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시

[스크랩] 시조의 형식과 음악성 -박구하

문근영 2014. 2. 26. 11:39

 

 

 

시조의 형식과 음악성

 

박 구 하

 

 

 

 

늘 하는 말이지만 시조는 시가 된 후에 다시 시조가 되어야 하는 이중 작업이다. 이 말은 형식이 되지 않으면 시조가 안 된다는 말과 같다. 형식에 대한 기초가 되어 있지 않은 시조는 시일 수는 있어도 시조는 못 된다는 말이다.
자수나 음보는 그 동안 하도 많이 거론하여 그 말만 꺼내도 "또 해묵은 자수논쟁이냐?" 하고 얼굴을 돌리는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미안하지만 시조가 정형시인 한, 자수니 음보니 하는 것은 싫다고 피해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해운대 백사장은 내 누이 집 앞마당인데/ 고추보다 매운 가을을 혼자 널어 말리다가/ 밤이면 파도소리를 돌돌 말아 덮고 자더라
-정완영, '누이의 바다' (열린시학 2004년 여름호)

<열린시학>에는 시와 시조가 뒤섞여 있는데 굳이 이 작품을 언급한 것은 작품 내용도 내용이지만 팔순의 노시인이 형식에서 ①율격의 정체를 정확히 알고 ②평생 한 치의 흐트러짐이 없이 그 율격을 지켜가고 있는 점을 말하고 싶어서다. 거기 같이 실린 다른 시인들의 시조 중에는 시조의 변종이라 할 혼합연시조도 꽤 보이고 다음 예와 같은 종장들도 보인다. (빗금은 필자가 율격상 임의 구분하였음)

- 숨구멍 사이로/ 시간을/ 넘나들게/ 하면서
- 핵, 핵, 핵 거리는/ 봄날, / 꽃은 꽃잎/ 다 벗었다
- 이만치/ 따라와/ 마주한 눈길/ 너무 밝구나
- 삭은/ 내 책상 위에는/ 사월에도/ 눈이 온다
- 껌껌한 화분들, / 그 속/ 공허에/ 갇힐 때

시조 율격의 핵심은 종장의 앞 귀 첫 마디와 둘째 마디에 있다. 그 양자는 자수도 "3자 정미", 또는 "5자 이상"으로 엄격하지만 호흡이 동일 마디 내에서 단숨에 이어져야 한다.
그런데 위의 예는 자수와 음보가 따로 놀고 있다. 작가는 제대로 맞추었다고 생각할 지 모르나 이는 착각이다. 이런 예는 유명 시조상 수상작품에도 발견된다.
이 작가들 대부분이 현재 우리 시조단을 지탱하는 위치에 있는 점을 감안하면 "율격"이라는 기본적인 문제마저 얼마나 안이하게 다루어지고 있는지 짐작이 간다.
오늘날 일본의 하이꾸 徘人이나 단가의 歌人들 중에는 우리 시조를 정형시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 많은데 그것은 首건 章이건 句건 고무줄처럼 늘어났다 줄어들었다 하는 무잡성에 제1의 원인이 있다.
시조의 형식을 말할 때 우리는 자수나 음보만 따질 게 아니라 리듬감, 즉 율격을 따져보아야 한다. 시조는 누가 뭐래도 음악성에서 출발했고 이, 겉으로 드러난 음악성 즉 외재율이야말로 시조의 시에 대한 주요한 변별점이다. 아무리 회화성이 강조되는 시대라 하더라도 이 음악성은 최소한 시조의 記表에는 반영되어 있어야 한다.
이 음악성을 생각한다면 자수나 음보가 어떻게 되어야 할 것인지 자명해진다. 예컨대 한 章 내에서 기호나 자수가 고저장단 변화 없이 진행한다거나 불규칙적인 沒박자로 시종일관하고 음보가 제멋대로 줄거나 늘어난다면 그것은 이미 시조가 아니다. 시조 특유의 굴곡과 신축, 도약과 반전 등이 없는 그야말로 밋밋한 '정형적' 자유시가 될 뿐이다.

하늘이 하늘빛으로 산도 산빛으로 바로 보인다
애증과 욕망과 갈등, 용광로로 타던 젊은 날의 고뇌는
스스로 낙엽 지우고 빈 가지의 슬기 진실로 황홀하다
-박옥금, '늙어서 마음 편안하다' 일부 (열린시학 2004년 여름호)

이 작품에서 어떤 음악성을 찾겠는가. 내용적으로 이 작품은 젊은 날의 '욕망'의 콩깍지를 벗고 "산은 산, 물은 물"이라는 깨달음의 경지에서 유물론을 극복하고 영혼의 승천을 바라는 일종의 기원시로서 비록 타의에 의해서나마 '욕망'을 버릴 수 있어 '마음 편안하다' 는 반어법이 실감나게 들리는 가작이다.
그러나 이 작품이 시조라 한다면 형식면에서 이 首는 각 행마다 1개 음보씩 늘어난 3장 15음보로 읽히는 장시조일 수 있고, 억지로 읽으면 12음보로 못 읽을 것도 아니지만 음보는 억지가 아니라 자연적인 것일 것이므로 그런 점에서 이 首만 본다면 수년 전 발표된 초정의 '느티나무의 말'과 같은 차원에서 삼행시로 볼 수 있다. 시로서는 성공하고 있다하더라도 시조로서의 율격을 잃었으니 음악성을 찾을 수 없는 것이다.
오늘날 시조가 "읽는 시조"다 뭐다 하여 너무 자유시를 의식하고 그 회화성을 따라 가려고 하는데 이것은 과연 옳은 방향일까. 현대시에서 이론가가 아무리 회화적인 것, "생각하는 시"를 강조하여도 독자들은 "음악적인 시"에 더 감동을 받는다는 통계가 나와 있다. 시든 시조든 이미지에 치중하다보면 난해해지기 쉽고 실험을 하다보면 자칫 율격이 무너지기 쉬운 법이니 어떤 경우에든 시조는 겉으로 음악성을 잃지 않은 채 안으로 회화성이든 그 어떤 의미적인 것이든 추구해야 할 것이다.

<월간문학> 7월 호는 시조작품이 전월에 비해 반이나 줄어 고작 5인의 10편이 실려 있다. 그 10편 중 6편이 단시조인 점은 약간 의외이다. 이런 비율이라면 시조는 이제 바른 길로 가고 있다고 할까.

필시 무슨 기쁜 일 그 곳에 있는 게야.// 어머니 손전등 켜들고/ 내 집 지붕 비추시니// 하늘은/ 잎새 한 장도// 허투루 떨구지 않네
-백이운, '기별' (월간문학 2004년 7월호)

지금 화자는 방안에서 지붕 위에 떨어지는 '잎새 한 장'을 심안으로 보고 있다. 육신의 어머니는 돌아가셨지만 마음속 어머니는 죽지 않고 집안 구석구석을 '손전등'을 들고 비춰주고 있으니 혼자 있어도 전혀 외롭지 않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오동잎 지는 한 소리에 가을이 온 줄 안다는 옛말처럼 '잎새'는 '기별'의 전령사이고 절절한 외로움은 아무리 슬픈 기별이라도 '기쁜 일'로 받고 싶은 것이다.
이 시조는 수미 도치법으로 되어 초장이 의미상 종장 역할을 하고 있다. '기별'은 원인 없이 '허투루' 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뿌린 만큼 과업으로 오는 것이니 일상을 올곧게 살아야 한다는 어머니의 유언일 수 있고 자기 다짐일 수 있다.
'필시'라는 말은 여기서는 추측이 아니라 간절한 자기 願望이요 誓願으로 읽힌다. 작은 입으로 큰말을 하고 있는 작품이다.

저기/ 혼자 밥 먹는 이// 등에서 문득/ 주르르륵// 모래 흘러내려/ 어둠 먹먹해져//
지나던/ 소슬한 바람// 귀 젖는다// 鳴沙...
-정수자, 「늦저녁」전문 (시집『저녁의 뒷모습』)

이 작품은 우선 행갈이가 현란하다. 단시조는 짧은 만큼 그 행갈이는 의미함축을 위한 유용한 수단이라 할 수 있는데 이 시조는 이 점에서 성공하고 있다. 행과 행이 영화의 장면 바뀌듯 명료하게 전환된다. 화자는 구차스레 의중을 발화함이 없이 다만 행과 행 사이에 많은 할말을 묻어놓고 있다.
'혼자 밥 먹는 이'의 '밥'은 예사 밥일 수 없다. 눈물밥이요, 모래밥이다. 저녁은 하루 중 가장 포근한 때이자 가장 인간다워지는 때이다. 어떤 이유에서건 그 저녁에 누군가와 함께 하지 못하고 '혼자' '밥 먹는다'는 것은 차라리 형벌이다.
'모래'는 시간의 표상이자 주변과의 불협화음이다. 가장 평화로워야 할 저녁에 '모래'처럼 섞이지 못하고 단절된 현장에서 긴장의 식은땀을 흘려야 하고 헛말들의 성찬 앞에 '귀'가 젖어 먹먹해진 퍼소나는 바로 우리 시대 소외된 자신이요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 먼, 가진 "그들"을 대유한다. 그래서 서민의 공간을 지나는 바람은 모래울음('鳴沙')이고 그 울음은 낮으나 깊고 '먹먹한' 것이다.
이 작품은 대상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대상을 밝히고 있는 드문 예로서 단시조의 영역을 확대하고 있다.

[이글은 월간문학 2004 8월호에 <이달의 월평>으로 게재된 글입니다.]

출처 : 시하늘
글쓴이 : 보리향(菩提香)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