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독오독한 생의 풍경 | ||
| 홍일표의 좋은 시 찾아 읽기(58) | ||
| 무(無) 유희경 무를 사러 나왔는데 밑동 잘린 눈이 내린다 당신, 무얼 상상했기에 이리도 하얀 눈이 내리나 그렇게, 하얀 눈을 맞으며 걸어간다 한 사내가 넘어진다 일어나 툭툭 털어내는, 그의 잠바가 흐리다 익숙한 이미지를 더듬어 다시 눈이 내리고 나는 고요 그 중간쯤을 올려다본다 내일은 무를 말릴 것이다 나는 오독오독한 그런 상황이 재밌어 또 슬프다 함께 사라져버릴 것들 그리고 잊혀가는 것들도 # 좋은 시는 울림의 진폭이 크다. 유희경의 「무」는 겹겹의 의미를 함의하고 있다. 우선 그의 신선한 상상이 재미있다. ‘무’를 사러 나온 화자의 시야에 ‘눈’이 들어왔다. 그런데 그 눈은 ‘밑동 잘린 눈’이다. 여기에서 ‘눈’은 ‘무’의 다른 이름이다. 이 정도에서 시가 끝났다면 지극히 평면적이고 밋밋한 시가 되었을 것이다. 화자는 ‘무’에서 다시 ‘無’를 발견하고 ‘無’의 또 다른 이름인 ‘눈’으로 사유가 확장된다. 이렇게 연쇄적으로 전개되는 시는 한층 시의 재미를 더하고, 읽는 이로 하여금 상상의 즐거움을 준다. 눈 밝은 시인의 감각이 반짝반짝 빛을 발하는 부분이다. 이어서 길 위에 넘어진 사내가 다시 툭툭 털고 일어나 걸어가는 모습이 그려진다. 그렇게 일상의 소소한 일들은 반복적으로 이어진다. ‘익숙한 이미지를 더듬어 다시 눈이 내리고’에서 보듯 백 년 전에도 천 년 전에도 그러한 삶의 풍경은 있었고, 앞으로도 또한 그러할 것이다. 여기에서 화자는 고요의 중심을 본다. 그곳에서 삶의 실체를 얼핏 바라보게 되고 ‘내일은 무를 말릴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 행위는 축축하게 젖은 삶의 저녁을 말리는 일이고, 한 점 눈송이처럼 금방 사라지고 잊혀지는 생의 풍경을 오독오독하게 갈무리하는 일인 것이다. 그리고 화자는 ‘그런 상황이 재밌어 또 슬프다’고 토로한다. 삶이 가진 양면의 풍경을 다 들여다본 화자가 짐짓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한 마디가 가슴 허공에 툭 떨어진다. 우리는 모두 잊혀지고 사라져가는 존재들이다. 일회성의 소모품으로 잠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가 소멸하는 한시적 목숨들이다. 그러나 젊은 시인이 그려낸 ‘오독오독한’ 삶의 진경은 오래 우리 곁에 남아 있을 것이다. 그것이 아무 ‘쓸모’ 없는 시의 힘이기 때문이다.
-'문화저널21'에서 |
출처 : 시하늘
글쓴이 : 보리향(菩提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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