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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언어 미학의 극지 - 홍일표의 좋은 시 찾아 읽기(66)

문근영 2014. 2. 4. 11:03

 

언어 미학의 극지
홍일표의 좋은 시 찾아 읽기(66)
 
홍일표


                                        오태환
 

다슬기 다슬다슬 물풀을 갉고 난 뒤 
젖몽우리 생겨 젖앓이하듯 하얀 蓮몽우리 두근두근 돋고 난 뒤 
소금쟁이 한 쌍 가갸거겨 가갸거겨 
순 草書로 물낯을 쓰고 난 뒤 
아침날빛도 따라서 반짝반짝 물낯을 쓰고 난 뒤 
검정물방게 뒷다리를 저어 화살촉같이 쏘고 난 뒤 
그 옆에 짚오리 같은 게아재비가 아재비아재비 하며 부들 틈새에 서리고 난 뒤 
물장군도 물자라도 지네들끼리 물비린내 자글자글 産卵하고 난 뒤 
버들치도 올챙이도 요리조리 아가미 발딱이며 해찰하고 난 뒤 
명주실잠자리 대롱대롱 交尾하고 난 뒤 
해무리 환하게 걸고 해무리처럼 交尾하고 난 뒤 
기슭어귀 물달개비 물빛 꽃잎들이 떼로 찌끌어지고 난 뒤  
螺銓 같은 풀이슬 한 방울 퐁당! 떨어져 맨하늘이 부르르르 소름끼치고 난 뒤 
민숭달팽이 함초롬히 털며 긴 돌그늘, 얼핏 
아주 쬐끄만, 고요가 어슴푸레 눈을 켜고 난 뒤 
 
 
# 시단에서 오태환 시인만큼 국어를 능란하고 유려하게 구사하는 시인이 없다. 단연 독보적인 경지에 올라 거침없이 시어의 원융한 세계를 열어 보이고 있으며 근래에 발표하고 있는 작품들에서 농익은 그 장기는 더욱 빛을 발하고 있다. 어찌 보면 오태환 시인의 언어는 인간문화재급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부분의 시인들이 언어를 하나의 자족적 수단으로만 여기고 있을 때 그는 언어의 무늬와 결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고 우리말에 대한 남다른 애정으로 언어의 미감을 도드라지게 하고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어 신생의 언어로 거듭나게 한다. 그러나 그는 고답주의자도 국수주의자도 아니다. 오히려 표준어라는 미명 하에 획일적이고 경직된 언어 관습을 고수하고 있는 문법주의자들을 비판하고 있으며 사투리도 표준어에서 제외시켜 고사시켜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시인이다.

 텍스트의 의미 구조에 집착하여 그 지점에서 한 발자국도 더 나아가지 못하는 시비평의 문제도 지적한 바 있다. 시의 완성도는 어느 한 가지 요소로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요소의 총체로 어우러지는 것이다. 의미, 구조, 운율, 분위기, 시적 어조, 이미지의 운용 등이 시의 완성도에 기여하는 중요한 요소들이다. 이 가운데 단지 의미에만 초점을 맞춘 비평이라면 그것은 매우 협소한 감식안인 것이다.

 오태환 시인은 ‘늪’에서 언어의 공교한 솜씨를 한 땀 한 땀 발휘하여 생명의 아름다운 향연의 자리를 풍성하게 펼쳐 보여준다. 요즈음 우리 시단에서 볼 수 없는 희귀한 시의 영역이라 할 수 있다. 그 대상은 늪의 풍경이지만 바느질하듯 엮어나가는 말부림의 솜씨는 이미 경지에 이르렀고, 언어에 실린 서정의 숨결은 금방이라도 손끝을 적실 듯 섬세하고 영롱하여 눈이 부시다. 일부 한자의 사용이 시읽기의 방해 요소로 작용하지만 ‘젖몽우리 생겨 젖앓이하듯 하얀 蓮몽우리 두근두근 돋고 난 뒤’ 나 ‘해무리 환하게 걸고 해무리처럼 교미하고 난 뒤’ 의 명료한 풍경의 여진을 보라. 그 긴 여운이 다슬기, 소금쟁이, 검정물방게, 게아재비, 물자라, 버들치, 올챙이, 명주실잠자리 등과 어울려 경계 없는 생명의 장을 이루고, ‘아주 쬐끄만, 고요가 어슴푸레 눈을 켜고 난 뒤’의 국면에 이를 때까지 연쇄적 고리를 형성하면서 리듬에 따라 다양한 울림과 파문으로 번져간다. 또한 매 행의 ‘〜뒤’에 이어 새롭게 열리는 상상의 공간은 크고 활원하여 시적 감흥을 한껏 고조시킨다.

 시의 언어는 단순한 의사소통의 언어와는 다르다. 무한한 확장 능력과 울림, 마력을 갖는 것이 시의 언어다. 그러한 특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시가 바로 ‘늪’이다. 고전적 교양과 유현한 사유를 거느리고 있는 그의 산문도 발군이지만 시 또한 새로운 지평을 향해 나아가고 있어 앞으로의 시인의 행보가 자못 궁금하다. 




홍일표 편집위원
 
(1992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전문지 『시로 여는 세상』 주간)  

 

-'문화저널21'에서



출처 : 시하늘
글쓴이 : 보리향(菩提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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