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수자 특집] 정수자의 시조세계 / 전형철 | ||||
| 생(生)을 음독하는 형식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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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대시조에 관한 단상 인식이 먼저인지 욕망이 먼저인지는 ‘닭이 먼저인가, 알이 먼저인가’하는 논법과 유사하다. 이 논법의 핵심은 둘의 선행 관계를 따지는 데 있다기보다는 아이러니와 같은 미묘한 상황을 짚어내는 데 핵심이 있다. 양 항의 결과의 문제가 아니라 두 매개항이 만들어내는 팽팽한 긴장이나 그 항들이 서로 같은 인식 지평(地坪) 안에서 겯고 트는 어떤 관계 내지는 의미망을 형성하고 있다는 데에 주목해야 하는 것이다. 현대시를 쓰고 현대시를 연구하는 입지에 선 나에게 시조에 대한 생각은 앞서 든 논법과 유사하다. 현대시와 현대시조의 선후나 경중의 문제가 아니라 그 둘이 21세기 한국문단에 동시에 존재하며 생각보다 교집합을 많이 지닌 것 같으면서도 의외로 둘 사이의 ‘친근성에 기저한 교유’는 전무하다시피 하다는 상황이 그러하다. 작품 자체의 교착이나 화학적 계통성이나 구조의 유사함은 보다 후세의 학자들이 평가할 일이지만, 당장의 창작자들과 또 필연적으로 그와 닮을 수밖에 없는 작품을 바라보는 시선은 쾌도난마(快刀亂麻)할 단어로 설명하기에 저어되는 측면이 없지 않다. 요는 현대시조를 대하는 그 어떤 사람도, 여타의 장르와는 달리 보다 강한 당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러니까 시조를 쓰거나 연구하거나 읽거나 하는 것보다 ‘시조라면 이러저러한 것이다.’라는 일종의 선입견이 개입되고 선행된다는 것이다. 14세기 중엽 장황함과 현란함, 그리고 퇴폐적 속성이 짙게 배인 속요(俗謠)를 신진 사대부들은 용납하기 어려웠다. 정확히 말하자면 새로운 정신의 이데아로 받아들여 내면화한 성리학적 사상을 속요로는 담아내기 어렵고 불편했던 것이다. 소위 긴장과 응축을 통한 이념의 문학적 모델화가 필요했던 것이고, 사대부들은 그것을 3장 6구의 새로운 시조 양식의 개발을 통해 구현해낸 것이다. 우리가 흔히 낡았다고 생각하는 그 시조가 실은 고려 중엽 이후 가장 첨단에 선 시 장르의 모델로 창조된 양식이라는 사실은 매우 흥미롭다. 그리고 시조는 그 후 600년 넘게 시가(詩歌) 양식의 적자로 군림해왔다. 우리가 앞서 시조의 선입견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지금 여러 모로 자기모색 중에 있는 시조가 얼마나 오랫동안 강력하게 문학적·정신적 조류사(潮流史)에 깊이 예각화 되었는가를 방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시조는 ‘현대’와 결합해 화학반응을 일으키는 순간부터 숙명적 전환의 국면에 접어들게 된다. 모두(冒頭)의 논법은 사실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현대+시조’를 인식하는 지점과 ‘현대+시조’에 대해 욕망하는 지점이 서로 균열을 일으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다시 환원하면 ‘현대성’과 ‘전통성 또는 시조성(性)’이 충돌하고 있다는 것이고 좀 더 미분하면 그것은 삶을 녹여내고 그에 대해 반응하는 정신성과 고래(古來)로부터 내려온 정형성의 문제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정신성과 정형성의 탁월한 결합물로 문학사에 등장한 시조가 이제는 그 결합이 깨어지면서 자기 존재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파격을 하면 ‘현대’라는 흐름에는 편승하나, ‘시조’라는 이름은 ‘시’에게 자리를 내주는 듯하고, 동일성에 바탕한 서정적 진실과 정신에 집착하면 ‘시조’라는 장자명(長子名)을 지킬 수는 있으나, ‘현대’로부터 분리되는 듯한 딜레마에 빠진 것이다. 현대시조가 가야 할 길을 섣불리 제언하거나 진단할 수는 없지만 있던 것을 너무 빨리 쉽게 폐기하지는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파편과 파열음(破裂音)이 가득한 세상을 시끄러운 불협화음을 통해 구현하는 방법도 있지만 침묵과 절제와 정제의 언어로 제 속을 다스릴 수도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일본의 하이쿠(俳句) 인구는 수백만에 육박한다. 반면 현대시를 향유하는 사람들은 만 명 정도에 불과하다고 한다. 일본의 하이쿠가 서양 정신과 문물의 동진(東進) 속에서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지켰기에 오늘날까지 일본혼과 시를 대표하고 국민에게 사랑을 받는 시가로 남아 있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2. 돌올(突兀)한 금강의 결기 현대시조에 대한 안목과 깊이에 대한 이해가 일천한 까닭에 서두의 군말이 길었다. 다만, 변명은 현대시에 몸담고 있으면서도 시조에 대한 여러 고민과 생각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라 때문이라고 해두고 싶다. 《태서문예신보》를 낸 서구문물의 적극적 수입자인 김억은 왜 나중에 시조부흥운동을 했으며, 《문장》파들은 왜 식민지 말엽 여러 선택지 중 시조부흥에 적극적인 자세로 임했는지, 오늘날 잡지에 수록된 시를 ‘현대시’ ‘현대시조’라 구분 짓지 않는다면 읽는 사람이 그것을 어떻게 구분해낼 수 있는지, 구별해낸다면 어떤 기준에 의해 그렇게 판단한 것이지, 여전히 많은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 사실이다. 여러 생각이 가닿는 현대시조단에서 정수자 시인은 보기 드문 좋은 시조를 써내는 시인으로 기억한다. 현대시조의 앞날은 정수자 같은 시인이 보기 드물지 않게 되는 데 관건이 있다고 해도 되겠다. 면식도 없을뿐더러 다만 시인의 시조 몇 수와 시집을 읽고 조심스레 하는 말이다. 군말이나 수사 따위 버린 지 오래인 듯/ 뼛속까지 곧게 섰는 서슬 푸른 직립들/ 하늘의 깊이를 잴 뿐 곁을 두지 않는다/ 꽃다발 같은 것은 너럭바위나 받는 것/ 눈꽃 그 가벼움의 무거움을 안 뒤부터/ 설봉의 흰 이마들과 오직 깊게 마주설 뿐/ 조락 이후 충천하는 개골의 결기 같은/ 팔을 다 잘라낸 후 건져 올린 골법 같은/ 붉은 저! 금강 직필들! 허공이 움찔 솟는다 좋은 시조의 장점은 ‘군말이나 수사 따위’에 휩쓸리지 않는 데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쩌면 현대를 관통하는 여러 전략 중 이 직방의 언어 탐색은 가장 정직하고 진실한 방법론이라고 할 수 있다. ‘금강송’은 귀한 소나무의 일종이기도 하지만 이 시조에서는 생(生)을 가로지르는 의젓한 존재의 표상이며 한편으로는 ‘현대시조란 무엇인가’하는 질문에 대한 메타적 자기 대답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사실 이 시조의 표면은 사물에 대한 묘사[格物]로 이루어져있지만 그것이 어떤 거경(居敬)을 얻게 되는 순간 시조의 살은 다른 곳을 향해 날아가게 된다. 사설이 없이 “뼛속까지 곧게 섰는 서슬 푸른 직립들”이기에 땅의 깊이가 아닌 하늘의 깊이를 잰다는 인식적 전환과 그것이 헌화(獻花)의 안일한 헌사로 처리되지 않고 눈 쌓인 봉우리와 그 높이를 함께하며 마주선다는 시적 구성은 정신의 가장 드높은 경지의 획득과 지향을 머금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붉은 저! 금강 직필들!”은 신독(愼獨)을 통해 터득한 궁극의 정신의 자세에서 비롯되는 일갈(一喝)이며 금강송이 딛고 선 대지와 하늘을 향해 흘러나오는 결기 어린 진동은 돌올하고 가장 단단한 치지(致知)의 조화로운 진경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내용과 형식의 문제이면서도 동시에 삶과 정신의 혼융의 자세를 그리고 있는 올곧고 ‘금강(金剛)’처럼 단단한 길은 다음에서도 발견된다.
이 시조는 존재들이 만들어낸 장엄한 진경을 그려내고 있다. 물론 그것은 “꽃밭”으로 비유되고 있는데, 1부분에서 그것은 존재의 지난한 순례의 과정을 떠올리게 한다. “오체투지 아니면 무릎이 해지도록/ 한 마리 벌레로 신을 향해 가는 길”은 곧 하강이 아니라 상승이며, 신이 있는 어떤 정신의 높은 곳을 향한 ‘끊임없는 나아감’을 함의하고 있다. 흡사 포탈라를 향해 오체투지로 고행을 하고 있는 티베트의 한 이름 없는 범부를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신에게 나아가는 것, 어떤 정신의 등정은 “한 마리 벌레”와 같은 가장 낮은 자세로 부복하거나 제 안에 어떤 고통을 갈무리해야만 가능하다는 것을 첫 두 구는 말하고 있다. 고통을 갈무리하는 것은 곧 자기 안에 가득함을 비워내는 일을 말하며, 흔적의 허울이 버려지는 만큼 그 빈자리에 “꽃”이 필 수 있다. 그러나 이 시조의 제목이 “꽃”이 아니라 “꽃밭”이 되는 것은 다음 수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시조에서 순례란 “한 마리 벌레”로의 인간 존재만이 아니라 그 허울이 벗겨진 공(空)에 이어지는 가득함과 아득함이라는 존재들의 향연이다. 이것은 일종의 아우라(光背)같은 것으로 드높은 존재의 후광으로 비추지만 자체가 어떤 존재성을 획득한 조화의 만다라를 의미한다. 오체투지로 순례하는 존재의 뒤를 따라 언제부터인지 알 수 없지만 오래 함께한 “바람의 발”이 그것이며, ‘아득한 경계’가 그것이다. 눈 덮인 고산을 넘는 주어로서의 “사라지는 것” “무화”의 정진이 깊고도 웅숭깊은 감동의 만다라로 완성되는 순간 만상(萬象)은 “노을꽃”으로 장엄한 것이다. 3. 신의 음성을 들을 때까지― 정수자 시인의 빛에 가까이 가지 위한 동경과 등정은 다만 금강송처럼 꼿꼿하고 금강같이 단단하고 노을꽃처럼 장엄한 순간에서 멈추지 않는다. 타자적 주체 속에서 자기를 상실한 것이 아니라 타자적 주체를 만상 속에서 경험함으로, 그 주체마저도 찬란하게 사라지는 것을 목도했으므로 그 정진은 관계 속으로의 기투와 침잠으로 이어진다. 시인은 이제 슬픔 속에 삶의 부대낌 속에 시조의 길을 자신의 길을 탐침해보려 한다. 진리에 다가가기 위해 이제 가장 깊은 슬픔의 절망의 어둠 속으로(김상봉, 《나르시스의 꿈을 좇아서》 중) 촉수를 내민다. 모두 그른 양비(兩非)도 아니고 모두 옳은 양시(兩是)도 아니고 다만 양재(兩在)하는 자재로움만이 있을 뿐이다. 이는 이미 앞서 언급한 〈장엄한 꽃밭〉의 2에 해당하는 부분에서 “집을 향해 포복하는 차들의 긴 행렬”속 “답청”의 발견을 통해 시사된 바 있다. 시멘트도 삼십 년쯤 피붙인 양 안다 보면/ 곁 주고 그늘 주고 노래도 얹다 보면/ 덜커덕 한 몸이 되는/ 나무들의 체위라니!// 남의 살을 품는 것은 체액일까 체념일까/ 쇠기둥도 끌어안고 종내는 하나 되는/ 나무들 푸른 팔짓은 저를 거기 스미는 짓// 눈물 콧물 안고 섬겨 진주처럼 키우는 짓/ 오늘도 제 팔 끼고 밤을 넘는 딴 몸들아/ 뻘짓이 곧 꽃짓이란 듯/ 나무들 또 팔을 뻗네 이 작품은 존재가 다른 타자적 존재와 어떻게 혼융되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시멘트나 쇠기둥을 타고 오르는 넝쿨나무들이 어느새 서로 하나가 되는 놀라운 사건을 “체위”라는 개념을 통해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 시조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단순히 하나가 된 사건이 아니라 그에까지 도달하게 된 지난한 도정에 있다. 그저 시간이 오래 지나서 연리지(連理枝)같이 엉킨 것이 아니라 피붙이인 양 “곁 주고 그늘 주고 노래도 얹”는 서로의 통감과 교유의 행위가 뒷받침되었다는 것을 시인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환희의 일이라기보다는 고통을 수반하는 일이며 신산하고 애틋한 일이다. 시조 전반에 풍기는 이러한 분위기는 이들의 결합이 곧 숙명적이고 운명적인 일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진정한 교유와 결합이란 서로를 폭력적으로 덧씌우거나 한 존재가 다른 존재를 압도해 소멸시키는 일이 아니다. 어둠까지도 함께 끌어안는 것, “나무들 푸른 팔짓은 저를 거기 스미는 짓” “눈물 콧물 안고 섬겨 진주처럼 키우는 짓”이야말로 존재와 존재가 서로를 다치게 하지 않으며 한 몸이 되는 일인 것이다. 때문에 오랜 세월 그랬고 또 지금도 그러한 나무들의 “팔을 뻗”는 “체위”는 “뻘짓”이 아닌 “꽃짓”이 되는 것이다. 대학 시절 음독으로 혀를 절인 미수 언니/ 밤이면, 절며 왔다, 전화 타고, 머뭇머뭇// 행간을/ 모두 음독할 듯/ 별 사이를/ 독음할 듯// 퇴화한 발음 찾아 동화나 꾹꾹 쓰더니/ 다 놓고, 갔다는, 음독 같은, 전화 한 통// 긴 구음(口音)/ 은한을 삼킬 듯 정수자 시인의 이번 신작 중에 가장 뛰어난 가편의 작품이다. 불운하고 불행한 한 존재의 삶과 죽음을 통해, 담담하게 그 존재의 행위를 묘파함으로 생의 진실에 가닿은 훌륭한 작품이다. 한 존재가 다른 존재로 건너가는 시간, 또는 한 존재가 다른 차원의 곳으로 건너가는 시간 이것이 이 시의 제목이기도 한 “음독의 시간”이다. 대학 시절 어떤 이유에서 그것이 사랑이건, 아니면 다른 문제였든 간에 “미수 언니”는 스스로의 생을 극단(極端)으로 밀어 넣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리고 용케 목숨을 구한 “미수 언니”는 밤마다 시인에게 타들어간 혀를 굴리며 전화를 한다. 제대로 발음할 수 없었기에, 제대로 제 의사를 전달할 수 없었기에 생긴 어둠과 빈자리 때문에 언니는 “행간을/ 모두 음독할 듯/ 별 사이를/ 독음할 듯”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가장 큰 고통이 가장 따스하고 낮은 곳으로 흘러가듯 그 언니는 지금은 잃어버린, 퇴화된 것을 더듬어 “동화”를 썼다. 그리고 끝내는 그마저도 모두 “다 놓고, 갔다”. 이 시조가 우리를 흔드는 것은 바로 “음독”이라는 단어 때문이다. 첫수에서도 그렇지만 다른 모든 부분에서 음독은 飮毒으로도 音讀으로도 읽힌다. 물론 문장의 구조를 곰곰이 따져보면 첫수는 전자의 의미로 두 번째 수에서는 후자의 의미로 세 번째 수에서는 그 둘 모두의 의미로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이 시조를 읽고 우리가 감동하고 다시 애틋해지는 것은 시 전체에서 음독을 飮毒, 音讀 그 무엇으로도 읽을 수 있다는 것이며 둘 다로도 읽을 수 없다는 점이다. 존재는 진동하고 있는 것이라는 것처럼 이 시조에서 저 ‘음독’은 꼭 잡아쥘 수 없을 것처럼 계속해서 흔들리고 있다. 그러한 모습이야말로 실은 우리가 살고 있는 생의 모습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때문에 그녀의 음독이 시인에게 “음독”같이 전해지고 다시 그 음독이 이 시조를 읽은 우리에게 묵직하게 전해진다. 오래 곱씹고 오래 남을 작품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시인 정수자는 신작 5편의 말미에서 묻는다. 정수자 시인의 익숙한 어법이기도 한데, “꽃답”은 ‘꽃의 답이’기도 ‘꽃 같은 답’이기도, ‘나의 답’이기도, ‘꽃 같은 나의 답이’기도 하다. “나무의 체위”로부터 미수 언니의 “음독의 시간”을 지나 시인은 묻지 않고 답한다. 그러나 답이 있음으로 이미 물음은 괄호 쳐져 있는 것이다. “꽃샘”에 더욱 심해진 상심으로 시인은 우리들의 “안부”와 “살이”에 대해 묻는 것이 아니라 대답한다. “하, 꽃이네요” “다, 그러하지요”와 같은 대답보다 더한 답이 있을 수 있을 것인가? 살바람이 살을 저미는 이 추위에 “꽃” “잎”을 세우며 그보다 더한 “안부”와 “살이”의 답은 없을 것이다. 끝으로 이 시조는 말놀음 또는 말퍼즐로 읽어도 흥미로운 작품이다. 두 번째 수의 말묶음을 세로로 ‘안부/ 살이’ ‘하/ 다’ ‘꽃이네요/ 그러하지요’로 읽거나 세 번째 네 번째 수의 첫 글자만 세로로 읽어도 나름의 재미가 있다. 4. 소통과 가능성의 시조를 위해 변화와 변전은 언제나 미덕이며, 기존에 대한 도전이 예술의 필연적인 기반이 되는 것만이 아니다. 정수자 시인의 시조를 읽으며 시조에서 어떤 가능성을 본다. 기본적으로 짧은 외형을 가진 시조는 오늘날과 같은 속도의 시대에 소통의 충분한 기본조건을 가지고 있다. 중요한 것은 기왕의 시조가 지닌 또는 시조가 가꾸어온 영역을 더 깊게 더 넓게 확장하는 일일 것이다. 정수자의 최근 시편이 보여주는 것처럼 그것은 우리의 삶 속에 있는 어둠과 불안, 욕망과 감성의 문제를 그러니까 인간이란 존재가 지닌 ‘살이’라는 정서적 삶을 응축적으로 어떻게 환기시키느냐에 관건이 있다. 아무쪼록 정수자 시인의 보여준 시조의 미학이 “앞으로 쭉”(〈아마도에 대한 짧은 고찰〉) 하나의 계보학으로 이어지기를 기대한다.
전형철 | 시인. 충북 옥천 출생. 2007년 《현대시학》 신인상으로 등단. 2010년 서울문화재단 창작지원금 수혜. 계간 《다층》 편집위원. 고려대 국문학과 졸업 및 동 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서울여대, 동덕여대 국문학과 강사. |
- http://www.yousim.co.kr/news/articleView.html?idxno=5246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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