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시

[스크랩] [민병도 작품론] 萬有存在에 깃든 法門 / 고명철

문근영 2014. 2. 26. 11:38

 

[민병도 작품론] 萬有存在에 깃든 法門 / 고명철
[51호] 2011년 07월 10일 (일) 고명철 문학평론가

1. 민병도의 시에서 이규보의 시마를 떠올리다

‘좋은 시’란 어떤 것일까. ‘시’의 외피를 지닌 것들은 차고 넘치는데, 정작 ‘시’에 값하는 것들을 마주하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좋은 시’란 대체 어떤 것일까. 시 쓰기에 깊숙이 관여한 사람이라면 나름대로 ‘좋은 시’에 대한 성찰적 견해를 갖고 있을 터이다. 나 역시 이와 관련하여 곰곰 숙고하고 있는 시적 전언이 있다. 고려 중기의 신진 사인 이규보(1168~1241)가 〈시마구문(詩魔驅文) 효퇴지송궁문(效退之送窮文)〉에서 시마(詩魔)의 다섯 가지 죄상을 따지고 물리칠 것을 역설하는바, 그것은 다음과 같다.


① 시는 사람을 들뜨게 한다. 물(物)에서 흥을 느끼니 들뜰 수밖에 없는 것이다. ② 시는 숨은 비밀을 캐낸다. 물(物)이 무엇인가 물으니 숨은 비밀을 캐내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③ 시는 자부심을 가지게 한다. 들떠서 비밀을 캐내는 데서 자부심이 생기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④ 시는 비판을 한다. 물(物)의 올바른 상태를 따지니 비판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⑤ 시는 상심을 하게 한다. 시는 쉽사리 이뤄지지 않으니 상심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 다섯 가지 죄상을 뒤집어 생각해 보면 ‘좋은 시’가 지닌 본래의 속성을 말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시가 사물과 세계의 본질을 적확히 꿰뚫어본다는 것은 ‘좋은 시’가 외면해서는 안 될 일이며, 그러다 보면 인간의 삶과 현실은 물론 자연을 아우르는 삼라만상의 은폐된 오의(奧義)가 저절로 드러난다. 그리고 그 도정에 이르는 기쁨과 자부심이야말로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어서 어떤 제도와 금기로부터 자유로움을 만끽하는 해방감에 도취된다. 여기서 시마는 시인을 늘 상심에 젖게 하며, 시의 비의성을 탐구하도록 부추긴다. 그러니 이 시마의 죄상을 전도시켜 정리하면, ‘좋은 시’의 존재 의의와 가치를 드러낸다고 볼 수 있다.


시인 민병도의 시를 탐독하면서 나는 이규보가 그토록 힘주어 강조한 시마의 예의 다섯 가지 시적 전언을 다시 한 번 숙고해 보았다. 이규보의 시적 전언이 비록 중세의 시학에 기반을 둔 것이지만, 위 다섯 가지가 함의하는 시적 전언은 중세의 허방에 갇혀 있지 않고, ‘좋은 시’가 지녀야 할 시의 비의성을 지금, 이곳의 시 쓰기가 창발적으로 섭취하도록 그 권능을 발휘하고 있다. 특히 근대적 자유시가 아닌 전통의 율격을 지닌 시조 창작을 통해 ‘좋은 시’에 대한 성찰의 계기를 갖게 된 점은 비평가로서 큰 행운이 아닐 수 없다. 간혹 시조를 접해 오기는 하였으되, 시조의 매혹에 푹 빠지길 좀처럼 주저하던 터에, 민병도의 시가 자아내는 ‘좋은 시’ 특유의 시적 감흥으로부터 시조의 그 유구한 전통이 장강(長江)처럼 쉼 없이 도도하게 흐르는 연유를 알 수 있다. 무엇보다 민병도는 ‘좋은 시’가 어떠한 도정 속에서 피어나는지에 관한 미적 체험의 길로 우리를 자연스레 안내한다.

길어야 고작 사흘, 그 힙겹던 겨울나기도 악취나는 오물도 다 참고 견딘 대가치고는 너무나 짧은 시간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찰나의 주저도 없이 한 잎 한 잎 떨어지는 저 거룩한 소멸을 어찌 아름다움이라 말하지 않겠는가.
그렇다. 굳이 따라가면서 설득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손님을 쫓아 어느 화원에 진열된 꽃인들 저렇듯 뭉클한 감동으로 다가설 것인가.


이 땅의 정형시도 저 눈부신 백련처럼 언젠가는 그 순한 향기와 그 진한 감동으로 다가설 날이 있을 것이다.
― 〈시인의 말〉 중에서(《내 안의 빈 집》)

 

시인에게 시조의 미는 “굳이 따라가면서 설득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 “너무나 짧은 시간”의 아름다움을 야속하게 여기는 게 아니라, “찰나의 주저도 없이 한 잎 한 잎 떨어지는 저 거룩한 소멸”의 아름다움 속에 피어나는 “순한 향기와 그 진한 감동”의 미적 체험을 온전히 하는 데 있다. 이 미적 체험을 통해 시인은 시조가 지닌 정형의 아름다움, 즉 ‘좋은 시’의 비의성을 절로 드러낸다.

 


2. 민병도의 시를 읽어내는 세 갈래 길

1) 은유의 감각을 회복하는
민병도의 시를 탐독하는 일은 근대의 과학적 합리주의에 기반을 둔 계량화의 일상 속에서 소멸해 가는 은유의 감각을 회복하는 것이다. 우리의 일상이 모든 게 숫자로 표시되고, 그리하여 정량화되고, 그 수치들에 대한 온갖 분석 결과를 합리적이라 하고, 그래서 그 합리적인 것에 따라 생활해야만 마치 올바른 삶을 살아가는 것인 양 우리의 삶은 온통 정량적 수치들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다. 그러는 사이 인간이 우주와 소통하며 만유존재(萬有存在)에 깃든 진실에 근접하고자 하는 감각들이 퇴행하고 있다. 존재의 비의성을 어떻게 해서든지 과학이란 이름 아래 탈각시키고자 하니, 우주와 소통하는 인간의 감각들이 신비적인 것 혹은 마술적인 것으로 폄훼되면서 일상 속에서 퇴행하고 있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이에 대해 민병도는 다음과 같이 준열히 일갈한다.

 

스스로를 가두어 온 먼 생각의 빗장 풀고/ 오백 개의 손을 펼쳐 오천 개의 소리를 낚는,/ 누가 저 깊은 은유를 가슴으로 읽겠는가
― 〈바람 법문〉 부분(《슬픔의 상류》)

 

순간, 나 자신이 망각하고 있던 삶 본연의 물음이 떠오른다. 나는 자신의 삶을 얼마나 옴짝달싹할 수 없도록 심하게 구속하였던가. 비평적 타자들과 숱한 만남을 통해 그 언어들의 결 속에서 오롯이 자리하고 있는, 타자를 향해 손을 뻗치고 있는 진리의 언어에 귀를 기울였던가. 혹시 내 안에 똬리를 틀고 있는 아집에 사로잡힌 채 타자들과의 만남은 형식에 그치고, 더욱 나의 주관 세계를 공고히 다짐으로써 타자들과 소통하는 “저 깊은 은유를 가슴으로 읽”는 것을 포기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 역시 나도 모르는 새 계량화된 일상인으로서 세계의 뭇 존재들과 소통하는 은유의 감각을 소멸해 버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민병도의 시편을 읽으면서 은유의 감각을 온전히 회복하는 일은 단순히 시를 잘 음미하는 것을 넘어 과학적 합리주의 문명을 살고 있는 일상인에게 결여된 매우 중요한 삶의 본래적 감각을 되찾게 하는 일이다.

 

부처님 출타 중인 빈 산사 대웅전 처마// 물 없는 허공에서 시간의 파도를 타는// 저 눈 큰 청동물고기 어디로 가고 있을까// 뼈는 발라 산에 주고 비늘은 강에나 바쳐// 하늘의 소리 찾아 홀로 떠난 그대 만행(卍行),// 매화꽃 이울 때마다 경(經)을 잠시 덮는다// 혓바닥 날름거리며 등지느러미도 흔들면서// 상류로, 적요의 상류로 헤엄쳐 가고 나면// 끝없이 낯선 길 하나 희미하게 남는다
― 〈풍경(風磬)〉 전문(《상류의 슬픔》)

 

은유의 감각이란 이런 것을 두고 말하는 것일까. “부처님 출타 중인 빈 산사 대웅전 처마”에 “눈 큰 청동물고기” 풍경이 고즈넉이 흔들리고 있다. 시인에게 이 청동물고기 풍경의 흔들림은 “하늘의 소리 찾아 홀로 떠난” “만행(卍行)”과 다를 바 없는 종교적 수행이다. 스님만 만행을 떠난 게 아니라 청동물고기 풍경은 스님과 함께 만행을 떠난 셈이다. 풍경은 대웅전 처마에 붙들려 있지 않고 산사를 에워싸고 부는 바람에 온몸을 떠맡긴 채 구법(求法)의 길에 오른 것이다. 그곳은 만유의 근원이자 시발점인 상류이다. 시인의 심미적 이성에 포착된 풍경은 이렇게 빈 산사의 대웅전을 떠나 상류로 거슬러 오른다. 고정된 것, 제한된 움직임만 허락된 것, 하지만 이내 시인의 시적 상상력에 의해 그것은 하늘로 치솟았다가 상류로 거슬러 오르는, 역동성을 지닌 대상으로 살아난다. 빈 산사의 대웅전 처마에 매달려 흔들리는 풍경은 시인의 빼어난 심미적 이성에 의해 구법을 찾는 만행(卍行)의 주체이다.

 

2) ‘비움의 시학’과 ‘극미(極美)의 순간’이 도래하는
은유의 감각을 회복하는 일은 삶의 본래적 감각을 되찾는 일인바, 이것은 민병도의 시 밑자리에 흐르는 삶의 진리를 탐구하는 것과 긴밀히 연동된다. 말하자면 시적 대상들의 만행(卍行)은 망실하고 있는 은유의 감각을 회복하고, 이를 통해 삶의 본래적 감각을 회복함으로써 삶의 진리를 탐구한다.
민병도의 이러한 시작(詩作)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비움’의 시적 도정이다. 이른바 ‘비움의 시학’으로 호명할 수 있을 만큼 그는 ‘비워냄’의 시적 진실을 탐구하는 데 진력을 다하고 있다.

 

가지면 가질수록 불편하단 말을 믿어/ 구르는 엽전 하나 탐하지 않았지만/ 내 이미 가진 것보다 버릴 것이 많구나
― 〈적거(謫居)〉 부분(《내 안의 빈 집》)

 

산다는 것이 이걸까, 자기를 버리는 일/ 바람이 바람을 덮고 어둠이 어둠을 묻듯/ 슬픔을 버리기 위해 길을 떠난 나와 나
― 〈월인(月印)〉 부분(《마음 저울》)

 

한 울음은 칼이 되어/ 시퍼렇게 달려가고/ 한 울음은 붉은 혀로/ 상처를 달래지만/ 똑 똑 똑 제 덫에 걸려 허공에서 사라질 뿐// 나를 비우지 않고 어찌 너를 얻으랴/ 비울수록 가득한 생각마다 불 밝히면/ 환하게 아픔을 들킨 댓잎 하나 흔들린다
― 〈목탁소리〉 부분(《내 안의 빈 집》)

 

얼마나 닦았으면/ 저리 환할 수 있나// 슬픔의 흔적마저/ 다 지운 백련 한 송이// 하얗게/ 불을 붙이네,/ 불 붙여 저를 바치네
― 〈소신 공양〉 전문(《내 안의 빈 집》)

 

비워내는 일처럼 쉬운 일도 없을 터이다. 하지만 정반대로 비워내는 일은 어렵다. 무엇인가를 채우는 것 자체가 소유 욕망과 떨어질 수 없는 일이고, 인간은 태어나면서 지속적으로 무엇인가를 소유하기 위한 삶을 살아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채워넣기에 익숙한 우리에게 시인은 비움의 진리를 노래한다. 우선, 자신을 버리고 비우는 일에서부터 ‘비움의 진리’를 깨우쳐야 한다. 자신을 비우는 데 아량을 베풀어서는 안 된다. 자신을 비울수록 타자들이 들어설 자리가 생기며, 바로 그곳에서 주관을 넘고 객관 세계에 붙들리지 않는 ‘진여(眞如)’의 문에 들어설 수 있다. 그 ‘진여’의 문에 들어서는 것은 “하얗게” 불이 붙은 “백련 한 송이”가 피어나는 것과 같다. 자신을 철저히 버리고 비워내고 심지어 무화시켜 버리는 일이 극미(極美)의 순간을 현현한다.
그런데 이 극미의 순간을 만나기 위해서는 기다림의 미적 윤리가 필요하다. 이 기다림은 극미의 순간, 즉 미의 절정을 만나는 것이므로 기다림의 주체는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내적 동요를 견뎌야 한다. 존재를 송두리째 뒤흔들어대는 어떠한 흔들림 속에서도 의연히 흔들림의 고통을 견뎌야 한다. 이것은 주체가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결코 아니다. 주체는 흔들림과 함께 자연스레 그 흔들리는 힘을 거스르지 않으면서 주체를 차분히 응시하면서 성찰할 수 있는, 그래야 극미의 순간을 맞이할 수 있는, 바로 그것이 흔들림을 담대하게 타고 넘어가는 주체로서 갱신되는 것이다.

 

풀꽃에게 삶을 물었다/ 흔들리는 일이라 했다// 물에게 삶을 물었다/ 흐르는 일이라 했다// 산에게 삶을 물었다/ 견디는 일이라 했다
― 〈삶이란〉 전문(《마음 저울》)

 

흔들리지 않는다면 그건 삶이 아니네/ 가을에야 생각해 낸 집을 떠난 이유처럼/ 산산이 깨어진 꿈을 추스르는 일이네.
― 〈흔들리지 않는다면〉 부분(《마음 저울》)

 

못다 꾼 꿈을 이고/ 잠시 들른 세상// 저 캄캄한 물밑에도/ 피 끓는 가슴 있다며// 남몰래 건네주고 간/ 붉은 단경(短經) 한 구절. 
― 〈수련(睡蓮)〉 전문(《마음 저울》)

 

민병도 시인에게 삶이란, 어떤 고정된 확답이 있는 게 결코 아니다. 삶은 삼라만상과 함께 자연스레 존재하는 것이지, 삼라만상과 어떤 위계적 위상 관계에 있지 않다. 세계의 인정물태(人情物態)가 제 몫의 가치를 지니고 있어 그것이 곧 우주의 질서로 이루고 있듯, 인간 또한 예외가 아니다. 변화무쌍한 우주와 인간의 삶을 분리할 수 없듯, 인간의 삶은 흔들리게 마련이다. 이렇게 흔들림을 견디다가, 마치 수련이 진흙탕 속에서 온갖 것들과 뒤섞인 채 흔들리다가 “붉은 단경 한 구절”처럼 그 극미의 순간을 보여주듯, 인간 또한 삶의 찰나적 가치를 획득하는 황홀경을 체험하는 것이다.
이러한 험난한 도정을 거쳐야만, 시인은 보다 큰 말씀을 들을 수 있다고 한다.

 

한 고비 또 한 고비 그대 상심 깊어지거든/ 늘푸른 바람을 먹고 그 바람에 칼을 갈아/ 파랗게 저를 지키는 대숲에 가 보아라.// 온 세상에 꽃이 피면 대나무는 제 속을 파내/ 마디마디 구멍을 내고 울음을 가두었다가/ 달북이 우는 밤이면 남모르게 흐느끼나니.// 그래도 끓는 피는 댓잎아래 재워야 하리/ 무시로 서걱대는 온갖 역심 다 자르고/ 비워서 더욱 견고한 큰 말씀을 들을 것이다.
― 〈대나무 숲〉 전문(《내 안의 빈 집》)

 

세상이 꽃을 피울 때 대나무는 자기 속을 무참히 비워내 그 텅 빈 곳에다 울음을 가둬 놓는다. 세상과 공명하는 울음을 가둬 놓는다. 대나무가 다 자랄 때까지 대나무는 온갖 세파(世波)를 견디며, 마디가 생길 때마다 “무시로 서걱대는 온갖 역심 다 자르”는 고통을 견뎌온다. 이제 비로소 이 모든 것을 견딘 대나무는 자신의 텅 빈 몸 속에 “더욱 견고한 큰 말씀”을 담을 수 있다.

 

3) 심미적 구경에 갇히지 않는 사회적 상상력
민병도의 시를 읽으면서 자칫 지나칠 수 있는 게 있다면 현실에 대한 시적 응전이다. 혹시 그의 “마실수록 더해 가는/ 저/ 순수에의/ 갈증……”(〈산차(山茶)〉 《슬픔의 상류》)을 잘못 읽는다면, 그의 시작(詩作)은 일체의 사회현실에 대한 문제와 관련 없는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그의 시를 제대로 이해하는 게 아니다. 비록 그의 시가 정형의 율격을 근간으로 하지만, 그의 시세계를 관류하고 있는 지배적 심상이 근대적 미의식의 자율성과 무관하지 않으므로, 일체의 사회적 상상력을 배제한 심미적 구경(究竟)의 측면에서 그의 시를 이해해야 한다고 고집하는 것은, 다시 강조하건대 민병도의 시를 한 방향으로만 해석하고자 하는 편향적 접근이 아닐 수 없다. 가령, 다음과 같은 일련의 시를 보자.

 

창이 되지 못하고 소리로만 일어서는/ 민초들의 뜨거운 피, 피가 끓는 가슴마다/ 꼿꼿이 뼈를 세워서 타오르는 불길이었다.// 분을 삭혀 옷을 짓는, 내 이름은 들풀이었다/ 혀가 타는 불볕 아래 오체투지로 버티다가/ 퍼렇게 짓밟힌 등피를 거울처럼 닦았다.
― 〈들풀〉 부분(《마음 저울》)

 

해산을 강요하는 가두방송이 시작되자/ 겁에 질린 사람들은 텔레비전 화면을 나와/ 겹겹이 목조여 오는 포위망에 갇혔다.// 싸움다운 싸움은 아직 시작지도 않았는데/ 남은 무기라곤 어머니가 준 몸 하나뿐,/ 절망이 꽃처럼 고운 생머리를 자른다.// 피맺힌 생각들이 실밥처럼 눈부신/ 조선의 정수리에 별안간 길이 나고/ 몇 갈래 길들이 만나/ 광장 하나/ 환하다.
― 〈삭발〉 전문(《내 안의 빈 집》)

 

그 길의 끝이 어딘지 그들은 알지 못했다/ 걸으면 걷는 대로 매 순간이 끝이지만/ 아무도 가로막아선 벽을 탓하지 않았다// 갈 수 없는 곳에서도 그들은 길을 보았다/ 수건을 두르거나 촛불이 고작이지만/ 뼈보다 더욱 단단한 바위마저 뚫었다
― 〈뿌리〉 부분(《내 안의 빈 집》)

 

민병도는 고즈넉한 산사(山寺), 세상과 단절된 섬, 사람들의 대립과 갈등이 부재한 곳, 즉 삶과 유리된 곳에서 시 쓰기를 고집하는 백면서생이 결코 아니다. 그는 잡초를 뽑으면서도 “갑자기 식민지의 밤, 호각 소리 들린다.”(〈잡초 뽑기〉 《슬픔의 상류》)고 하는, 식민지의 뼈아픈 역사의 환청을 듣는다. 그의 시가 ‘구도의 길’에 용맹정진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그의 시에서 사회적 상상력을 거세시키는 것은 비평적 폭력이다. 〈들풀〉 〈삭발〉 〈뿌리〉에서 확연히 읽을 수 있듯, 그의 시는 민중의 현실에 기반한 사회적 상상력에 뿌리를 두고 있다. 민중은 몸이 곧 저항의 무기다. 들풀처럼 타오르는 민중의 분노와 사회의 부정에 대한 저항은 민중의 고운 생머리를 모조리 자르도록 종용한다. 이 순간 시인의 시적 예지력은 번뜩인다. 민중의 물리적 저항의 길은 막혀 있되, 생머리가 깎인 그들의 머리들이 모여 저항의 길을 환히 비춘 것이다. 민중의 몸이 막힌 저항의 길을 뚫은 것이다. 그리하여 환하게 뚫린 여러 길은 평화를 염원하는 촛불의 길로 금세 변하고 만다. 정형의 율격을 통해 시인은 팽팽한 시위대의 긴장을 그려내며, 답보 상태에 직면한 저항의 국면을 내밀한 언어로 돌파하고 있다. 지금까지 리얼리즘 계열의 자유시를 통해 형상화된 사회문제 의식이 정형의 시를 통해서도 매우 간명히 그리고 압축적으로 형상화되고 있다. 물론, 이러한 시 쓰기가 민병도에게만 국한되지는 않는다. 몇몇 젊은 시인들은 시조의 형식을 최대한 살리면서 사회적 상상력의 예각성을 훌륭히 드러내고 있다.


3. 원효가 민병도에게 온 까닭

짧은 지면을 통해 35년의 시력(詩歷)을 축적한 민병도 시인의 시세계 전체를 조감하는 일은 힘에 부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무엇보다 그의 시세계를 관류하고 있는 시정신, 특히 정형의 율격을 지닌 시조를 창발적으로 갱신하고자 하는 노력을 감히 어떠한 말로 정당히 평가할 수 있겠는가. 더욱이 그는 최근 원효를 대상으로 한 시작(詩作)을 통해 시를 빌려, 시를 넘어서는 원대한 글쓰기를 하고 있다. 그가 원효에 몰입하게 된 것은 어쩌면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인지 모른다. 화가로서 시인으로서 이미 일가(一家)를 이뤘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터인데, 원효에 주목하는 것은 원효의 가르침을 민병도식으로 전유하여 자신의 미의 세계(문학과 미술)를 좀 더 새로운 단계로 회통(會通)하려는 것은 아닐까. 어디에 안주하는 한 예술은 죽음의 망령에 사로잡힌다. 원효가 요석 공주를 품에 안아 “경계를/ 허물어버려/ 차라리/ 아름다운,”(〈파계〉 《원효》) 영육으로 환골탈태하듯, 민병도 시인 역시 끝이 보이지 않는 예술적 진리의 세계를 탐구하기 위해 그에게 낯익은 세계를 애써 부정하고 있는지 모른다. 원효가 무덤에 있는 해골의 물을 무심결에 먹어 진리를 갈파하듯, 저잣거리에서 손가락질을 받으며 중생들과 함께 부처의 가르침을 실천하듯, 민병도의 예술적 진리에 대한 탐구는 자못 예사롭지 않다.

풀씨 하나가 세상이며/ 풀씨 하나가 우주이네// 세상의 봄을 만나면/ 붉은 꽃을 피우고// 무서리 늦은 가을 날/ 그 꽃 도로 거두지
― 〈불이(不異)〉 전문(《원효》)

 

쏟아지는 빗줄기에도/ 젖지 않는/ 연꽃처럼// 천년에/ 천년이 가도/ 변치 않는 하늘처럼// 아무리/ 오랜 뒤에도 /멎지 않는/ 시간처럼
― 〈진상(眞相)〉 전문(《원효》)

 

어린 매미 한 마리가 거미줄에 걸려 있네// 지나던 무지개가 손을 길게 뻗어보자// 꽃들도 몸을 흔들어 사다리를 놓았네
― 〈그물〉 전문(《원효》)

 

그렇다. 만유존재(萬有存在)가 배타적 질서로 이뤄져 있지 않은 세상이 곧 부처의 진리가 숨쉬는 세상이다. 이러한 세상은 온갖 분탕질을 치는 것들이 있더라도 그것에 동요되지 않는 세상이다. 그러한 세상에는 타자를 향한 보살핌과 사랑으로 충만해 있다. 따라서 시인이 기꺼이 해야 하는 일은 이 세상을 향한 노래를 쉼 없이 불러야 하는 것이다. 바꿔 말해 “넓고 편한/ 길을 두고/ 길 밖의 길을/ 하는 이// 모래 쌓아 산을 만들고/ 송곳으로 바위 뚫는 이// 생각에 절을 세우고/ 마음에 경을 새긴 이”(〈정진〉 《원효》)가 바로 ‘시인’이다.     

 

고명철 | 문학평론가. 1970년 제주 출생. 현재 광운대 교양학부 교수. 주요 저서로 《문학, 전위적 저항의 정치성》 《잠 못 이루는 리얼리스트》 《뼈꽃이 피다》 《지독한 사랑》 등 다수. 젊은평론가상, 고석규비평문학상, 성균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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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시하늘
글쓴이 : 보리향(菩提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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