이루어진다. 세우고 허무는 삶의 많은 일들은 ‘입’을 통한다. 이 ‘입’은 무엇인가. “말하는 입과 먹는 입”1)이다. 그 ‘입’에 관해 이렇게 적은 철학자도 있다. “그것은 작동하고 있다. 때로는 흐르며, 때로는 멈추면서, 도처에서 그것은 작동하고 있다. 그것은 호흡을 하고, 그것은 열을 내고, 그것은 먹는다. 그것은 똥을 싸고, 그것은 섹스를 한다. 그럼에도 ‘한데 싸잡아서 그것’이라 불렀으니 얼마나 잘못된 일인가. 도처에서 이것은 여러 기계들이다. 게다가 결코 은유가 아니다. 이것들은 서로 연결하고, 접속하여 기계의 기계가 되는 것이다.”(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 『앙띠 오이디푸스』) 입이 없다면 먹지도 못하고 말도 못한다. 입은 세계와 갖가지 방식으로 연결하고 접속하는 것, 즉 “여러 기계들”이다. 사람은 말하고 먹는 입이 작동하는 한에서만 사람이다. 물과 물 사이에서 삶과 죽음, 순간과 영원, 그리고 짝 짓고 먹고 사는 일의 던적스러움과 고단함이 덧없이 흘러간다. 이 세계에서는 “지는 꽃은 쓸쓸함을 다해 나무를 잊을 뿐”(「목련은 무엇으로 지나」)이고,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신발」)거나 “누가 이 허방을 살다 가나요”(「웅덩이」)라고 묻는다. 수양버들은 죽어가는 늙은 개와 죽어가는 사람들을 제 무릎 아래 뉘이고(「수양버들」), 새는 “바람벽 지나 내 귓속에서” 울고, “내 이마에 앉아”(「새」) 운다. 시인은 이 물물의 세계를 보고 듣는 자다. 보고 듣고 겪은 것을, 때로는 경이와 한 줄기 번개와 같은 전율을 시적 전언으로 전한다. 이창수의 시세계는 어떤 도덕이나 이념의 주장보다는 사실의 관찰이 돋보이는 현실주의의 세계에 속한다. 그의 시들은 물물들의 현존을 쓰다듬는다. 이창수 시의 말랑말랑함은 화석화된 도덕의 거친 주장이 아니라 사실들의 세계를 조목조목 관조하는 데서 나온다. 그의 시는 범박한 사실주의적 관찰에서 시작해서 홀연한 망아(忘我)의 세계로 넘어간다. 망아의 세계란 현실의 고단함이나 비루함을 넘어선 꿈의 세계이고 초연함으로 그윽해지는 세계다. 시인의 화법에 따르자면, “흙탕물에 비치는 하늘”이고, “깊고 고요”한 심연이다(「웅덩이」). “흙탕물”이 실상(實相)이라면 “하늘”은 환(幻)이고 초월은유의 이미지다. 이때 “흙탕물”은 돌연 환과 망아의 세계를 비추는 마법의 거울로 바뀐다.
길바닥에 흙탕물이 고여 있다
흙탕물에 비치는 하늘은 깊고 고요하다
하늘 위로 새와 구름이 지나간다
누군가 그 안으로 들어가 마음의 빗장 지른다
새와 구름이 사라진 고요한 대낮
시골집 툇마루 위
울다 잠든 아이의 눈두덩이에
말라붙은 눈물자국이 보인다
손바닥으로 아이의 눈을 닦아주는 그대여
누가 이 허방을 살다 가나요
「웅덩이」
“웅덩이”란 허방의 세계다. 비가 한바탕 쏟아진 뒤 수레바퀴가 지나가 팬 자리에 웅덩이가 급조된다. 흙탕물이 괴고, 거기 하늘이 비치고, 그 위로 새와 구름이 지나간다. 웅덩이를 지나가는 것들에 대한 찰나 지각이 세계에 대한 지각으로 부푼다. 그 지각의 지각이 이어지는 곳에서 “누가 이 허방을 살다 가나요”라는 처연한 물음이 생겨난다. 허방의 세계란 선의 화법으로 말하자면 “개새끼 똥구멍”2)이다. 그만큼 비루하고 누추하다. “개새끼 똥구멍”은 일체 현상의 세계를 가리킨다. 현상의 세계란 허방이고, 그것은 꿈이고, 환상이고, 물거품이고, 그림자의 세계다.3)
소나기 지나가고 물웅덩이가 남아 있네
물웅덩이 속으로 구름이 지나가네
구름 속으로 고추잠자리가 사라지네
말라붙은 흙 속으로 하늘이 사라지네
흙 속으로 사라진 하늘에서 개망초가 올라오네
개망초 위로 소나기와 구름과 고추잠자리가 지나가네
모두가 지나간 자리에 첫눈이 내리네
「立冬」
「웅덩이」와 「立冬」은 쌍둥이처럼 닮아 있다. “물웅덩이”는 하나의 우주다. 여기 있음의 세계다. 이것 위로 모든 것들이 지나가고, 덧없이 사라진다. 물웅덩이는 말라 사라진다. 구름도 고추잠자리도 하늘도 사라진다. 마른 물웅덩이에서 개망초가 올라온다. 그러나 그도 시들면 덧없이 사라진다. 그런 까닭에 마른 웅덩이는 아무것도 머물지 않는 영원토록 비어 있는 공간이다. 텅 빈 자리에 첫눈이 내린다. 하얗게 내린 눈은 물물의 여기 있음을 덮는다. 물물의 형상과 어우러짐도 지워지고 그 일체의 실상과 연기가 하나로 변해버린다. 세계의 변전이 개별자의 삶을 삼켜버리는 순간은 이렇게 온다. 많음과 하나의 분별이, 영원과 찰나의 분별이 사라진다. 이때 물물의 현존도 아름다움도 아무 뜻이 없다. 이게 바로 망아의 세계다. “흙탕물”과 “하늘”은 둘로 나뉘어져 있되 한몸 안에 구현되어 있다. 한몸 안에서 그 분별이 또렷하다. 그 분별은 수직의 위계에서가 아니라 수평의 평등함으로 명징하다. “흙탕물”이 품은 새가 날고 구름이 흐르는 “하늘”이란 현실 너머가 아니라 현실 안에서 꾸는 초연함이고 피안이다. 이는 탁함 속의 정함이요, 무명(無明) 속의 밝음이요, 유위(有爲) 속의 무위(無爲)라고 할 수 있다.
1
초등학교 2학년 때였습니다
해질녘 겨울 강가에서
황소만한 새가
서쪽 하늘로 날아가는 걸 보았습니다
짙은 암회색 깃털의 새는
가는 길이 멀어 힘들다는 표정으로
지상의 나를 느릿느릿 지나갔습니다
늙고 지친 새야 어디로 가느냐?
큰 새에게 행선지를 물었습니다
큰 새는 대꾸도 없이
나에게서 아주 멀어져 갔습니다
2
늦가을 저녁
아버지와 어머니 중학생이 된 나와 동생이
묵석골 감나무밭에서 감을 따
집으로 돌아오는 저녁
황소보다 갑절이나 큰 새가
커다란 소나무에 앉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 순간 소나무가지 우두둑 부러지는 소리가
내 귀에 뚜렷하게 말뚝 박혔습니다
우리 가족을 낚아 챌 만큼
아주 큰 새였지만 다행히
우리 가족을 낚아채지는 않았습니다
3
중학교 3학년 때 천마산으로 봄 소풍 갔었습니다
길주랑 둘이서 점심을 먹다
아카시아 나무에 비닐호스 같은 것이 걸려
바람에 나풀거리는 걸 보았습니다
어른 세 사람의 키보다도 훨씬 넘는 길이었고
어떤 것은 그보다 훨씬 긴 것도 있었습니다
가까이 가보니 뱀의 허물이었습니다
세상에 이렇게 큰 뱀이 있다니!
우리는 죽기 살기로 도망쳤습니다
4
큰 새와 큰 뱀에 대한 두려움은 곧 없어졌지만
그 기억 때문에 거짓말쟁이가 되곤 합니다
살아오면서 가장 두려운 일은
거짓말쟁이로 낙인찍히는 일이고
종종 그런 경우를 당하게 되는 때가 있습니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큰 새와 큰 뱀에 대한 기억을 버렸습니다
하지만 추운 겨울밤이면
몇 접의 떫은 감과 봄날의 소풍은
큰 새와 큰 뱀이 되어
지금도 나를 찾아오곤 합니다
「큰 새 두 마리와 큰 뱀과 나」
망아의 찰나 체험을 담은 「큰 새 두 마리와 큰 뱀과 나」라는 시는 인상적이다. 이 시는 『장자』의 「소요유(逍遙遊)」편에 나오는 곤과 붕의 우화를 연상시킨다. 시의 화자는 초등학교 2학년 때와 중학교 때 황소만한 새와 황소보다 갑절이나 더 큰 새를 본다. 황소만한 새는 서쪽 하늘로 날아가고, 황소보다 갑절이나 더 큰 새는 커다란 소나무에 앉아 있다. 중학교 3학년 때 어른 세 사람의 키를 넘는 큰 뱀의 허물을 본다고 기술한다. “세상에 이렇게 큰 뱀이 있다니! / 우리는 죽기 살기로 도망쳤습니다.” 큰 것과 마주쳤을 때의 반응은 놀람과 두려움이다. 시의 화자는 죽기 살기로 도망간다. 이것은 사실 같은 거짓말일까, 아니면 거짓말 같은 사실일까. 이게 사실이든지 기억의 왜곡이든지는 중요하지 않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을 만드는 것은 바로 자신의 의지, 내면의 자아다. 한 철학자는 “우리는 모두 우리의 꿈의 숨은 연출자다.”(쇼펜하우어)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큰 새 두 마리와 큰 뱀”의 이야기를 믿지 않는다. 시의 화자는 “거짓말쟁이로 낙인찍히는” 게 싫어서 “큰 새와 큰 뱀에 대한 기억”을 버린다. 그 기억을 버림으로써 시의 화자는 세속과 타협하고 현실로 귀환한다. 아무튼 많음과 하나, 큰 것과 작은 것, 영원과 찰나가 경계없이 어울리는 원융무애(圓融无涯)한 세계를 엿보았다는 게 중요하다. 그것은 “흙탕물”과 거기 비친 “하늘”이 하나로 합쳐지고, 세속과 피안이 몸섞는 찰나다. “큰 새 두 마리와 큰 뱀”은 “흙탕물” 위로 떠가는 “하늘(망아)”의 영역에 속한다. 소년 이창수가 틀림없을 소년 화자는 주관의 발견과 경이의 체험을 했다는 사실에 주목하자. “큰 새 두 마리와 큰 뱀”은 상상력의 태초, 원초의 체험이다. “흙탕물”에서 “하늘”을 꿰뚫어 보는 이 놀라운 체험이 그를 시인으로 키운 자양분이 되었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큰 새 두 마리와 큰 뱀”은 그 본질에서 실재가 아니라 헛것, 환영, 현실이 빚은 신기루다. 어린 시의 화자는 이미 몸됨의 세속을 자각한 자로서 의연하다. 그 의연함에 “큰 새 두 마리와 큰 뱀”의 세계와 부딪치자 의연함은 사라지고 오로지 놀라 도망간다. 왜 그랬을까? 현실과 다른 세계의 낯섦 때문이다. “큰 새 두 마리와 큰 뱀”이 계시하는 삶 너머의 삶이 뿜어내는 압도적인 낯섦, 그 초연함이 불러일으킨 경이 때문이다.
강가에서 죽은 두루미를 만났다
뼈만 남긴 두루미는 마지막까지
제 긴 부리 강을 향해 뻗었다
물고기 잡기 위해
해종일 강물에 집중했을 부리는
죽음 이후에도
날카로움 잃지 않았다
두루미의 녹두알만큼 작은 눈구멍으로
일몰의 하늘이 보였다
날짐승들이
캄캄한 어둠을 뚫는
긴 부리를 앞세우며
어둠 속으로 날아갔다
「긴 부리를 가진 짐승」
허방의 세계란 녹두알만큼 작은 두루미의 눈에 비친 세계일 것이다. 이 세계는 생존의 바탕 조건이다. 거기서 날고 짝짓기를 하고 먹이를 구하던 두루미는 죽었다. 시인은 죽은 두루미의 “해종일 강물에 집중했을 부리”를 보고 이 허방의 세계에 소용돌이치는 삶과 죽음에 대해 지각한다. 그것은 날카로운 내적인 지각이다. 그 지각의 실체는 모호하다. 두루미의 날카로운 부리에서 두루미의 먹이를 찾아 헤매는 일의 고단함에 제 생업의 고단함을 슬쩍 겹쳐본다. “긴 부리를 앞세우며 어둠 속으로 날아가는” 두루미들은 이 물물의 세계에 작동하는 전체로서의 필연을 보여준다. 이 필연 위에서 삶은 사고-사건이다. 두루미들은 그냥 날아가는 것이 아니다. 긴 부리를 앞세우며 날아간다. 긴 부리는 “입”이다. 도덕적 정열에 앞서는 먹고 사는 일의 숭고함에 대한 암시다. 죽음이 있기에 살아 있음은 지복(至福)이다. 지복이기에 숭고하다. 그래서 두루미들은 어둠 속을 날아가는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돌 속에서 물고기가 헤엄치고 있다
가시만 남은 몸으로 헤엄치고 있다
눈꺼풀도 없이 앞만 보고 있다
물고기에게는 전생도 후생도 없다
오직 현생만 있을 뿐이다
석경(石經)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다
물고기가 돌의 강물에서 헤엄치고 있다
백리 또 백리
「화석」
허방의 세계란 “물고기가 돌의 강물에서 헤엄치”는 화석의 세계이기도 하다. 물론 이것은 사실적 관찰이 아니라 상상으로 붙잡아낸 세계다. 물고기는 이미 죽었다. 화석이 되었다. 죽은 물고기는 “돌의 강물”에서 헤엄을 치고 있다. 그게 죽은 물고기의 현생이다. 이 현생은 전생도 후생도 없는 흔적으로서의 삶이다. 이것은 공(空)이고 무(無)다. 모든 산 것은 이 공과 무로 돌아간 뒤에 비로소 무애의 경지에 닿는다. 두루 걸림이 없다. 걸림이 없으므로 자유롭다. 두루 자유롭기에 무엇을 소유하려는 욕망에서도 자유롭다. 아울러 이 세계는 상망(相忘)의 세계다. 상망은 서로의 존재를 잊음이다. 잊었으니 너와 나의 분별도 뜻없다. 일체만물이 뜻없음 안에서 넓게 퍼져 있다. 동사인 삶 들을 떠받치는 것은 바로 이 우주의 공과 무다. 물고기도 두루미도 사람도 이 무에서 나와 다시 무로 돌아간다. 무에서 무로 돌아가기. 무와 무 사이에서 춤추기. 그게 삶이다. 산다는 건 “흙탕물”에서의 사건이요, “하늘”은 “흙탕물”이 꾸는 꿈이요 아스라한 피안이다.
밧줄에 묶인 강아지가 밧줄과 함께 놀고 있다
밧줄을 물고 할퀴며 밧줄에 길들여지고 있다
밧줄이 허락한 거리는
은행나무 둥치에서 치킨집 유리문까지
강아지는 맹렬한 속도로
치킨집 유리문을 지나가려다 나동그라진다
나동그라지면서도 밧줄에서 벗어나려고 애 쓴다
밧줄이 느슨한 자리에
주인이 놓아둔 양철밥그릇이 있다
밧줄과의 놀이에 짜증난 강아지가 밥그릇을 뒤엎는다
곧바로 밧줄의 길이가 짧아진다
은행나무 아래 늙은 개가 긴 혀를 내밀어
강아지의 잔등 천천히 핥아준다
은행나무에서 유리문까지가
살아서 갈 수 있는 제 거리의 전부라는 걸 아는 강아지
은행나무와 치킨집 유리문에 싼 오줌으로
제 영역을 지킨다
이윽고 강아지는 밧줄 너머의 세상을 바라본다
밧줄에 목이 감긴 강아지가
지금까지 내민 혀 가운데
가장 긴 혀를 주인에게 내민다
「세상에서 가장 긴 혀」
심상하게 묘사된 강아지의 생태에서 시인은 욕망의 세계를 적시해낸다. 강아지의 자유는 줄에 묶여 있기에 제약된다. 고작 일삼는 놀이가 양철밥그릇을 뒤엎는 것이다. 강아지는 “나동그라지면서도” 저를 묶은 줄에서 “벗어나려고” 줄과 씨름을 한다. 주인이 있고, 줄로 묶인 강아지가 있다. 줄과 그 예속 사이에서 강아지가 보여주는 행위들은 비천하고 졸렬한 삶의 실상이다. 강아지를 삶으로 바꿔보자. 이 시는 돌연 비루한 삶의 풍경으로 바뀐다. 줄에 묶여 있는 것은 바로 사람이다. 줄에 묶인 강아지는 욕망의 한계 속에 갇혀 있는 삶에 대한 환유로 읽힌다. 주인에게 내미는 개의 “가장 긴 혀”란 무엇인가. 제 목에 줄을 건 주인을 향한 비굴한 아첨과 굴종의 혀다. 범박한 시선이지만, 그 시선에 의해 드러나는, 그 어디에도 추상과 사변이 끼어들지 못하는 현실의 비루함은 결코 범박하지 않다.
3월에 눈이 내리네
3월에 내리는 눈은
땅에 닿기도 전에 녹아버려
발자국 하나 남길 수 없네
그 무엇 하나 새길 수 없는 마음으로
3월에 내리는 눈을 보네
우우우우 유리창엔
바람의 한숨만 쌓이고
유리창에 흘러내리는 긴 눈물 지우며
어둔 창의 뒤편에 골몰하다보면
가 닿을 수 없는 자리마다
오래된 사람의 발자국이 보이네
삼층석탑을 쌓던 구름이 무너진
3월 하늘에 눈이 내리네
「3월에 내리는 눈」
「3월에 내리는 눈」이란 얼마나 보잘 것 없는가. 그것은 땅에 닿기도 전에 녹아버린다. 3월의 눈은 “발자국 하나 남길 수 없네”. 이 철 늦은 눈은 아무 보람도 결실도 없는 삶의 표상이다. 한숨과 눈물은 시인의 것이다. 아울러 그것은 “그 무엇 하나 새길 수 없는 마음”의 산물이다. 땅에 닿기도 전에 녹는 3월의 눈은 꿈이 꺾인 패자의 헛된 시도다. 좌절의 누적은 내면에 심리적 패배주의의 누적으로 이어진다. 이게 끝이 아니다. 놀라운 반전이 있다. 시인은 3월의 눈에서 “오래된 사람의 발자국”을 기어코 읽어낸다. 태초의 사람, 이 세상에 처음 내린 눈을 밟은 사람의 발자국이다! 세련된 수사도 없고 형식의 새로움도 구현하지 않는 이창수의 시는 가끔 이렇게 비범한 관찰을 숨겨놓는다. 이런 비범한 관찰이 시의 평이성을 단숨에 무너뜨리고, 양질전화(良質轉化)하며 평지돌출(平地突出)한다.
무엇보다도 이창수의 시들은 생활의 맥락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현란한 이미지도 없고, 화사한 말의 성찬도 없다. 생활은 근사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생활은 쉰내가 나고 누추하고 음습하고 암울하다. 그런 생활의 맥락에서 보자면, 제 삶은 보잘 것 없다. 그래서 시인은 “할머니와 어머니가 사십 리길 걸어 / 시든 배와 쌀 닷 되를 놓고 / 내 명운을 빌어주었으나 / 나는 폐사지 잡초보다 보잘 것이 없다 / 보잘 것 없는 잡초가 / 내 전생이면서 현생이다”(「일월사 미륵불」)라고 자조 섞인 고백을 한다. 폐사지의 잡초보다 보잘 게 없는 삶이라니! 그게 제 전생이며 현생이라니! 그 어조의 절박함이 순간 가슴을 친다. 가슴이 뭉클하다. 이기는 것들은 생명 약동한다. 뻗고 솟고 번지고 무성하고 창대하다. 반면에 지는 것들은 꺾이고 줄고 가라앉고 무너지고 작아지고 사라진다. 생명 쇠약의 기운으로 그 실상이 보잘 것 없어지는 것이다. 이창수의 시는 끝없는 패배와 좌절로 인해 보잘 것 없어지는 이 삶의 보잘 것 없음에 대한 탐구다. 그는 욕망과 현실에 대한 사실적 관찰로 토대를 쌓고 그 위에서 묻는다. 왜 삶은 이토록 보잘 것 없는가. 어떻게 하면 삶은 보잘 것 있어 질 것인가. 그런 물음들의 연쇄가 시인의 자의식의 껍질을 뚫고 나온다. 구체적 생활의 실상을 꿰뚫는 이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물음들의 겹으로 이루어진 이창수의 시를 읽는 일은 정말 즐겁고 고통스럽다.
-http://cafe.daum.net/woripoem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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