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읽은 문제작 · 詩] 무위(無爲)의 소통 - 신진숙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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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나투스라는 본성은 하나의 생명이 자신을 위한 자리를 만들기 위하여 행하는 모든 노력을 의미한다. 의식은 이 과정에서 생성된다. 자유와 완전성 역시 가장 단순한 생명 본능과 실천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따라서 의식과 몸은 평행한다. 몸의 감각과 사유가 함께 나아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불가에서 말하는 공즉시색 색즉시공(空卽是色 色卽是空)도 이와 같지 않을까. 하나의 생명(色)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존재의 자리로서 공(空)이 있어야 하며 또한 역설적으로 존재는 허공 자체이기도 하다. 있음과 없음이 같은 자리에 있는 것이다. 결국 모든 보이는 것에 대한 감각과 보이지 않는 사유는 분리될 수 없음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시가 유발하는 감각―사유는 특별하지 않다. 그러나 시는 이러한 과정을 극대화함으로써 고유의 미적 공정을 만들어낸다. 때로 시는 감각과 의식, 감각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 의식과 무의식, 아름다움과 추함,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구분과 분별을 지우는 데까지 나아간다. 때문에 시는 종종 모국어의 질서를 벗어나기도 한다. 시의 이러한 탈출은 일상적인 삶의 자리를 새롭게 결합하고 배치하기도 한다. 물론 그것은 시가 이 진리의 주체를 어떤 고유의 이름이나 정체성으로 실체화하지 않는 경우에 한해서이다. 보이는 상(像)이 사물의 전부가 아니듯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의미의 본질은 아니다. 장자는 이러한 상태를 무위(無爲)의 덕(德)이라 불렀다. 시적 소통 역시 근본적으로 ‘무위의 소통’이다. 시라는 감각―사유는 ‘진리’에 대한 합의가 아닌 이 진리에 대한 거절과 물음에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물음 1: 관계는 존재하는가 시가 ‘무위의 소통’이라면 그것은 존재를 어떻게 이해하는가. 존재의 바탕이자 그 얽힘인 관계를 어떻게 인식하는가. 통상 정치적 의미에서 관계란 존재의 자리이자 그 배치 원리를 가리킨다. 기실 무엇을 보고 느끼는가 하는 것은 어떤 관계 속에 배치됐는가에 의해 결정된다. 존재의 의미와 가능성 및 감정적 기대도 마찬가지다. 우리를 구성하는 정체성은 바로 이러한 관계의 원리에 의해 구성된다. 가정과 학교, 사회는 우리가 태어나는 순간 성(性)과 이름, 자리, 역할 그리고 가능한 감각과 불가능한 감각을 가르치고 강요한다. 우리는 언제나 이미 관계 속에서 태어난다. 만일 이 관계의 바깥으로 나아가려 한다면 모든 시선은 감옥이 될 것이다. 개인의 내면이나 본성은 부수적인 것이 되고 만다. 무위의 소통은 이러한 관계에 대한 원천적인 물음이다. 여기 두 편의 시, 두 개의 시선이 있다. 하나는 관계의 바깥을 상상하고, 다른 하나는 이보다 근본적으로 관계의 불가능성을 이야기한다. 두 편 모두 관계의 의미를 통해 2000년대라는 시대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3 장이지 시인의 시 〈허튼소리〉는 생활이라는 이름의 마력을 희화화한다. 생활의 숭고함은 어떤 종류의 허튼소리도 허락하지 않는다. 무능은 용서하지만 무노동에 대해서는 냉엄하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사회적 범죄이다. 노동은 한 인간에게 자리를 부여하며, 삶은 노동을 통해서만 비로소 삶의 자리를 획득한다. 잉여적이고 비관계적인 삶은 허용되지 않는다. 시인이 “상징조작자”로 부르는 생활은 아버지의 이름을 대신하는 초월적 기표이자 명령이 된다. 그런데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생활이 주는 전반적인 피로감이 절대적으로 사적인 것으로 간주된다는 점이다. 한나 아렌트는 사회의 발생이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의 구분을 무화함으로써 모든 감정을 사적인 것으로 만든다는 것을 지적했다. 현대사회에서 본질적으로 공적인 분노란 없는 셈이다. 생활의 중압감은 모든 감정을 사적인 것으로 만들고 그 때문에 사생활은 현대생활에서 그 무엇보다 중요한 덕목으로 숭배된다. 모든 것이 사생활이 된 사회. 여기에서는 정치적 가능성이 철저히 차단된다. “한 젊은이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길게 울부짖으며 사회를 저주하”지만 그것은 곧 사생활이 되고 만다. 개인의 분노는 그것이 사적인 한 정치적 소란이 아닌 일시적인 “소동”에 불과하다. 말하자면 생활은 정치성이 소실된 안전한 삶만을 제공한다. 모든 것은 관계와 자리의 문제이며, 따라서 존재 자체는 중요하지 않다. 생활의 포용력은 “유서”마저 자신의 일부로 만들 수 있지 않던가. 1960년대 김수영 시인이 느꼈던 거대한 생활의 ‘피로’와 정치적 상상력이 2000년대 개인이 느끼는 정치적 무력감과 결합하여 돌아온다. 생활 속에서는 자유란 존재할 수 없다. 권미경 시인은 이와는 반대로 관계의 부재 때문에 고통스럽다. 시인은 이제 더 이상 자유를 꿈꾸지 않는다. 자유, 그것은 장이지 시인의 꿈이었다. 그러나 권미경 시인에게는 자유가 삶의 목적이나 이유가 되지 못하는 태생적 한계가 부여된다. 그 점은 지금의 시인들이 그 이전 시대의 시인보다 감성적으로 더 치명적인 결여를 안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것이 내가 〈고아〉라는 시를 주목하는 이유이다. 젊은 시인들의 결핍은 이제 충만한 상태로 나타남으로써 충만과 고통이 식별하기 어려운 상태에 도달한다. 나는 플라스틱 꽃을 달고 구멍 난 몸으로 물 위를 걷고 뛰어 어스름한 나라에 가고 웃기도 합니다 이 시에 나타난 감정적 고아의식은 전 세대가 지녔을 법한 어떤 종류의 비극적 파탄의 징후나 심미주의적 표식으로 변환되지 않는다. 고아의식이 지닌 차별화된 낭만성과 숭고함 역시 찾아보기 어렵다. 정서적 결핍이 결코 서정적인 것이 되지 못하는 세대가 출현한 것이다. 이제 언어는 어떤 진리도 구성할 수 없는 허공에서 태어나고 사라진다. 상징계적 아버지의 이름이 있던 자리가 지워진 이후 세계는 억압의 기원을 폐제시켰지만, 그것은 어떤 종류의 행복이나 해방도 아님이 밝혀졌다. 시적 주체에 의해 폐기된 아버지의 이름은 자유를 주지만 역설적으로 자유는 자유의 가치 역시 함께 지워버린다. 이제 삶을 보증할 수 있는 바탕 자체가 상실된 것이다. 그것은 결핍보다 더한 결핍이다. 그렇다고 자유로운 고아들인 그들에게서 비감 어린 증오는 찾아볼 수 없다. 대신 그들은 “꽁꽁 언 시간을 도시락에 싸서/ 소풍”을 간다. “야바위꾼이 부모를 뒤섞”어 버리는 세상으로부터 다만 소풍을 준비한다. “마음껏 쏘다닐래요”라고 명랑하게 말하며. 그리고 “목각 부모” 곁에서 “해진 발”을 녹이는 기이한 풍경의 주인이 된다. 이토록 우울한 명랑함은 어떤 새로운 주체에 대한 암시인지 아직은 좀 더 지켜보아야 할 것이다. 장이지 시인이 느꼈던 생활의 피로감은 발견되지 않지만 바로 그 자리에 어쩌면 더 위협적인 냉소주의가 자리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하면서. 물음 2: 소통은 가능한가 그러나 지금은 무위의 소통을 상상하기 위하여, 장자가 〈덕충부(德充符)〉에서 말한 애태타(哀??)의 삶을 떠올리는 것으로 족하다. 위나라의 애태타는 어떤 일정한 관계 내에 규정할 수 없는 존재이다. 지독한 추남이고 어떤 명확한 자리도 없으며,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는 모든 이의 사랑을 받는다. 그것은 일상적 규범체계 내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장자는 바로 이러한 비관계적 위치에 주목한다. 애태타를 일컬어 덕(德)의 재질이 완전하다고도 말한다. 어떤 의미에서 시적 소통은 이 애태타의 무위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닐까. 시인들은 종교와 달리 진리를 명확히 말하지 않음으로써 그들의 언설이 무용한 것으로 간주되는 것을 감내한다. 그러나 유용한 관계만으로 촘촘하게 짜인 사회는 진정한 자유를 차단한다. 결국 유용성은 더 큰 무용성으로 되돌아오고 있다. 문명이 폭력과 재앙의 역사임을 현세대는 지금 온몸으로 경험하고 있지 않은가. 그 점에서 누군가는 시가 지닌 숙명적인 무용성이 문명과 자본주의적 질서를 쇄신할 수 있는 힘이라고 역설하기도 한다. 나 역시 동의한다. 그러나 그것은 자본주의적 관계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가장하지 않은 한이라는 조건이 붙는다. 이것은 김해자 시인의 〈쇼윈도에서 그네를〉 읽는 동안 생각한 것이기도 하다. 뱃속에 알을 품고 사막 한가운데를 기어간다 콜타르 씹으며 석유 들이키며 고시원 쫓겨나면 쪽방에 들고 찜질방에서 쫓겨나면 만화방에 들자 무슨 걱정이랴 24시간 드나들 편의점이 즐비하다 햄버거 하나 시켜놓고 새벽 첫차가 올 때까지 졸고 있자 뱃속의 알에서 날개가 돋을 때까지 등뼈가 오그라들어 네 발로 걸을지라도 오늘 딛은 발자국이 꽃이 되었구나 이번 생은 영문도 모른 채 갇힌 쇼윈도, 하여, 일지라도, 시적 주체가 품은 “알”은 시인의 말대로 “새로운 종”이 될 수도 있겠다. 정말로 알은 “날개 달린 거북” 혹은 “꽃잎 단 두 발 짐승”을 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새로운 종의 태동이 시작된 장소가 “쇼윈도”의 거리에서라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이 새로운 종은 쇼윈도에서 어느 날 잉태된다. 일정한 거처도 직업도 이름도 없는, 거리 자체가 탄생시킨 존재이다. 이 새로운 종은 쇼윈도를 구성하는 숨 막히는 미끄러운 빛과 유리벽 사이에서 태어난다. 그리고 고시원, 쪽방, 찜질방, 만화방, 편의점, 기차역을 오가며 자라난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어떤 안정적인 실존도 그 실존을 담을 집도 존재하지 않는 헐벗은 거리의 삶을 상징한다. 그러나 시인은 그것이 목숨임을 부정하지 않는다. “한 잎 한 잎 따순 숨 토해내는”. 자본주의의 전시장인 쇼윈도를 밝히는 “빛줄기”에서도 인간적인 것, 아름다운 것, 즉 “꽃잎”은 피어난다. 물질적 소모와 소비만이 존재하는 도시의 거리에서도 이름 모를 생명은 잉태되고 또 태어난다. 생명은 어떤 구애도 알지 못하므로. 그러나 이 시에서 주목할 것은 이러한 휴머니즘적 차원만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시인이 발견한 이 새로운 종은 이름이 없다는 점이다. 가능성이라고 믿기에는 미미하고 의미를 부여하기에도 구체성이 부족한 존재. 그러나 시인은 이 애매모호함, 실체가 아닌 존재 상태(“알”)야말로 이 세계가 포섭할 수 없는 존재임을 알고 있다. 이처럼 작은 희망“일지라도” 그것은 때로 시의 전부가 되기도 한다. 나희덕 시인의 〈한 아메바가 다른 아메바를〉에서 이야기하는 소통의 의미 역시 이러한 맥락과 무관하지 않다. “아메바”라는 이름의 존재가 바로 그것이다. 손보다 섬모가 좋다 “아메바”는 인간적 기준으로 볼 때 완전한 생명체로부터 미달한다. 그것은 어쩌면 아무것도 아닌 상태이다. 장자가 말한 ‘애태타’인지도 모르겠다. 아메바는 한마디로 상징적 영토도, 존재를 증명할 등기도 지니지 않는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아메바에게는 “인간다움”이 없다. 그러나 시인은 아메바에게서, 인간답기 때문에 생각할 수 없었던 진정한 가능성을 찾아낸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다움이란 결국 영토에 구속되는 삶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인간다운 삶이란 영토화된 관계가 부여하는 단절과 불화를 감수하는 것 이외의 어떤 것도 아니다. 아메바의 비인간성이 어떤 의미에서 인간보다 더한 인간다움일 수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아메바는 “무정형” 상태를 비극으로 생각하지 않는 용기를 지녔으며, 어떤 “흔적을 남기지 않는/ 온순한 맨발”을 소유했다. “맑은 물에도 살고 짠물에도 살며” “일정한 크기가 되면/ 둘로 쪼개지는 가난한 영토”만을 점유한다. 가난한 영토를 나누어 가져도 “잃어”버렸다는 생각도 하지 않는다. 그 점에서 이 시는 소유욕으로 가득 찬 현대 문명에 대한 서정적 인식이 관조적 정신의 깊이로 넘어가는 경계를 보여준다. 물음 3: 깨달음은 오는가 이러한 물음의 끝에서 만나는 것은, 과연 완전한 인식은 가능한가 하는 점이다. 깨닫기 위하여 스스로의 욕망을 날카롭게 벼려냈던 수많은 시인의 삶에서도 완전한 이치에 도달했다는 증거는 발견되지 않는다. 무애(无涯)와 무위에 도달하고자 했던 많은 시인들에게서 우리가 찾은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무지(無知)이다. 인간은 어떤 진리의 주인이 될 수 없으며, 같은 이유로 진리를 구성할 권리 또한 부여받은 바 없다. 바로 그 점에서 시가 추구하는 무위의 소통이란 무위에 대한 욕망과 구분된다. 무위의 소통은, 그것이 무위이건 무소유이건 진리를 구성하겠다는 어떤 욕망과도 결별한다. 시적 소통은 진리의 깨달음 이후에 오는 것이 아니라, 깨달음의 불가능성 속에서 오기 때문이다. 그것은 조정권 시인의 〈참나무 숲에서 거절당하다〉가 열어놓은 것이기도 하다. 바람의 제자가 조정권 시인이 바람의 제자라는 사실은 언제나 변함없이 맞다. 그의 영혼은 특별한 거처를 가지지 않으며 어떤 종류의 안식도 구하지 않는다. 영원히 떠돌아다니는 방랑벽을 지닌 까닭으로 하나의 언어에 포획되지 않는다. 조정권 시인이 오래전 참나무 숲에서 깨달았던 것 역시 이 바람의 의미였는지 모른다. 때문에 시인은 스스로를 “바람의 제자”라 명명할 수 있었다. 오래전 시인은 참나무 숲에서 세속에 물들지 않은 채 살 수 있는 용기이자 정신의 힘을 읽는다. “아무리 빈궁해도/ 난 이 겨울 추위를 장작으로 팔지 않”으리라는 결기도 함께 얻는다. 그러나 세월이 흐른 후 그가 다시 참나무 숲에서 와 들은 이야기는 전혀 다른 것이다. 그는 “추위” 즉 부정하고자 했던 모든 시간 동안 자유롭지 못했다. 자유롭고 싶어 부정했으나 그것은 오히려 구속이었다. 대상을 지운다고 해서 자유가 오는 것은 아니다. 자유는, 들뢰즈가 말했듯, 변증법적인 부정의 부정이 아닌 ‘긍정의 긍정’ 속에서만 돋아난다. 장자는 덕(德)을 “죽음과 삶, 존속과 사라짐, 인궁(因窮)과 영달(榮達), 가난과 부(富), 어짐과 우둔함, 욕먹음과 칭찬, 굶주림과 목마름, 추위와 더위”라는 변화와 운명으로부터 요동하지 않고 안으로 충실(忠實)함으로써 평형(平衡)한 상태라고 말한다. 때문에 지인(至人)이란 생의 모든 변화와 조화한다. 덕은 모든 경계와 형체를 잊는 것이다[故德有所長 而形有所忘]. 선악과 진위, 미추를 가르고 선후를 따지는 분별도 잊을 때 비로소 만물의 이치에 닿을 수 있다. 이제 참나무 숲에서 시인이 들은 것은 젊은 시절 그가 들었던 것과 다르다. 숲은 말한다. 자유롭고자 하거든 자유의 상마저 지워야 한다. 그러나 지인이 아닌 범인에게 그것은 불가능하다. 평생을 바쳐도 알 수 없으리라. 시인은 그래서 여전히 바람이다. 이처럼 더 이상 현대의 시는 완전한 소통을 위장할 수 없다. 행복한 조화는 통속적 삶에서 가장 중요한 요건이지만 그것은 현실을 가릴 뿐이다. 따라서 소통에 대한 모든 신화는 다시 쓰이지 않으면 안 된다. 소통과 공감의 신화가 자본주의의 냉혹함을 은폐하는 것은 아닌지 끊임없이 의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일례로 언젠가부터 자본가들에게 공감이 새로운 효율적 경영법으로 인식되는 역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 경우 소통은 어떤 관계도 수정하지 않으면서 또 어떤 비극적인 파국에도 도달하지 않으면서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안전한 생활에,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 평온한 삶에 동의하도록 유도한다. 그렇다면 소통은 무설탕 제로 콜라의 제국적 단맛과 무엇이 다른가. 그러므로 무위 가운데 진정한 소통을 시작하고자 한다면 시는 소통의 불가능성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신진숙 | 문학평론가. 2005년 《유심》으로 등단. 저서로 《윤리적인 유혹, 아름다움의 윤리》가 있음. 현재 경희대 학술연구교수.
-http://www.yousim.co.kr/news/articleView.html?idxno=5250 에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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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