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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고도 자본주의 시대에서 서정시는 가능한가 / 전기철

문근영 2014. 2. 25. 11:54

 

고도 자본주의 시대에서 서정시는 가능한가 / 전기철
[52호] 2011년 09월 10일 (토) 전기철 시인
편집자
■전기철
- 1954년 전남 장흥군 관산에서 태어나 육자배기 전통 속에서 자랐다. 1980년 광주항쟁에 참여하였으며 1981년 전남대학교를 졸업하고 1983년 서울대에서 석사, 1992년 서울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 1988년 《심상》에 〈시와 행동〉을 발표하며 문단에 발을 디뎠고 1992년 〈서울신문〉 《계간문예》에 평론 당선하여 평론을 쓰다가 1994년 《시와사회》에 작품을 발표하며 시의 사회적 역할이란 무엇일까를 고민하며 평론을 접고 본격적으로 시를 쓰고 있다.
- 시집으로 《나비의 침묵》(1998) 《풍경의 위독》(2004) 《아인슈타인의 달팽이》(2006) 《로깡땡의 일기》(2009) 등이 있음.
- 현재 숭의여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1. 불통(不通)이 소통(疏通)이다
                                                  

   

전기철 시인

아침잠을 잃어버린 지 오래다. 아침에 일어나면 새들이 창가와 와서 캑, 캑, 캑, 운다. 별스런 새도 있구나 싶었는데, 가만히 들어보니, 어떤 놈은 개혁, 개혁, 하고, 또 어떤 놈은 격, 격, 격, 운다. 어찌나 크게 우는지 잠을 이룰 수가 없다.

그렇잖아도 윗사람들이 우리가 무슨 잘못이라도 있는 듯이 개혁, 개혁, 개혁, 하는 통에 잠을 설치는데, 새조차 제 울음소리를 바꿨구나, 싶어 울적하다.

요즘은 새들도 거짓말을 하는가. 아이들만 거짓 울음을 우는 줄 알았는데 새들도 거짓 울음을 운다. 어쩌면 새의 언어가 달라졌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새들이 새로운 언어로 우는 것은 아닐까? 이제 새들도 새로운 언어로 운다. 고도 자본주의 사회에 맞게 우는 것이다.

거짓말을 하는 것은 새들만이 아니다. 며칠 전 농촌 지역에 갈 일이 있었는데, 들판에 매인 소가 음메, 하고 우는 게 아니라, 무무, 하고 우는 것이다. 젖소여서 그렇거니 하고 지나치는데, 또 다른 소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임마, 임마, 하고 운다. 더럭 겁이 났다.

정말 겁이 난다. 우리는 언제나 개혁 대상이고, 언제나 잘못하고 있다. 권력을 가진 분들이나 부자들은 살아남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늘 우리에게 훈시한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말들을 하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다. 우리의 언어는 모두 살해당했거나 그들과 다른 게 분명하다. 우리는 그들의 말 몇 마디에 내몰린다. 어디로 갈 것인가? 갈 곳이 없다. 우리와 그들은 이미 불통이다. 소통을 하기에 언어는 이미 낡았고, 우리의 존재는 부조리하다.

기존의 언어로는 부조리만 양산할 뿐이다. 소통을 거부하는 자들에게 소통을 기대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부조리한 현실에서 소통은 거짓을 양산하거나 무의미를 낳는다. 언어가 부조리한데 어떤 소통이 있을 수 있는가? 따라서 기존의 언어 사용법을 파괴하지 않으면 우리 시대에 소통은 없다. 아침이면 보는 신문이나 저녁의 티브이에서 나오는 말들은 우리의 이야기가 아니다. 벼락부자가 된 사람들의 이야기, 재벌들의 훈시, 혹은 권력을 가진 자들의 명령이나 딴 나라 이야기뿐이다. 우리는 늘 개혁의 대상일 뿐이다.

새들이 떼죽음을 당하고 돼지나 소들이 생매장되는 것도 모두 소통의 부재 때문이다. 새들이나 소, 돼지들도 개혁, 개혁, 하고 울든지, 아니면 죽어야 한다. 소통은 끝났다. 진정한 언어는 불통이다. 소통을 거부한 언어야말로 우리 시대 진정한 언어이다. 부조리한 현실에서 부조리한 언어는 불통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고도 자본주의 사회에서 서정시는 가능한가? 이는 아도르노가 나치 학살 이후 1949년에 포효했던 “아우슈비츠 이후에 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다.”라는 말이 이제야 보편화된 듯하다. 감미로운 서정시는 끝났다. 독재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들은 감미로운 서정시이듯, 기존의 의미에서의 서정시는 고도 자본주의 사회에 부역하는 것과 전혀 다르지 않다. 이제 서정시는 자본과 그 자본에 기생하는 권력에 2차, 3차 기생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그러므로 나는 부조리의 시를 쓰려고 했다. 소통하지 않는 언어, 소통을 거부하는 시를 통해서 야비해질 대로 야비해진 자본주의 사회에 저항하고 싶었다. 결국 나는 나 스스로 부조리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난 부조리하므로 부조리한 언어를 사용하는 부조리이다. 나는 돈에다 시를 쓰고 벽에다 시를 쓰고, 부랑아의 가슴에다 시를 쓴다. 새로운 한국어를 발견하기라도 한 듯이.

예시적 상상력이 없는 세상에서 모든 상상력은 부패했다. 요즘 시인들은 너무 똑똑하고 영리하다. 어떻게 하면 팔릴까, 어떻게 하면 권력과 가까워질 수 있을까를 아주 잘 안다. 비정상적인, 혹은 폭력적인 시인이 그립다. 우주의 원리나 우주적 시각으로 본다면 인간의 목적이나 의미란 무의미하다. 하지만 그 무의미 속에서 의미를 찾는 행위야말로 부조리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나는 본질적으로 부조리하다.

2. 신시절가조(新時節歌調)

우리는 맷집이 좋지 않다. 그러나 아침마다 마치 권투선수의 스파링 상대나 되는 것처럼 링에 오른다. 오늘 회사 가서 얼마나 얻어터질 것인가를 고민하면서, 아니면 어떻게 하면 요령껏 덜 맞을 수 있는가 꼼수를 계산하면서 아침 속으로 들어간다. 세상의 모든 아침은 참, 떨떠름하다.

얼리버드들이 판치는 세상에서 도살장으로 끌려가듯이 인상을 쓰는 아침! 끌려가기도 전에 가끔 집에서부터 헛소리를 한다. 아내에게 사장님이라고 했다가 총장님이라고 했다가 부장님이라고 하여 핀잔을 듣기 일쑤다. 이런 아침인데 저녁인들 쉽게 넘어갈 수 있겠는가? 우연히 광화문을 지나다가 등록금 촛불시위대를 만나 휩쓸렸다. 내 안에 한 시인이 심장이 북이나 되는 듯이 두드려대며 노래를 부른다.

동맹휴학은 부결되고
밤마다 촛불을 켜면
경찰이 와요
시험장에 끌려가기 싫어
시위장에 가면
경찰이 와요
빗방울이 촛불을 켜면
경찰이 와요 경찰이 와요
새들이 촛불을 켜도
경찰이 와요.

시절을 노래하고 싶다. 가난한 사람들의 이름을 기억하고 싶고, 힘 있는 자들에게 대드는 바보들에게 박수를 쳐주고 싶다. 많은 시인들이 가진 자들의 지시어나 해석어로 전락한 언어의 미학에 골몰하고 있을 때 나는 가난한 이들의 생활 일기를 쓰고 싶다. 그들의 심장과 뇌가 싸우는 소리를 번역하고 싶다.

혹은 가진 자들의 얼굴을 번역하고 싶고, 세상의 아침으로 폭력처럼 던져지는 신문을 거꾸로 읽고 싶다. 그들을 읽으면 부조리한 현실의 내역을 읽을 수 있을 테니까.

그래서 어제는 하루 종일 거리를 쏘다니며 변두리로 내몰린 사람들과 술을 펐고, 그저께는 또 다른 아웃사이더들과 함께 허공에 폭력을 휘둘렀다.

모든 사상은 가라. 진보도 보수도 가라. 나는 한 마리의 죽어가는 새와 함께 밤을 지새우려 한다. 세상이 왜 이렇게 폭력적이 됐는가를 절대 잊지 않기 위하여.

 

 

- http://www.yousim.co.kr/news/articleView.html?idxno=5243 에서

출처 : 시하늘
글쓴이 : 보리향(菩提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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