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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전기철 특집] 전기철의 시 세계 / 이경호 - 부정의 세계관과 어법이 빚어내는 ‘왕관 현상’

문근영 2014. 2. 25. 11:54

[전기철 특집] 전기철의 시 세계 / 이경호
부정의 세계관과 어법이 빚어내는 ‘왕관 현상’
[52호] 2011년 09월 10일 (토) 이경호 시인

오래전 텔레비전 우유 광고에서 ‘왕관 현상’을 목격하고 신선한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서울 우유’ 광고였는데 고속도 촬영기법으로 우유 속에 무엇인가를(아마 또 다른 우유였겠지만) 떨어뜨리자 충격에 대한 반작용으로 우유가 허공으로 솟구쳐 오르면서 흩어지는 순간 왕관 모양을 만드는 장면을 천천히 카메라로 잡아 보였다. 그 장면은 뉴턴의 제3운동법칙인 작용과 반작용이 만들어낸 효과이다. 그런데 그 운동법칙에는 중요한 요소가 개입한다. 일반적으로는 ‘마찰력’이라고 하는데 액체 상태에서는 그것을 ‘점성’이라고 부른다. 말하자면 액체 분자들이 서로를 끌어당기는 힘인 셈이다. 이 ‘점성’ 때문에 액체가 공기와 닿는 부분에 표면장력을 만들어내고 그것이 허공에 튀어 오른 우유에 왕관 모양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장황하게 ‘왕관 현상’을 이야기한 까닭은 예술가들의 상상력과 그것을 표현하는 기법이 이러한 현상을 촉발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전기철의 경우도 예외는 아닌데 그의 시세계는 ‘자극’의 강도를 보다 높이는 전략을 보여준다. 강한 ‘자극’의 표현기법을 과시하여 수용과정에서 시적 관념과 언어 미학의 독특한 개성을 환기하려는 시쓰기의 전략인 셈이다. 현대예술로 내려올수록 예술가의 상상력과 표현 기법은 ‘조화와 균형을 추구하는 미학의 원리’보다 ‘혼란과 파괴, 혹은 왜곡을 자행(恣行)하는 반미학의 원리’를 좆게 되었다. 예술이 종교의 초월적 가치나 휴머니즘의 이상을 수락하거나 자본주의와 대립하는 예술의 자율적 가치를 더 이상 내세울 수 없게 된 현실 속에서 예술의 상상력과 표현기법이 앞 시대로부터 물려받은 예술적 유산을 더 이상 느긋하게 활용할 수가 없게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과거의 모든 문화유산들은 자본주의에 오염되어 버렸고 예술의 안전지대는 존재하지 않게 되어버린 것이다. 이제는 “타락한 시대에서 타락한 방법으로 이상을 추구하는” 예술의 길도 요원해져 버렸다. 그러므로 남은 길은 “타락한 시대에서 타락한 방법으로” 혼란과 파괴의 ‘충격’이나 ‘자극’을 제공해야만 하는 예술의 방향이다. 시간이 경과할수록 어느 시대보다도 강한 ‘충격’과 ‘자극’을 예술가의 저주받은 정체성으로 내세우는 작업들이 현대예술의 활로와 개성을 구축해가고 있다.

예술적 상상력과 표현 기법의 강한 ‘충격’과 ‘자극’은 호기심을 원동력으로 삼아 수용자들의 적극적인 반응을 요청한다. 이것이 뉴턴 운동 제3법칙의 효과이고 ‘왕관 현상’의 결과이기도 하다. 러시아 형식주의 비평가인 쉬클로프스키는 “창조적 변형행위는 우리 주위의 세계에 ‘밀도’를 부여함으로써 우리의 인식력을 날카롭게 해준다”고 주장한 바 있는데 수용자의 “인식력을 날카롭게 해준다”는 효과가 바로 예술가의 창조적 충격에 대한 수용자의 반작용이거나 반응인 셈이다. 문제는 ‘밀도’를 부여하는 점에 있다. 우유의 ‘왕관 현상’에서도 중요한 조건이 ‘점성’의 비율이었던 바, ‘밀도’란 바로 이 ‘점성’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술가가 제공하는 상상력이나 표현기법의 새로운 ‘자극’이 수용자의 예술에 대한 “인식력을 날카롭게 해”주는 반응을 만들어내려면 예술에 대한 사회적 인식의 ‘밀도’가 달라져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우유의 ‘왕관 현상’에서는 우유의 ‘점성’이 너무 높으면 완벽한 ‘왕관’ 모양을 만들어내기가 어렵지만 예술적 상상력의 생산과 수용 과정에서는 ‘밀도’가 높은 예술에 대한 인식이 마련될수록 새로운 ‘자극’에 대한 반응이 성공적으로 촉발될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이다.

전기철의 시적 상상력과 표현기법은 이러한 운동 과정의 존재의의를 되새기게 만드는 전략을 시적 개성으로 확보하고 있다. 그의 상상력과 표현기법은 우선 근대에 이르기까지 예술이 보존해온 이상적, 자율적 가치를 부정하는 자리에서 전개되고 있다. 이러한 시적 세계관은 역사적으로는 20세기 초반의 아방가르드 예술운동 이후로 성립하고 있는 것이다. 자본주의와 자본주의 예술에 대한 공격의 전략으로 과격한 표현기법을 구사하는 ‘충격’과 ‘위반’의 전략을 그의 시세계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역사적 아방가르드’가 공산주의에서 삶의 돌파구를, ‘네오 아방가르드’가 대중문화에서 예술의 가능성을 찾으려고 시도한 데 반하여 전기철의 시세계가 시도하는 ‘충격’과 ‘위반’의 전략은 다른 방향을 추구한다. 그 전략은 ‘역설’과 ‘아이러니’, 혹은 ‘이질적인 이미지의 폭력적인 결합’ 등을 통하여 일차적으로는 자본주의적 현실에 대한 부정과 야유, 절망을 토로하고 이차적으로는 자본주의적 현실을 지탱하는 언어 질서를 교란하고 위반하는 것이다. 그것은 어떠한 이념도 신뢰하지 않고 대중문화를 비판하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물론 전기철의 시세계에서 부정의 세계관을 제시하는 ‘충격’보다는 언어 질서를 교란하고 위반하는 표현기법의 충격이 더욱 돋보이는 운동 효과를 만들어낸다.

후자가 더욱 돋보이는 운동효과를 발휘하는 까닭은 이러한 표현기법에 대한 사회적 인식의 ‘밀도’가 어느 정도 확립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밀도’를 만들어낸 것은 시를 비롯한 문학 활동의 역량이라기보다 미술이나 영화를 비롯한 다른 예술 활동의 역량이 누적되고 그것들이 문학 활동으로 유입되는 효과를 만들어냈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인터넷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미디어 아트의 다채롭고도 현란한 표현기법과 그것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활용하는 수용자층의 확산으로 말미암아 시인들이 구사하는 언어의 표현기법 또한 다양한 혁신의 서술 내용들을 선보이고 그러한 내용들이 수용될 수 있는 기반도 확보되어 가고 있다. 게다가 혁신적인 서술 기법을 시도하는 시인들의 상당수가 음악이나 미술, 영화, 연극 등 다른 예술 장르에 종사하고 있는 점도 다른 예술과의 접합을 통해 언어 표현기법의 가능성이 확산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해주고 있다. 그럼 이제부터 전기철의 최근 작업에 제시되어 있는 부정의 세계관과 그것을 담아내는 표현기법들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자.

부정과 절망의 세계관을 ‘자극’으로 제시하는 전기철의 방법은 “불행해서 기뻐요”(〈치인(痴人〉)처럼 ‘역설’의 경구적(警句的) 활용에 의존하는 모양을 보여줄 때 많다.

형은 빌리 할러데이의 ‘불행해서 기뻐요’로 연명했다./ 가족들은 형이 연금술을 발명했거나/ 약속의 땅이라도 발견한 줄 알고/ 형의 눈치를 보았다.
 ―〈치인〉 부분

이러한 역설의 기반은 “연금술을 발명했거나/ 약속의 땅이라도 발견한 줄 알고”의 빈정거림으로 한층 강화된다. 타락한 현실에서는 불행을 확인하는 일로써만 삶의 진실한 근거를 확인할 수 있다는 “형”의 입장을 ‘연금술’이나 ‘약속의 땅’쯤으로 인정하려는 “가족”의 태도가 더 큰 소외 조건을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역설을 통해 확립된 진실의 근거다 다시 한 번 뭉개지는 효과! 이것이 전기철이 고안해낸 역설의 개성적 맥락이다. 하지만 전기철이 부정과 절망의 세계관을 언어의 ‘자극’과 ‘위반’ 효과를 활용하여 가장 자주 선보이는 표현 기법은 상호 이질적인 낱말과 이미지들을 거칠게 결합시켜 나열하는 서술기법이다.

인격 없는 거리에서 기
계들은 고집이 세고 교회가 복덕방이 되
기도 하고 학교가 공사판이 되
기도 하여 똥 돼지들은 위장 전입이나 반칙이나 비상
구로 빠져나갔다.
유일하게 내 것인 성기로 아르키메데스처럼 지구를 들어올릴 거야……
                   ―〈콜라〉 부분

이 작품에서 “인격”과 “거리” “기계”와 “고집” “교회”와 “복덕방” “학교”와 “공사판”은 상호 이질적인 속성을 지닌 낱말들의 결합이며 나열임을 증거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이질적인 정도는 수월하게 간파될 만한 결합의 근거를 암시해주고 있기도 하다. 이질적인 속성들이 “인격”과 “교회” 그리고 “학교”처럼 중요한 존재 가치를 간직한 것들이 훼손되거나 변질되어 버린 상황을 암시하는 맥락으로 설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성복이 1970년대 말에 선보인 초현실주의적 자동기술법의 사례들, 이를테면 “걸어가는 詩가 되었으면 물구나무 서는/ 오리가 되었으면 嘔吐하는 발가락이 되었으면/ 발톱 있는 감자가 되었으면 상냥한 공장이/ 되었으면 날아가는 맷돌이 되었으면”(〈口話〉)에서 제시되어 있는 사물들의 관계보다 온건하다. 그만큼 ‘자극’의 강도는 약한 셈이다. 그러나 마지막 시행의 “유일하게 내 것인 성기로 아르키메데스처럼 지구를 들어 올릴 거야”는 “성기”와 “아르키메데스”의 종잡을 수 없는 이질성이 “지구를 들어 올릴 거야”라는 단서 조항으로 참신한 의미 발생 효과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을 요한다. 부정과 절망의 세계관을 견뎌내는 주체성의 몸짓으로 성욕을 내세우는 발상이 참신한 ‘자극’의 강도를 뛰어넘어 절실함을 구축하는 효과까지 빚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발상을 20세기의 저명한 시인이자 비평가인 T.S. 엘리엇은 ‘기상(conceit)’이라고 일컬은 바 있다. 기발한 착상이라는 뜻인데, 그가 이러한 ‘기상’의 사례로 삼은 것은 17세기 영국의 ‘형이상학파 시인들’의 작품에서 발견되는 기발한 이미지와 관념의 결합 효과였다. 예를 들어 존 던이라는 시인은 〈슬퍼함을 금하는 고별사〉라는 작품에서 부부의 온전한 사랑을 ‘컴퍼스’라는 설계 도구의 이미지로 묘사하고 있는데, 엘리어트가 보기에는 부부의 온전한 사랑을 ‘컴퍼스’의 이미지로 착상한 것이 기발한 미학적 효과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비유에서 ‘컴퍼스’의 바깥쪽 다리는 바깥 일로 분주한 남편의 삶을 표상하며 ‘컴퍼스’의 안쪽 다리는 집안 살림을 잘 지켜나가는 아내의 삶을 표상하고 있다.

컴퍼스의 안쪽 다리가 중심을 바르게 잡아야 바깥쪽 다리가 완벽한 원의 모양을 그려내듯이 아내가 집안을 잘 지켜야 남편이 바깥 일을 훌륭하게 완수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17세기 형이상학파 시인들의 이러한 이미지 착상법이 18세기 영국 문단에서는 ‘폭력적인 이미지 결합’이라는 점에서 호된 비판을 받았다는 점이다. 부부의 사랑을 ‘컴퍼스’에 비유한 것이 적절하지 않다는 것이다.

엘리엇은 이러한 18세기의 평가를 비판하면서 17세기 형이상학파 시인들의 그러한 이미지 결합 방식이 사랑이라는 ‘감성’의 영역을 ‘컴퍼스’라는 ‘지성’의 영역과 결합시키는 이른바 ‘감수성의 통합’ 효과를 만들어내고 있다고 상찬하였다. 이러한 평가는 시인이 제공하는 혁신적 상상력과 표현기법이 그것을 수용할 만한 시대적 인식의 ‘밀도’를 필요로 한다는 점이다.

그것과 더불어 그러한 상상력과 표현기법을받아들이는 시대의 예술에 대한 인식의 ‘밀도’가 변화한다는 사실도 잘 예증해준다. 그러나 보다 의미심장한 점은 ‘감성’으로서의 예술에 대한 인식의 ‘밀도’가 집중되어  ‘감성’과 ‘지성’을 결합하려는 시도는 좋은 평가를 받기 어려웠던 18세기 영국 시단의 현실과 서정시에 대한 인식의 ‘밀도’가 감성 쪽으로 편중되어 있는 한국 시단의 현실이 유사한 것은 아닌지를 자문해 보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전기철의 ‘성기’와 ‘아르키메데스’의 결합을 시도하는 것과 같은 이미지 운용 방식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전기철의 시세계에서 부정과 절망의 세계관을 드러내는 표현기법과 더불어 주목해야 할 또 다른 요소는 언어에 대한 자의식이다.

배달된 누이의 통증 속 도
스토예프스키가 질문을 던진다 나
는 답을 찾지 못한 채 격
언과 속담을 장복하지만 입은 너
무 깊고 문자는 말썽만 일으킨 다
최고의 문장은 거리를 쏘다니는 전단지에 있어……방금 지나간 바람 소리가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어?……볼펜이 감기에 걸려 콧물만 줄줄 흘린다고……종이 속에서
수다쟁이 노름꾼이 나를 뚫어지게 쳐다봐.
                   ―〈콜라〉 부분
 
가진 자들과 화해하려 해도
여우의 말을 두루미의 언어로 번역할 수 없어
잔돈처럼 이곳저곳을 기웃거리고
가택수색을 당한 내 머릿속은 
늘 빈곤한 나라
저녁 어스름이 비웃듯 내 가슴을 들여다보지만
빈 개집처럼 텅 빈 울음만 가득하다.

……(중략)……

머릿속 자물쇠를 풀고
기형의 언어를 피해 원시의 언어를 찾아봐도
변명할 적당한 단어를 찾을 수 없고
나를 읽어줄 니고데모조차 없다.
             ―〈떡갈나무의 나라는 어디쯤 있을까〉 부분

부정과 절망의 세계관과 연결되어 있는 그의 언어에 대한 자의식은 일차적으로 언어 선택에 대한 의혹(“기형의 언어를 피해 원시의 언어를 찾아봐도/ 변명할 적당한 단어를 찾을 수 없고”)으로 표현되고 이차적으로는 언어 소통에 대한 절망감(“여우의 말을 두루미의 언어로 번역할 수 없어”)으로 표출된다. 하지만 이러한 절망감이 그의 시세계에서 다양한 언어 표현기법을 모색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콜라〉에 제시되어 있는 불규칙한 행갈이와 빈번하게 사용되는 말줄임표는 기존의 언어 문법을 위반하거나 해체하려는 시도이다. 이러한 시도는 언어의 활력과 가능성을 “격언과 속담”과 “전단지” 그리고 “바람 소리”의 연결 고리에서 찾으려는 시도일 것이다.

 앞에서 살펴본 수많은 이질적인 관념과 이질적인 이미지들의 결합 효과도 그러한 언어의 활력과 가능성을 찾아내려는 방편이 될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그의 작품들에서 기존의 언어 체계를 위반하는 “기형의 언어”는 폐차장에 해체된 채 널려 있는 자동차 부속품들처럼 산만한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기존의 언어 체계와 표현법을 위반하려는 그의 전략은 그러한 산만함 때문에 ‘왕관 현상’ 같은 미학적 반응을 촉발하기가 어려워 보인다. 〈트랜스포머〉라는 영화에서 주목할 것은 바로 그러한 미학적 반응이다.

그 영화에서 관객의 놀라운 감탄을 유도하는 장치는 자동차가 로봇으로 변신하는 과정에서 과시해 보이는 이중의 ‘기괴한 역동성’이다. 자동차가 로봇으로 변신하는 과정에서 일차적으로 관객의 시선을 사실적인 공감으로 유도하는 효과는 자동차가 로봇으로 변신하기 전에 해체되는 모양을 재빠르게 보여주는 과정 속에서 발생한다. 너무도 속도감 있게 전개되기 때문에 해체의 과정은 환각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환각 같은 해체의 과정과 재조립의 과정을 역동적으로 이어놓는 이중의 테크놀로지가 변신에 대한 관객들의 미학적 쾌감을 충족시켜주는 것이다. 전기철의 시세계에 동원되는 위반의 언어 시스템도 이러한 과정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그의 시 쓰기에서 위반의 언어 시스템은 일차적으로 기존의 언어 체계가 해체되는 현상을 늘어놓는 일에 주로 몰입해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의 언어 시스템 또한 해체의 과정과 함께 기괴하면서도 역동적인 재조립의 과정을 선보인다면 그의 상상력과 표현기법이 독자에게 수용될 때 ‘왕관 현상’과 같은 미학적 반응을 불러일으킬 것으로 기대되는 것이다.

 이미 부분적으로는 상호 이질적인 이미지들을 결합해 놓는 과정에서 그러한 솜씨를 과시한 바 있으므로(주로 한 구절이나 한두 행의 분량으로) 시 한 편이나 혹은 그 이상의 보다 확장된 영역 속에서 그러한 재조립이나 새로운 결합 방식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작업이 필요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다음의 작품이 주목을 요구한다.

가로수 위에 걸린 입술 까치집에서 죽은 종이비행기 그림자가 싹이 트면 검은 천막 안에서 잠자던 침묵의 메아리가 웨딩드레스로 펼쳐지는 웃음 턱수염을 단 바람이 늑대 울음소리에 갇힌 초록을 풀어 배를 띄우니 물오리가 슬픔의 물감을 짜 강을 뿌리고 어느 산사에서 도망친 종소리가 쪽빛에 취해 염불이 휘청거릴 때 우리에 갇힌 한쪽 귀가 풀어놓은 음계의 우울 수집가가 불에 달궈져 끈적끈적한 절규를 공중에 늘어뜨려 통음 난무한 애욕이 번진다
                            ―〈레드 다이어리〉 전문

이 작품에서 “까치집”의 이미지가 갖는 연쇄적 조립효과를 보라. 우선 그것은 “입술” 모양으로 존재하다가 “종이 비행기”를 받아들이면서 “검은 천막”으로 변신하는 역동성을 보여준다. 한편으로는 “입술” 속에서 “잠자던 침묵의 메아리”가 하얀 “종이 비행기”가 연상시키는 “웨딩 드레스”로 인하여 “웃음”으로 뒤바뀌고 그 “웃음”은 다시 “바람”으로 변신하여 강물에 “배”(“배”는 “종이 비행기”의 변신이기도 하다)를 띄우고 그 “배”는 다시 “물오리”로 변신한다. 그런 후에는 “물오리”의 발짓이 강물에 “슬픔의 물감”을 풀어놓는 파문을 만들어내고 그 파문은 “산사에서 도망친 종소리”로 변신한다.

 다시 “종소리”는 “음계”로 바뀌어 “끈적끈적한 절규”를 빚어낸다. 이 얼마나 다채롭고도 역동적인 변신의 과정인가. 전기철의 표현기법은 이러한 변신의 활력, 이질적인 이미지들을 결합하여 기존의 어법을 파괴하는 한편 새로운 어법이 자연스럽게 빚어내는 관념과 감각의 세계를 탐구할 필요가 있다. 기존의 어법을 위반하거나 파괴하는 새로운 어법은 해체된 풍경을 나열하는데 그치지 않고 해체된 풍경이 재조립되어 변신하는 새로운 풍경을 제시하는 단계로 나아가야만 하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새로운 언어 시스템이 만들어낼 수 있는 미학이며 ‘왕관 현상’의 효과일 것이다.    

 

이경호 | 문학평론가. 1955년 서울 출생. 고려대 영문과, 동 대학원에서 비교문학 전공. 저서로 《문학과 현실의 원근법》 《문학의 현기증》 《상처학교의 시인》이 있음. 현재 《작가세계》 편집위원, 한서대 문예창작과 겸임교수.

 

-http://www.yousim.co.kr/news/articleView.html?idxno=5244 에서

출처 : 시하늘
글쓴이 : 보리향(菩提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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