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상중계] 유심시낭독회 | ||||
| 유월의 이야기, 그 뜨겁고 넓고 참혹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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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초, 열한 명의 시인은 최호일 시인이 운영하는 인사동 ‘완산골명가’에서 이번 유심 시낭독회 테마를 ‘유월의 이야기’로 잡는다. 방민호 시인과 박완호 시인은 유월은 모든 삶이 멈추기도 하며, 다시 시작하기도 한다고 말한다. 단순하고 명백한 문장이다.
바람이 많이 불었다/ 은행나무 몇 그루 새파란 귀때기 절레절레 흔들며/ 싹싹, 싸리비로 하늘 쓰는 소리를 냈다/ 그런 밤에 내려온 별들의 발걸음은 취한 듯/ 휘청거렸다 극성스런 녹음의 골목마다 눈물 글썽이는/ 바람, 검은 봉투 매달린 넝쿨장미도 함께 울었다/ 유리창 신음소리 멀리 퍼지면/ 사람들 젖은 어깨 더욱 낮게 쳐졌다/ 베란다까지 길게 몰려온 어둠의 그림자/ 눅눅히 젖어들고 빈집 겁탈하듯 점령한 기억들/ 시간의 사타구니 흥건하게 적셨다/ 거리엔 앵두 같은 알전구 하나 둘 익어가고/ 쥐똥나무꽃 비릿한 냄새 몽환처럼 떠다녔다/ 텅 빈 마음 속 스멀스멀 밀려드는 상념 / 온몸에 들러붙은 물먹은 휴지처럼/ 끝내 밀어낼 수 없었다 / 장마 부근에는 장마 부근에는 늘 사방을 압도하는 바람이 분다. 바람은 바람을 밀어내고 그 자리에서 다른 바람을 맞이하는데 “그런 밤에 내려온 별들”은 휘청거릴 수밖에 없다. 바람이 비를 가득 안고 있기 때문이다. 물의 무게는 태반이 바람이다. 차분한 녹음(綠陰)도 어차피 장마 부근에는 극성스러워진다. 같은 이유다. 그리고 시인은 비가 쏟아지는 공간의 어둠과 차가움, 그리고 불안과 공포를 강렬한 문장으로 낭독한다. “베란다까지 길게 몰려온 어둠의 그림자/ 묵묵히 젖어들고 빈집 겁탈하듯 점령한 기억들”이 그것이다. 매달리고/ 또 매달리고/ 바스라지고 또 바스라져서/ 병이 깊어지라고/ 이 병 때문에/ 저절로 죽어지라고 빌었다/ 바다는 너무 멀리 나가버리고/ 소금밭 쓰린 갯벌에/ 말라비틀어진 불가사리잎/ 속없는 게딱지/ 그냥 하늘 보고/ 이렇게 살아지라 잊혀지라 빌었다/ 잃어버린 꿈의 산/ 석양에 빨갛게 붙타버린 몽산포/ 캄캄한 바다/ 저 썰물의 바다 멀리 묻어둔 당신/ 잊혀지라 살아지라/ 우리 둘 다 병들어/ 죽어지라 빌었다// 오늘은 내 괭이가/ 베란다 창문턱에 올라가 앉아/ 먼 곳을 바라본다/ 푸른 잎 검게 너울거리는 몽산포/ 썰물이 빠져나간 폐허/ 오늘은 내 괭이가/ 꿈의 산에 묻혀 있는/ 당신을 찾아가고 싶은가 보다 이 〈몽산포〉는 낭독 시인들이 쓴 시 중에서 가장 어린 시다. 낭독하기 전까지, 그 바쁜 시간을 쪼개면서 시인은 이 시를 썼다. 아마 시에 낙관을 찍었을 때도 시퍼렇게 살아서 뛰는 언어들이 시의 울타리 밖으로 튀어나올까 봐 불안해했을지도 모른다. 방민호 시인은 말한다, 낭독이 끝난 후, 어떤 부분을 잘라내야 좋을지 말씀해 달라고. 그러나 아무도 그리하지 않는다. 낭독을 마쳤을 때, 시는 저절로 완성되고 치밀해졌기 때문이다. 시인의 마음에 내려앉은 기억들의 슬픔과 아스라함이 객석에 스몄기 때문이다. “병이 깊어지라고/ 이 병 때문에 저절로 죽어지라고 빌었”던 시인, 하지만 ‘병’ 때문에 “바다는 너무 멀리 나가버리고”, 시인의 뭍은 “속 없는 게딱지”처럼 처연했던 것이다. 그의 입술에서 고대인들이 쓰던 종이 냄새가 났다/ 부치지 못한 편지에서 모르핀 냄새가 났다/ 잠꼬대로 무덤을 말했던 날들이 덕분에 지나갔으므로/ 자장면을 즐겨 먹지 않은 건 잘한 일이다// 검고 진득진득한 생의 멍에를 벗고/ 나는 점점 가볍고 얇고 환해지고 있다/ 풀코스 중 마지막 메인 요리를/ 먹지 못하고 큐피드의 화살에 맞았다/ 그렇게 긴 긴 키스 세례를 받게 될 줄은 몰랐다// 삼일 째 메인 요리를 먹지 못하고 있다/ 그의 입술을 생각하고 생각하느라 돌아와서/ 혼자가 되었을 때 나는 그가 되었다 관자놀이에 쇄골에/ 목에 멈출 수 없었다 초여름 저녁이었고 손을 씻어야지 얘야/ 흙 묻은 손을 씻어야지 얘야 아니면 입에 벌레가 들어간단다/ 먼 곳에서 어머니가 불러들였지만 대답하지 못했다 나무가 새에// 매혹되듯 흙 묻은 그의 입술에 혀에 사로잡혔다/ 모처럼 통증을 느끼지 못했다 통증을 느끼고 싶지 않았다/ 나는 무덤을 말했던 날들이 지나간 줄 알았다 시인은 왜 “점점 가볍고 얇고 환해지고 있다”고 노래할까. 검고 진득진득한 생의 멍에를 벗었기 때문일까. 그렇다면 그 멍에는 무엇일까. ‘큐피트의 화살’과 ‘키스’라는 시어에서 정체가 드러나는 듯하다가 다시 숨어버린다. 어머니의 목소리도, 아이의 움직임도 수렁에 빠져버린 느낌이다. ‘무감각의 감각적임’이 참 아이러니하다. 시인은 노래한다. “매혹되듯 흙 묻은 그의 입술에 혀에 사로잡혔다/ 모처럼 통증을 느끼지 못했다 통증을 느끼고 싶지 않았다.” 광우병 파동 이후, 다시 거리에 촛불이 등장하고 있다. 2008년 6월, 매일 거리를 흐르던 촛불이, 2009년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때 다시 불타올랐던 촛불이, 2년이 지난 지금, ‘반값 등록금’을 내걸고 다시 타오르고 있는 것이다. 여전히 세상은 어둡고 바꿔야 할 것들은 많기 때문일까. 촛불은 손에서 손으로 이어지며, 마음으로 타올랐고, 지금 이 자리에서 시인의 목소리로 흘러나온다. 촛불은 그리움이고, 소망이다. 촛불은 아직 오지 않은 세계를 기다리는, 운주사의, 그 단단한 돌부처들이다. 또한 ‘엄니 젖가슴처럼 환한 세상’이다. 나는 당신과 달라./ 나는 당신을 몰라./ 인격이 없는/ 투명한 두 문장을 가슴에 끌어안고/ 나는 울었다네./ 한때 나는/ 완벽하게 마음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향해/ 부서지는 모든 기표에 전념했지./ 무엇이 그리 짧았던가./ 가늘게 떨어지는 소리의 발자국이여./ 나는 이제/ 한 문장에서 한 문장으로 건너가는 죽음처럼/ 오래 슬프구나./ 낱말과 낱말을 건너/ 비문처럼 자유로웠다면/ 나는 당신과 다르고/ 나는 당신을 몰랐을 텐데. 김용희 평론가의 낭독을 들으며, 프랑스어 ‘adorable(근사함)’를 생각한다. 목소리와 목소리의 보폭과 넓이 때문일까. 아니다. “한때 나는/ 완벽하게 마음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향해/ 부서지는 모든 기표에 전념했지.”라는 문장 때문이다. 욕망은 부정확한 기표를 만든다는 것. 이것이 바로 이 근사함의 의미고, 번역의 실체가 아닐까. 목요일 여느 때와 같이/ 적막의 산길 오른다/ 늦은 오후/ 칼바위 능선 중턱에서 소리를 듣는다/ 스르르 삭 스르르 삭/ 아침 이슬비 내리는 소리 같은/ 풀벌레들의 식사 소리/ 위대한 화음을 이루고 있었다/ 스르르 삭 스르르 삭/ 스르르 삭 스르르 삭// 하늘이 훤하게 뚫렸다/ 계곡 물 위 벌레똥 떨어지는 소리/ 청솔가지 다람쥐 화들짝 놀라 달음친다/ 유월 푸른 숲속 만찬은 그렇게 진행되고 있었다/ 스르르 삭 스르르 삭 산을 오르는 ‘늦은 오후’ ‘칼바위 능선 중턱’에는 숲에서 나고 숲에서 자라는 온갖 종류의 움직임들이 있다. 바람이 흔드는 나뭇가지들, 가지에서 떨어지는 이파리들의 중력, 또한 바위틈에 내려앉는 햇살도 그 울타리 안에 있다. 그런데 시인은 그 움직임들이 내는 소리 중에서 “스르르 삭 스르르 삭”이라는 소리를 듣는다. 문을 여는 소리 같고, 태엽을 감는 소리 같기도 한데, 시인은 “아침 이슬비 내리는 소리”에서 연상하여 “풀벌레들의 식사 소리”로 변형한다. 그 소리는 오르골의 가벼운 단음과 교향악의 무거운 중음이 교차하는 소리다. 담을 넘은 줄장미 한 송이가 길 위에서 대롱거린다/ 탈주범처럼 목숨을 걸고 담을 넘은 저 광기/ 한 곳에 발을 파묻은 순간/ 버려야 했던 꿈들이 어둠을 입고 유목의 꿈을 키웠으리라// 경계를 넘는 일, 바람만이 길이어서/ 뾰족한 마음을 감추고 바람의 손목을 감아 오른다/ 길을 가는 동안/ 얽히고설키며 스스로 만들어가는 죄의 거미줄들/ 천한 문법으로 불온한 자서전을 쓰고 있다// 제 뿌리로부터의 탈출은 혁명이 될 수 없어/ 사람들의 헛손질에 붉은 모가지가 꺾여 시들고 있다 꽃이라는 이유로, 쉽게 화냥기로 요약되고 말 문장들/ 겹겹이 쌓인 울음의 낱장들이 길바닥에 조용히 흩어진다 경상도의 투박한 억양이 밴, 그러나 그 투박함이 부드러움 속에서 절정의 열매를 밀어낼 때의 모습으로 시인은 서 있다. 문장이 문장 속으로 휩쓸려 들어가는 것을 경계하면서도, 휩쓸려 들어가는 그 위태함의 언어로 시인은 서 있다. 시인의 목소리를 들으며 바닥으로 떨어지는 그림자들을 어찌할 줄 모른다. 급격하다는 말은, 꽃이 이파리를 활짝 펼치는 순간을 의미한다. 인간의 눈이 아닌 구름의 눈으로, 혹은 바람의 눈으로 꽃을 볼 때, 그 풍경의 안쪽은 의미로 가득 차고 단단해지는 것이다. 할머니가 불쑥 참외 한 알을 내민다./ 혈관에 이물이 든 기분으로 참외를 만지작거렸다./ 유난히 잡티가 많고 드문드문 멍까지 있는데,/ 겨우 참외 한 알이 나를 홀리기나 할 것인가./ 끝물이 달다는 할머니는 죽을 때가/ 가장 눈이 밝은 법이라고 입심 좋게도 농을 쳤다./ 할머니가 내 입술을 읽은 것이라는 생각에 참외 몇 알을 샀다./ 공연히 참외와 눈을 마주친 탓이기도 하고,/ 바람이 파고든 주름진 손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물끄러미 내 등을 지켜보던 대숲에/ 흥건히 서리가 내리기도 한 저녁/ 먼 곳을 돌아 내 몸으로 흘러온 참외를/ 나는 오래도록 씹었다./ 헛꽃을 피워내듯 새파란 달이 대숲을 지나갔다. ― 박성현 〈참외〉 전문 하지만 객석은 조용하다. 이 시를 낭독하면서 참외를 건네던 할머니를 기억한다. 몇 해 전 봉평에서 며칠 묵은 적이 있다. 봄이 끝나는 유월, 바쁜 일상을 접어두고 잠깐 눈을 붙이고 싶었던 까닭이다. 저물녘의 장터라 기억하는데, 왁자지껄한 시장을 어슬렁거리는 사내에게 어떤 할머니가 불쑥 참외를 내밀었다. 잡티가 많고 드문드문 멍까지 있는 참외를, 참외의 맛을 믿을 수 없어 그냥 지나치는데, 뒤에서 할머니는 끝물을 먹지 않으면 오금을 저릴 것이라는 말을 했다. 농이었지만 허리가 저렸다. 무슨 이유일까. 할머니는 죽을 때가 가장 눈이 밝다는 말을 하는 것일까. 그 말에 홀려 아무 생각 없이 참외를 오천 원어치나 샀다. 그리고 저녁 내내 참외를 먹었다. 참외를 먹는다는 것은 참외를 키운 사람의 삶까지 내 몸에 받아들이는 것이다. 먼 곳을 돌아 내 몸으로 흘러온 참외를 오래도록 씹어야 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가끔 그때의 대숲과 새파란 달이 내 사타구니를 파고드는 꿈을 꾼다. 아직 참외가 내 몸을 흐르는 탓일까. 몸에 군불을 지핀 것처럼 뜨겁다. 긴 어둠을 깬/ 새 아침이/ 구름 속에 홀로 서 있다.// 반쪽 하늘의 아물다가 만 상처를 치유하지 못해/ 쉽게 분노하고 잊어버리는 중증을 반복하면서/ 용서와 화해를 모르고/ 배려와 인정을 나누지 못한 채/ 욕망의 배만 채우느라/ 자신만 내세우며 남을 탓하고/ 동지를 배신하고// 아, 그토록 찾고 싶었던 당신/ 수많은 함성과/ 자유를 향한 숭고한 희생을/ 우리는 벌써 잊었단 말인가// 다만, 당신께 바라는 것은/ 가슴에 맺힌 응어리를 풀어 달라는 것이 아니요,/ 이 땅에 4월과 오월, 그리고 6월을 낳게 한/ 억압과 탐욕의 역사가/ 다시금 되풀이되지 않고/ 동서남북이 하나 되는 하늘을 우러르며/ 그리워하고 보고파 하며 함께 살자는/ 간절한 소망뿐……/ 꼭 그렇게 이루게 하소서! 시가, 시론(詩論)이 말하는 것처럼 기표와 기의의 절대적인 끈을 단절시키는데 그 목적이 있다면, 이 시는 애초부터 의미를 확정하기 때문에 불편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시인은, 시에 대한 이러한 관습 때문에 망설였던 것이다. 그러나 시는 그것이 노래하는 대상을 반드시 갖는다. 대상의 생명과 영혼이 시로 들어올 때, 시는 언어의 사원이 되는 것이다. 바로 그 순간 이 시는 꿈에서 깨어나고, 시인의 목소리에서 더욱 확장된다. 지상에서 남은 일이란 한여름 팔작지붕 홑처마 그늘 따라 옮겨 앉는 일 게으르게 손톱 발톱 깎아 목백일홍 아래 묻고 헛담배 피워 먼 산을 조금 어지럽히는 일 입교당 담벼락에 어리는 흙내 나는 당신을 자주 지우곤 했다// 하나와 둘 혹은 다시 하나가 되는 하회의 이치에 닿으면 당신은 당신으로 흐른다// 삼천 권 고서를 쌓아두고 만대루에서 강학(講學)하는 밤 내 몸은 차고 슬픈 뇌옥 나는 나를 달려나갈 수 없다// 늙은 정인의 이마가 물빛으로 차고 넘칠 즈음 흰 뼈 몇 개로 나는 절연(絶緣)의 문장 속에서 서늘해질 것이다 강물에 목백일홍 꽃잎으로 풀어쓰는 새벽의 늦은 전언 당신을 내려놓는 하심(下心)의 문장들이 다 젖었다 낡고 병든 조선을 살리고자 했던 서애(西厓)의 문장들이 여전히 우리를 서늘하게 하는 병산서원에서 시인은 어떤 꿈을 읽었을까. 조선의 명암이 순간 아스라하고 몽롱하다. 이제 참새에 대하여 이야기할 시간이다/ 떼를 지어 어수선하게 날아다니던 참새들이/ 둥근향나무 속으로/ 스며들었다가 우르르 솟아오른다/ 안개가 숲을 지나듯/ 저녁연기가 탱자울타리를 빠져나가듯/ 초록 바늘잎에 깃 하나 닿지 않는다/ 어느 하늘을 다녀온 것일까/ 참새의 깃털엔 낯선 향기가 묻어 있다/ 떼를 지어 어느 먼 별자리를/ 옮겨놓고 돌아오는 길일지도 모른다/ 사람의 집들 처마에/ 새로운 별이 보이는 때도 이 무렵이다/ 허공에 쌓인 겹겹의 벽을 뚫어/ 새로운 길을 내고 다니는 참새들이/ 갈색 옷을 입은 영혼이 아니면 무엇인가/ 부드러운 안개 입자들,/ 전자의 궤도를 빠져나가는 휘파람,/ 뼈를 지닌 에너지가 아니라면 무엇인가/ 둥근향 나무에 스며드는 참새가 있어/ 그림자 지닌 것이/ 모두 슬픈 건 아니라 말할 수 있으니/ 이제 초월에 대하여 이야기할 시간이다 미시(微視)의 촘촘한 구조물로 세상을 모두 설명하기는 어렵다. 또한 거시(巨視)의 느슨한 윤곽으로 세상을 모두 읽어내기란 쉽지 않다. 바람은 그물에 걸리지 않고, 그림자는 온도를 갖지 않으니 말이다. 1부의 시낭독이 끝나고, 오세영 시인의 낭독과 강연이 시작된다. 초청하고 오래 기다리시게 한 죄를 용서받고자, 건배 제의를 부탁한다. 행사의 절정에 잠시 목을 축이며 쉬어 가자는 의미도 포함된다. 오세영 시인은 단숨에 “아름다운 만남과 시를 위하여”라고 휘몰아친다. 부족한 낭독회에 응하여 오신 손님께 그만큼의 축사는 없을 것이다. 건배한 다음, 우리는 딱딱해진 어깨를 쓰다듬고 자세를 푼다. 시인은 천천히, 그리고 시력(詩歷)의 깊이 속에서, 감춰진 내공을 끌어올리며 시를 낭독하기 시작한다. 농부는
시인은 자작시 낭독 전에 ‘다소 민망하다’고 말한다. 시어의 표면 의미 때문이다. 그러나 낭독이 시작되고, 그 의미의 이면에 그물처럼 펼쳐져 있는 소리의 결들이 출렁거리면서 시인의 말은 겸손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땅이 생명을 쏟아낼 때, 그 어마어마한 에너지를 터트릴 때, 우리는 그 생명의 단독만을 받는 게 아니다. 생명을 키워내고 탐스럽게 만드는 모든 정성 또한 받는 것이다. 생명을 지나는 것은 “삽과 괭이의 그 음탕한 애무”이며 농부의 땀과 “그 황홀한 노동”이다. 그뿐만 아니다. 태양과 달, 바람과 그늘, 구름과 온갖 꿈틀거림이다. 대지가 잠시 전율하는 것은 그 모든 집중이 한순간 터지기 때문이다. 잘 알려진바, 아리스토텔레스는 2,400년 전 《시학》을 통해 문학을 ‘서정시, 서사시, 극시’의 3대 장르로 나누었다. 오늘날 보편적으로 쓰는 문학의 장르 가운데 서정시는 시로, 서사시는 소설로 극시는 희곡으로 진화했다. 하지만 오늘의 문제―서정시에 관한 오해―는 여기서 출발한다. 우리 현대문학의 많은 개념들이 일본에서 차용한 바, 고쳐져야 할 것들이 많다는 것. 특히 교과서에서 사용하는 시의 갈래(내용상의 분류를 의미함)인 ‘서정시’ ‘서사시’ ‘극시’는 고대 그리스의 분류를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오늘날의 정서에 맞지 않다.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출발한 유럽의 경우는, 그것을 현대시에 맞게 적용한다. 시를 ‘찬가(찬송가)’ ‘송가(위대한 영웅을 찬양하는 것)’ ‘소네트(결혼 축시)’ ‘발라드(애정 문제를 중심으로 다룬 시)’ 등으로 분류하는 것이 그 예라 할 수 있다. 이것을 보면, 우리 시의 개념이 얼마나 충분치 못하고 근거가 빈약한가를 알 수 있다. 무척 시사적이다. ‘서정시’를 시의 한 갈래로 보느냐, 아니면 포괄적 개념의 상층부로 보느냐에 따라 시에 대한 이해가 달라진다는 것이다. 서정시를 매우 조야한 의미, 즉 ‘시인 자신의 정서와 사상을 노래한 시’로 인식한다면, 아방가르드 같은 문장을 해체하고 조합하여 의미를 돌출하는 시들은 서정시가 아니게 된다. 시인은 프랑크프루트학파의 거장 ‘아도르노’의 이야기를 통해 다시 개념의 엄격함을 강조한다. 개념은 시선의 틀을 고정하고 그 속에서 질서를 만드는 정신적 행위이기 때문에, 잘못된 개념은 결국 잘못된 세계를 만들 수 있다. 압축해서 말하면 지금의 모든 시는 서정시의 한 유형이다. 예컨대, 20세기 아방가르드 시도 서정시의 한 갈래이다. 서정시란 세계를 주관화하는 태도이다. 세계를 내 안으로 끌어들여서 세계와 대상을 주관화하는 것이다. 다만 주관화의 정도에 있어서 보다 극적이고 보다 강하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지금의 모든 시는 서정시이고, 그 갈래로 다양한 시‘들’이 있는 것이다. 시인의 말대로 ‘서정’이란 정서적이고 정의적인 것이 아니라, “세계를 주관화하는 태도”이다. 다시 말해 시인 자신의 내면으로 받아들인 세계와 대상을, 시인의 문장으로 엮어내는 것이다. 그렇다면 명확하지 않은가. 현대시는 바로 서정시다. 오세영 시인의 강연이 끝나고 3부로 접어든다. 박현수 시인이 재치 있는 입담으로 ‘대화’의 시작을 말한다. 나사로 조여진 자리의 틀이 해산되고, 사람들은 섞인다. 이 낭독회를 후원한 《유심》 의 홍사성 주간도 어느 틈에 자리에 앉아 낭독회의 여운을 즐기고 있다. 참으로 고마우신 분이다. 정리/ 박성현(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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