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시

[스크랩] 홍일표의 좋은 시 찾아 읽기(62) - 생의 진경

문근영 2014. 2. 15. 09:39

 

생의 진경
홍일표의 좋은 시 찾아 읽기(62)
 
홍일표

발자국
 
                        이은봉
 
 삼짇날 지난 남쪽 하늘가, 제비 몇 마리 바람 데불고
지지배배 지지배배, 뛰놀고 있다 달리고 구르고 뒹굴
고……
 
 더런 빨랫줄 위, 사뿐히 내려앉기도 한다
 
 약 오른 바람들, 가끔은 제비들 날개 꼬옥 끌어안고 놓
지 않는다 그러면 제비들, 대각선 길게 그으며 휘이익,
빠져 달아난다
 
 남쪽 하늘가 어디, 발자국 하나 없다
 
 
# 솔직하게 말하자. 재미없이 지루하게 이어지는 사설을 시라고 우기는, 그럴듯한 언어의 위장막을 걷어내면 빈 콩깍지만도 못한 가짜시들. 결국 사유의 빈곤을 감추기 위한 생쑈였던 것. 순진한 독자들은 그래도 뭔가 있겠지. 하다못해 시의 리듬이나 분위기라도. 그런 기대를 하면서 시를 읽는 것. 그런데 아닌 것. 그래서 기분이 고약해지는 것. 농락당한 것. 간혹 그 와중에 좋은 시도 더러 있긴 하지만 아닌 것은 끝까지 아닌 것. 오늘 만난 시는 그런 혐의에서 자유로운 물찬 제비 같은 시.

 몸이 날렵한 한 편의 잘 생긴 시를 만났다. 주체의 시선에 포착된 사물은 한 마리의 제비. 군더더기 없이 명쾌하고 청명한 가을하늘처럼 몸이 가볍다. 1, 2연의 ‘제비’는 대자유인의 초상이다. ‘달리고 구르고 뒹굴고’ 무한천공을 마음껏 날아다니는 ‘제비’는 아름다운 지향의 대상이다. 화자의 시선은 제비의 매혹적인 몸짓에 홀려 있다. ‘홀림’은 경계와 구분을 넘는 것이고, 상투화된 일상으로부터의 탈주이다. 

 그리하여 ‘약 오른 바람’은 다름 아닌 화자이며 동시에 일상의 남루한 욕망이고 질서이다. 제비는 ‘대각선 길게 그으며’ 삶의 질곡을 경쾌하게 빠져나간다. 지리멸렬하고 비루한 일상에서 상큼하게 빠져나온 제비. 한 순간 존재의 비약이 이루어진 그 자리 어디에도 ‘발자국’은 없다. 비로소 완전한 존재의 해방이 구현되는 순간이다. 온갖 욕구와 결핍의 폭정에서 벗어나 잠정적 열반에 도달하는 희열의 찰나인 것이다.

 ‘발자국’은 삶의 흔적이지만 무쇠덩어리로 만들어진 족쇄이다. 그로 인해 삶은 한없이 무거워지고 결국 무한천공을 날 수 없게 하는 것. 그리하여 제비는 발자국을 남기지 않고 홀연히 사라져 태허의 씨앗이 되고 원소가 된다.

  이 시는 명쾌하게 생의 진경을 열어 보여준다. 발자국에 연연하지 않는 시인만이 일구어낼 수 있는 아름답고 산뜻한 풍경이다. 오늘도 남쪽 하늘 어디엔가는 제비의 날갯짓이 유려한 무늬로 일렁이고 있을 터. 
 

 
홍일표 편집위원
 
(1992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전문지 『시로 여는 세상』 주간)

 

 

-'문화저널 21'에서

출처 : 시하늘
글쓴이 : 보리향(菩提香)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