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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기항지를 향한 순례자 - 이광석 시집 『바다변주곡』에 대하여

문근영 2014. 2. 26. 11:39

 

 

기항지를 향한 순례자

-이광석 시집 『바다변주곡』에 대하여

 

 

                                                                                                                                                                          이달균

 

우주를 한마디로 설명하려고 하거나, 신은 신비한 물약 정도로, 인간은 충족되어야 하는

원초적 욕망만을 지닌 존재 정도로 생각하는 이들을 측은히 여기소서.

그들은 천체의 음악을 결코 들어본 적이 없는 이들입니다.

-파울로 코엘료 '순례자' 중에서

 

 

이광석 시인의 6번째 시집 『바다변주곡』을 읽으면서 문득 ‘순례자’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하긴 코엘료의 말처럼 우주를 한 마디로 설명할 수 없지만 한 시인의 우주인 시집 한권을 놓고 한 단어로 압축한다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하지만 시집을 손에서 내려놓은 시방 내겐 딱히 그 말밖엔 떠오르지 않는다. 물론 ‘통곡의 벽’ 혹은 갠지즈강을 찾아가는 오체투지, 그 고행의 우기와 햇볕, 몸을 의탁할 누추한 추녀를 서성이는 나그네는 아니지만, 그가 절실히 찾아갔다 돌아오는 시의 여행 또한 고단하기는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시인의 말’에서 시인은 어머니와 바다, 겨울이미지를 겹쳐 놓는다. 각각의 것이면서 결국 하나인 의미들은 “또 다른 시의 인질이 되라고 채근하는” 존재들이다. “바다는 시의 염전”이고, “시의 모국어”이며 “영원한 동력 어머니의 소금꽃”이라고 말한다. 어머니에서 시작된 여행은 고향 경남 의령의 곳곳을 돌아, 남강을 타고 바다가 있는 도시 마산으로 와 다시 기차에 올라 간이역에도 잠시 머물다가 영혼의 기항지인 시(詩) 속으로 돌아온다. 허줄그레 하게 젖어서 돌아온 것 같지만 의외로 시들은 싱싱하다. 1959년 『현대문학』에서 시작된 시인의 길이 어언 50년이 넘었지만 그의 동력은 식지 않았다. 다시 말해서 시의 염전에서 거둘 소금꽃이 아직은 남았음을 의미한다.

 

전체 86편의 시편들 중에서 직접적으로 고향과 어머니, 마산을 노래한 시들이 절반에 이르고, 이웃에서 만나는 자잘한 일상과 경남 언저리의 단상들을 함께 묶었으니 이 시집은 주변 삶의 보고서라고 읽어도 무방하다. 아니, 더 범위를 좁혀보면 거의 한 평생을 산 마산과 마산을 비롯한 경남에 바치는 연서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때 기다림의 환승역 삼랑진, 대합실 가득 담배연기로 시간을 재던 50년대 녹슨 기억 속으로 밤기차가 간다 어제 밟고 간 그 레일을 오늘도 길들여진 야생마처럼 착하게 밟고 간다....(중략)...쓸쓸한 희망, 소매치기 당한 기대, 빛바랜 수묵화 같은 지문의 사자성어를 먼저 실어 보내고, 서울행 통일호를 접속시키던 역장의 푸른 깃발은 우리를 더 외롭게 했다.....(중략)...마지막 종착역 마산역이 밤기차를 세울 때까지 우리는 술에 반쯤 취한 객석에 감금돼 있었다 기다림이 없는 텅 빈 역 광장, 삼랑진발 야간열차가 버리고 간 또 다른 낯선 역이 거기 있었다

-<삼랑진역에 대한 명상> 부분

 

 

이 시는 시인이 서울 갔다 오는 기차를 생각하면 쓴 시다. 그 50년대의 녹슨 기억은 80년대까지도 계속되었다. 삼랑진역에서 환승해 온 한 사내에겐 마산의 역 마당도 낯설다. 동이 터오기 전 희뿌연한 새벽이었으리라. 논자가 주목하는 것은 이 시에서도 결국 마산역에서 그 고단한 하루의 여행을 끝마친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다. <밤기차, 간이역>, <막차를 기다리며>, <바다가 떠나고 있다>, <환승을 기다리며>, 이런 떠남의 종착지에는 반드시 마산이 자리한다. 그렇다면 시인에게 마산은 어떤 존재인가?

 

 

 

바다는 제 혼자 다니는 길이 있다

고급 세단 같은 상어가 다니는 길을 비켜

토종 전어 고등어떼 마실 다니는 작은 골목길을 달빛으로 간다

세월의 파편이 된 낡은 기억들 하나 둘 사라지고

돌아갈 수 없는 낯선 길 앞에 바다는 지금 아프다

보아라 물 어디에도 내가 적실 그리움은 없다

각혈하듯 시의 꽃을 피우던 가포 겨울바다도

조개껍데기처럼 개펄에 엎드려 있다

바다가 마지막 종점인 사람들에겐 바다는 더 이상

내 줄 어깨가 없다 세상의 집들이 어둠에 업혀

잠들 때 밤새 뒤척이던 바다는 제가 숨겨놓은

옛길 하나 불러낸다 그 길섶에 문신처럼 박힌 묵은 통증,

등지느러미 날 세운 쪽빛 너울로 환급 받고 싶다

-<바다 변주곡> 전문

 

 

이 시는 마산과 시인의 상관관계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바다가 마지막 종점인 사람들에겐 바다는 더 이상/내 줄 어깨가 없다”는 이 잠언과도 같은 말은 시인의 배수진이다. 기억이 사라지고 돌아갈 수 없는 낯선 길 앞에서 마주친 폐허의 바다는 더 이상 그리움의 대상이 아니다. 평생을 사랑하고 노래한 바다의 죽음을 보며 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다 그저 추억의 옛길 하나를 불러내어 묵은 통증이나마 가라앉히고 싶을 뿐이다. 환급되지 않는 시간의 주홍글씨가 바로 마산이다. 이 서정적인 시 속에 도사리고 있는 현실은 아픈 연대의 모순에 다름 아니다.

 

조금 상상력을 확대한다면 이는 마산으로 비롯되는 한국 후기산업사회의 자화상이다. 마산은 산업화와 그로 인한 폐허를 가장 먼저 경험한 도시다. 자유수출지역과 한일합섬으로 대변되는 산업화는 매립의 불도저소리로부터 비롯되었다. 물반 고기반의 숭어떼가 깝치고 뛰던 강구항과 놀빛에 젖은 채 아득한 봉암 개펄의 갈대밭을 갈아엎고 바다는 매립되었다. 그 위에 수출의 나팔소리 힘차게 자유수출지역이 들어서고 전국 7대 도시의 위용으로 산업화는 진행되었다. 골목은 술집의 해장국냄새로 넘쳐나고 상가마다 쇼 윈도우 불빛으로 밤을 밝혔다. 생산과 소비, 향락으로 치닫던 도시는 급기야 바다를 죽이고 마침내 사람을 죽이는 도시로 변해갔다. 바다가 돌아올 수 없는 종언을 고하던 날, 산업화의 끊어진 꼬리를 따라 도심은 황폐화되고 말았다. 이와 함께 ‘가고파’를 비롯한 문화의 깃발마저 포퓰리즘에 썰물처럼 밀려 나갔다. 위의 시 <바다 변주곡>은 그토록 사랑한 도시를 떠나보내고 혼자 부르는 장송곡이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이런 절망의 노래를 부를 순 없다. 시인이 절망을 딛고 새로운 희망을 찾아나선 곳은 바로 자연이다. 도심에서 멀지 않지만 그곳엔 생명이 숨 쉬고 부단한 희망을 재생한다. 주남저수지에는 철새들이 연착륙할 수 있는 활주로가 있다. 활주로 없이도 수직으로 나는 놈도 있다. 청둥오리, 고니, 기러기들이 활주로를 박차고 오를 때마다 물안개들이 몸을 낮춘다. 새벽이면 자유형으로 단련된 식성 좋은 떡붕어들이 어젯밤에 삼킨 달을 토하고, 저수지 아랫목에 노숙해 있던 수초들이 이빨을 닦는다. 학원버스에 실려 온 아이들은 관제탑 같은 탐조 전망대에 올라 망원경 하나씩 붙잡고 새들과 수화를 한다.

 

물이 물의 뼈와 무릎이 살로 빚은 물의 다세대주택, 천 년을 동거해도 소유권 시비가 없는 아름다운 생명들의 따뜻한 한 이부자락 주남저수지

평생 날개 하나 달지 못하고 생애의 이륙 한번 꿈꾸지 못한 갈대들이 오늘은 너의 활주로에 지친 첫발을 내리는 새들의 하강을 유도한다.

-<주남저수지에는 새들의 활주로가 있다> 전문

 

 

아름다운 시다. 앞에서 50년의 시력이지만 아직 젊은 동력이 살아있다는 것은 이런 시들이 있기 때문이다. 다소 산문적인 것이 불만이지만 “물이 물의 뼈와 무릎이 살로 빚은 물의 다세대주택, 천 년을 동거해도 소유권 시비가 없는 아름다운 생명들의 따뜻한 한 이부자락” 같은 참신한 표현으로 인해 충분히 상쇄 될 만하다.

 

무엇보다 눈길을 끄는 것은 철새들의 연착륙과 비상의 활주로가 되는 갈대들의 발견이다. 주남저수지는 창원의 외곽에 있는 철새도래지다. 산 하나를 넘으면 공단이지만 이곳엔 끊임없이 생명이 태어나고 먼 시베리아로부터 철새들이 찾아와 겨울을 난다. 한 번도 이륙을 꿈꾸지 못한 갈대들은 먼 하늘을 비행하는 새들로부터 소식을 듣고, 한 번도 땅에 뿌리내리지 못한 새들은 갈대에게서 묵중한 지층의 말을 듣는다. 이런 공존이야 말로 우리가 꿈꾸는 이상이 아닌가. 그들의 다세대주택엔 소유권시비가 없으니 말이다.

 

 

저만치 등 굽은 황혼이 걸어갑니다

늙은 황소가 느릿느릿 따라갑니다

하루 몫의 일몰을 위해 일 년은 열두 달,

한 달은 삼실일, 하루는 스물네 시간 분의 티켓을

미리 예약합니다 늙는다는 것은 세월과의 약속입니다

...중략...

모두가 떠나버린 생애의 저문 들판을

늙은 황소의 걸음으로 밟고 가는 여유도

아름다운 동행입니다

-<아름다운 동행>

 

 

갈대와 철새의 비상만큼이나 황혼과 늙은 황소의 동행도 아름답다. 전자의 것이 생명과 의지의 동행이라면 후자의 것은 관조와 맺음을 위한 동행이다. 갈대와 물의 배경 위에서 한 없이 날고 싶은 것이 젊음의 소망이라면, 저문 들판에 드리운 놀을 배경으로 느릿느릿 한 마리 황소처럼 생의 의미를 물으며 걷는 것은 노년의 여유다.

 

이제 시인은 그런 자세를 갖고 싶은 거다. 오래 그리워했고, 오래 고단했다. “어젯밤 누군가가/내 책상을 빼어갔다”고 퇴출을 예감한 적도 “비가 그리움의 끼니였던 때가 있었다.”며 다정도 병인 양 하며 밤을 지새우기도 했다. 그런 날들이 시인을 키우고 일으켜 세웠다. 사랑할 날도 미워할 날도 많지 않다. 하지만 그런 날을 새며 걸을 이유는 없다. 담담히 짙은 빛깔은 약간 지우고, 지워진 것들은 묽은 채색을 더하며 살아가야 한다. 더불어 살았다고 하지만 생각해 보면 삶은 늘 혼자였다. 자식을 위해 모든 것을 내어주던 어머니도 그렇게 혼자 가셨다.

 

 

 

...전략....

달은 평생 혼자 여행을 한다

아무도 동반하지 않는 그 자유가

한 달에 한 번 둥근 휘파람을 분다

어둠이 발을 건다고 넘어지지 마라

꽉 차서 모가 나지 않는 호수처럼

너도 다시 제 몸속의 하늘로 돌아갈 것이다

...하략...

-<달빛 연가>부분

 

 

생은 결국 혼자인 것을 깨닫기 위한 여정이다. 아니, 혼자에 익숙해지는 시간의 묘약을 얻기 위한 과정이다. 순례자는 그 길을 쉼 없이 걷는다. 젊을 때는 좌고우면 하였지만 황혼을 배경으로 걷는 황소의 시간에는 생각마저 지우고 그저 걸을 뿐이다. 어둠이 발을 건다고 넘어져선 안 된다. 다시 제 몸속의 하늘로 돌아가기 위해선 걸음을 멈춰서도 안 된다. 시인은 시인일 뿐이다. 원고지 역시 네모가 아니다. 사념이 사념을 불러서 자꾸만 둥근 세계가 된다. 그 기항지를 향한 순례자의 길은 오늘도 계속된다.

 

 

-http://blog.daum.net/moonnj/3194975 에서

출처 : 시하늘
글쓴이 : 보리향(菩提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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