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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는 어린 시절 대부분을 강원도 오지에서 보냈다. 정선 동강의 귤암리, 구절양장의 탄광촌인 구절리, 눈이 오면 전국에서 가장 먼저 고립되는 명주군 대기리 등이 그곳이다. 오지에서의 성장은 나에게 ‘아득함’과 ‘간절함’을 주었다. 문을 열면 저 멀리 첩첩한 산과 망망한 하늘만 보이고, 또 그러면 나도 모르게 한숨부터 터져 나오던 아득함, 그리고 그 아득함 끝에 애간장을 녹이며 찾아들던 간절함. 내 시론의 밑자리도 아마 여기, 오지 어디쯤일 것이다.
2.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 대기리에 살 때, 우리 집 뒤에는 대처승 가족이 살던 움막 같은 집이 한 채 있었고, 그 집과 우리 집 사이에는 내가 좋아하던 심배나무(돌배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그 대처승에게는 올망졸망한 자식들이 줄줄이 달려 있었고, 마당 가득 가난이 널려 있었다. 동생이 어릴 때 경기(驚氣)를 심하게 앓았는데, 한 날은 목숨이 경각에 달릴 정도로 극심한 고통에 시달렸다. 오지여서 병원도 없던 터라, 어머니는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대처승을 집으로 모셨다. 그날 밤 그 대처승은 커다란 징을 울리며 말없이 밤을 지켜주었다. 그날 이후, 나는 아침마다 그 집 마당을 건너다보는 습관이 생겼다. 아직도 기억에 선연히 남아 있는 것은, 그 대처승이 아침 일찍 마당에 나와 무연하게 먼 산을 바라보던 모습이다. 나는 입안 가득 침이 넘치도록 신 심배를 먹으며 그 모습을 오래도록 지켜보곤 했다. 내가 지금까지 이어온 삶이, 먼 산에 가 닿던 그 무연함과 이를 바라보며 삼키던 심배의 신맛 사이를 오간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볼 때가 잦다. 물론 시도 그러했을 것이다.
3. 최근 23박 24일 동안 술을 마신 적이 있다. 물론 먹고사는 일을 해 가면서 마셨으니 주야장천 마신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내 몸과 마음의 창고에는 23박 24일 동안의 무한 독주(獨酒)로 저장되어 있다. 3박 4일이 고작이던 술자리가 23박 24일로 이어지기는 처음이다. 시작은 미약했으나 끝은 창대했던 이 독주의 나날 끝에 나는 비로소 나 자신이 온전한 ‘세속주의자’가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세속을 살면서 온전한 세속주의자가 되지 못해 방황했던 지난 역사가 저 깊은 해저 속에서 해와 달처럼 떠올랐다 다시 잠기기를 반복했다. 가수 전인권은 ‘라’ 음이 나오지 않을 때는 3박 4일 동안 밤낮으로 ‘솔’ 음만 생각한다고 한다. 그러다 보면 갑자기 ‘라’ 음이 터져 나온다는 것이다. 나는 좋은 시는 다 이 ‘라’ 음과 같다고 생각한다. 23박 24일의 독주는 사실 세속을 넘어가고 싶은 발원 때문에 시작된 것이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 끝에서 온전히 세속주의자가 된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라’ 음을 꿈꾸며 ‘솔’ 음만을 생각하다가, ‘파’ ‘미’ ‘레’ ‘도’를 얻었다고나 할까.
4. 사춘기의 절정이었던 2학년 어느 날, 삶을 통째로 한 바퀴 돌리는 사건이 일어났다. 섬약하셨던 아버지가 자신의 그림자를 지우려 하신 것이다. 그날 이후 내 발은 지상에 닿지 않았다. 중환자실, 병원 뒤뜰의 하얀 민들레, 그리고 끝내 가출로 이어졌던 그 시절에 나는 무슨 운명처럼 시를 만났다. 백지 위에 중얼거림처럼 무엇인가를 계속 써나가며 그 턱없는 막막함을 견뎌 나갔다. 처음에는 그게 시가 될 줄은 몰랐다. 시를 쓰지 않았다면 아마도 내 발은 평생 지상에 닿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면, 나는 아마도 지금쯤 한소식한 조폭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 시절의 나는 생사의 두려움이 없었기 때문이다.
5. 좀 덜떨어져 보이고 때로는 흉해 보이기는 해도, 나는 아직도 시가 목숨을 건 연애와 맞먹는 중량을 지니고 있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다. 그래서 시가 별 게 아니라는 듯이 얘기하는 시인들을 만나면 마음이 아려 온다. 그리고 언어를 무슨 공깃돌처럼 가지고 노는 시를 봐도 마음이 아려 온다. 턱없는 막막함 속에서 지상에 발을 닿기 위해 온몸으로 언어에 매달렸던 기억 때문이다. 어쩌겠는가. 이것이 나의 한계이고, 내 시론의 출발점인 것을. 시가 마치 동산을 올라가듯, 빵이 부풀어 오르듯 완만하게 천천히 좋아질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을 나는 믿지 않는다. 시는 계단처럼 좋아질 뿐이다. 한 계단 오르면 다시 턱 벽이 앞을 가로막고, 한 계단 올랐다 싶으면 또 다른 벽이 앞을 턱 가로막는다. 나는 맨바닥에서 세 계단쯤 올랐을 때 시인이 되었던 것 같다. 계단을 오르려면 목뿐만이 아니라 머리와 가슴, 그리고 손가락 발가락 하나까지도 ‘솔’ 음을 품어야 한다. 선방에서 화두를 참구하는 자세를 얘기할 때 드는 비유처럼, 닭이 알을 품듯, 아기가 엄마 생각하듯, 삼 년 된 과부가 남자 생각하듯 해야 겨우 한 계단을 오를 수 있을까. 이런 체험을 몸에 새긴 시인이라면 시가 부산스러워질 틈이 없다. 우리 시가 부산스러워지고, 호들갑스러워진 것은 다들 어디선가 빵 만드는 기술을 배워 왔기 때문이다.
6. 조폭이 되지 못했던 나는 대학교 3학년 때 시인이 되었다. 시인이 되었지만, 축하해 주는 이가 없었다. 전국 지도를 벽에 붙여놓고 대학생 시인이 어디에 살고 있는지 점을 찍으며 나 자신을 독려해 나가던 시절이었다. 젊은 시절부터 나는 강원도를 떠나고 싶지 않았다. 대학 졸업 후 지역 일간지의 기자가 된 것도 단지 이 이유에서였다. 기자 시절, 나는 내가 열심히 살면 그만큼 좋은 시가 나올 거라는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 어리석게도 삶이 자연스럽게 시를 견인할 줄 알았다. 이때 깨달은 것 하나, 시는 연인처럼 아껴주지 않으면 언제든지 떠날 준비를 한다는 점이다. 시를 앞전에 세우지 않으면 시는 언제든지 뒷길로 빠져나가고야 만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등단 8년 만에 첫 시집이 나온 것은 이 때문이다.
7. 시를 다시 앞세우고 탈출했으나 몸에서 독이 빠져나가지 않았다. 기자 시절 너무 많은 사람을 만나면서 생긴 인독(人毒)이었다. 이 시절, 좋은 사람을 만나면 약이 되지만, 원하지 않는 사람을 만나면 독이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온종일 고향 바닷가 언덕에 차를 세워 놓고 독이 빠지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이내 절로 들어갔다. 간절한 서원이나 각오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절에 들어가 모셨던 노스님께서 당시 내설악 백담사에 주석하고 계셨는데, 지금은 유명을 달리하신 시인 한 분을 사이에 넣어 나를 찾으셨다. 노스님을 뵈러 내설악 계곡을 올라가던 날이 마침 초가을이었다. 당시는 지금처럼 내설악을 찾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던 때라 혼자서 한가하고 적요한 내설악 초가을 속으로 들어갔다. 아래로는 청정한 물이 흐르고, 위로는 눈부신 단풍이 펼쳐진 길을 걸어가면서 여기서 한 철만 살아봤으면 원이 없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날 이후 노스님을 모시고 10여 년을 살았다. 머리 긴 청맹과니가 절에 산다는 것은, 머리 깎은 스님이 칼을 들고 정육점에서 일하는 것처럼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노스님의 각별한 배려와 자비 덕분에 ‘한가하고 적요한 나’를 들여다볼 수 있었다. 이 시절, 때때로 나를 들여다볼 때마다 절에 들어온 것이 어떤 운명처럼 여겨질 때가 많았다. 산사의 깊은 밤, 혼자 개다리소반을 앞에 놓고 앉아 있으면 더욱 그러했다. 산다는 것은 다 지상에 온전히 발을 딛고 살아가기 위한 몸부림처럼 여겨졌다. 내가 이 깊은 산사의 칠흑 같은 밤에 홀로 반딧불처럼 앉아 있는 것도 그런 여정일 거라고 믿게 되었다. 이 시절의 시는 이 여정에 대한 자각(自覺)을 담아낸 것이었다.
8. 그리고 나는 지금 ‘세속주의자’가 되어 있다. 세속주의자로서 시인은 저 태평양 건너 옥타비오 파스 형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언어에 봉사하는 자’이다. 형님이 사용한 뜻과는 조금 다르지만, 어찌 되었건 세속주의자로서 시인은 비루한 삶의 생로병사, 희로애락을 껴안으면서, 애련하게 때로는 해정하게 언어의 세속성, 언어의 세간성(世間性)을 수락해 나가는 자이다. 그런 의미에서 ‘언어에 봉사하는 자’라는 것이다. 산에서 내려온 뒤 나는 한동안 터미널과 병원에 쪼그리고 앉아 생을 구경(究竟)하여 왔다. 개다리소반 앞에 앉아 있는 대신, 텅 빈 터미널과 병원 나무 밑에 쪼그려 앉아 삶의 희로애락과 생로병사를 참구해 보았다. 무엇이 나를 거기에 무연하게 세워 놓았을까. 오지, 대처승, 심배나무, 중환자실, 하얀 민들레, 공중부양, 가출, 인독, 내설악 단풍, 개다리소반, 반딧불 등이 떠올랐다 잠기기를 반복할 뿐. 어느 날은 입에서 아난다를 부르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마치 슬픈 부처가 된 것처럼 ‘아난다야, 슬퍼하지 마라. 세상은 그렇게 아픈 것이다.’라고 중얼거리곤 했다. 터미널과 병원에서 나는 그동안 나에게 뭉쳐 있던 많은 화두들을 자문자답하면서, 그리고 몸에 새기면서 점차 세속주의자가 되어 갔다. 그 끝에서 23박 24일 동안 잘 놀았다. 네 번째 시집은 이 구경의 결과물이고, 나의 시론도 여기까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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