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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시실리아 암소의 노래 - 훔치고 싶은 시(詩)/나문석 - 임 윤

문근영 2014. 2. 26. 11:40

 

훔치고 싶은 시(詩)

 

나문석

 

   

 

깊어가는 어둠 속

늑대의 발소리 낡은 천정을 흔들고

살쾡이인지 바람의 날개인지

밤새 문풍지를 갉아먹는 날

기척도 예고도 없이

자살보다 깊게 절망스런 이 산하를

눈(雪)부시게 통일한

저이는 누구인가?

   

 

-『시에』(2011. 봄)

 

 

 

시실리아 암소의 노래

-임 윤

 

  덴마크 철학자 쇠렌 키르케고르(Søren Aabye Kierkegaard)는 그의 저서『이것이냐 저것이냐』에서 “시인이란 어떤 존재인가?” 라고 질문한 뒤 기원전 시칠리아에서 사형도구로 사용되었던「시칠리아 암소」에 빗대어 “격렬한 고통을 가슴속에 품고 있지만 탄식과 비명이 입술을 빠져나올 때는 아름다운 음악으로 들리는 불행한 사람이 시인이다.”라 말했다.

  또한 그는 “철저하게 절망할 수 있는 것이 인간의 능력이라는 걸 깨닫게 된다. 세상을 잃음으로써 세상의 구조를 알게 된다.”고 했다. 시칠리아의 폭군 팔라리스는 구리로 만든 암소 안에 사람을 가둬 불을 지피면 희생자의 울부짖음이 아름다운 소리로 들렸다고 한다.

  4대강이 파헤쳐지면서 내는 신음소리, 용산 컨테이너 속에서 아비규환으로 사라진 사람들의 절규, 아무런 이유도 모른 체 좌익으로 몰려 형장에서 사라진 사람들, 아직도 연좌제에 걸려 신음하고 있는 자손들, 산업 현장에서 들리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한숨소리, 누가 그 소리를 아름다운 소리로 듣는지 모르겠지만 이 땅에는 아직 울부짖는 소리가 출렁거린다.

  얼마 전 인혁당사건 최종판결을 대법원에서 내렸다. 유신정권 유지를 위해 저질러진 어처구니없는 사건으로 당시 중앙정보부에서 사건을 조작했었다.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은 아무런 이유도 모른 체 고문당하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당시 법원의 판결로 8명이 사형당하고 15명은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다.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다행히 진실위에서 무혐의를 입증하였고 누명도 벗었다. 하지만 사십여 년 동안 간첩이라는 누명을 쓰고 삶을 희생당한 분들의 심정은 어떨까.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가지만 아무도 그들의 삶을 되돌려 놓지 못하고 말았다.

  주역의 64괘중 습감괘의 해석은 “함정은 잴 수 있지만 절망의 깊이는 잴 수 없다”고 한다. 인간의 교활함은 짐승만 잡으려고 그물을 치거나 함정을 파지는 않는다. 때로는 스스로 판 함정에 빠지기도 하겠지만 대다수는 왜 빠지는지도 모르면서 당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다. 오죽했으면 공자께서 “사람마다 모두 자신이 지혜롭다고 과신하지만 그물과 덫이나 함정으로 몰아넣어도 피할 줄을 모른다.”고 했을까. 그런 함정에 빠져 헤어나지 못할 절망감으로 하루치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이 땅에 과연 얼마나 될까.

  근래 상업주의가 팽배해지면서 군사독재 시절이나 군부정권 때보다도 더 깊은 좌절과 분노를 표출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키르케고르가 앓았던 우울증처럼 정신적인 공황상태에서 헤어나지 못할 정도로 강력한 절망감은 우리 삶을 짓누르는 온갖 고통의 대명사가된 것은 비록 시인 자신만은 아닐 것이다.

  표면적으로 느끼는 아름다운 시도 그 본질은 고통이라는 걸 시인은 본능적으로 느끼는 것 같다. 직접이든 간접이든 겪었거나 진행 중인 절망감을 시칠리아의 암소 속에서 죽어가는 심정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종족이 시인인가 보다.

  그런 면에서 2011년『시에』봄호에 발표된 나문석의「훔치고 싶은 시(詩)」를 소개한다. 짧은 시 한편 속에서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내면의 고통을 여실이 드러내고 있다. 타협 불가능한 현실에 부대끼는 우리들의 삶은 깨어나지 못할 악몽이고 우리는 그 악몽에서 벋어나려고 몸부림친다.

  그리하여 잠들지 못하는 겨울밤 “깊어가는 어둠 속/늑대의 발소리 낡은 천정을 흔들고/ 살쾡이인지 바람의 날개인지/ 밤새 문풍지를 갉아먹는 날”의 연속이다. 을씨년스럽고 궂은 날씨에 설상가상 주위는 암흑천지이다.

  파편화된 세계에서 고립은 일상이 되었고 소통의 단절로 인해 현대인들은 우울증과 자괴감에 시달리기 일쑤다. 그래선지 선진국으로 갈수록 자살 확률이 높게 나타나고 OECD 국가 중에 우리나라가 상위권에 든다고 한다. 행복지수의 표준이나 질 높은 삶의 기준이 딱히 정해진 건 아니지만 물질문명이 발전할수록 정신적으로는 피폐해지는 건 아닐까.

  우울증을 앓고 있는 현대인들이 많아지면서 스스로 삶을 포기하는 사건들이 점차 증가하고 있다. 사회 지도층이나 문화 예술인, 연예인등을 막론하고 잊을만하면 들려오는 소식들에 이제는 무감각해진 것도 사실이다.

  시의 전반부에서 보듯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일련의 소리들, 주위에 산적해 있는 좌절감에 얼마나 절박한 심정이었을까. 그 절망의 골짜기에서 헤어날 수 없어 허우적거리는 손을 누가 잡아줄까.

  그러나 아무도 하지 못한 일을 누군가 해냈다. 그것도 “기척도 예고도 없이” 말이다. 하루건너 말을 바꾸는 위정자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자들의 서슬에 숨죽여 사는 검은 현실을 하얗게 덮어 놓았다. 고통을 이루 말로써 표현하지 못할 “자살보다 깊게 절망스런 이 산하를”누군가 소리 소문 없이 “눈(雪)부시게 통일한” 것이다.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회복 불가능한 암울한 현실을 누군가가 하얗게 바꿔놓았다. 온갖 좌절과 절망감이 날아다니던 어두운 밤을 눈이 시리도록 덮어놓았다. 절망감이 사라지고 평온한 심정으로 삶을 이어갈 세계, 눈앞에 펼쳐진 세계가 그토록 갈망하던 세계였고 메시아가 올 것만 같은 훔치고 싶은 세계이다.

  하얀 겨울밤을 바라보는 시인은 어둠 속에서 괴로워하던 과거와는 달리 함박눈에 묻혀 서서히 사라지는 절망감을 밤새 바라보며 중얼거렸을 것이다.

 

진정 “저이는 누구인가?”

 

 

-2011년『시평』여름호

출처 : 시하늘
글쓴이 : 보리향(菩提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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