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연(奇緣)
이창수
눈 덮인 무덤에 손자국이 나 있다
지상에서 가장 아득한 높이에
자리 잡은 봉분 위
따뜻한 손가락이 녹고 있을 때
선연한 무엇이 이마에 와 닿는다
저기 무어라 할까
이울어진 목울음으로만 흐르는
애잔한 강바람 소리라고나 할까
산그늘 배웅해주는
치맛자락 스치는 소리라고나 할까
무덤 위의 두 손 맞잡아 들이는
이 마음을 무어라 부를까
- 이창수 시집, 『귓속에서 운다』(실천문학사/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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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 위의 두 손 맞잡아 들이는 마음이라니!
-이창수 시인의 詩 , 「기연(奇緣)」을 읽고
박완호
새로 나온 시집의 첫 페이지를 펼쳐 읽다가 나도 모르게 그만 붙들고 있던 마음자락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정말 오랜만에 만나는 아름다운 시입니다. 그냥 아름답다는 말 말고는 다른 말이 생각나지 않는 시 한 편을 만났습니다.
이창수 시인의 두 번째 시집 『귓속에서 울다』의 첫 페이지에 실린 「기연(奇緣)」이라는 시를 읽는 동안 나는 백곡저수지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산자락에 솟은 작은 무덤 앞에 서 있는 나를 발견합니다.
뒤로 굴러가는 바퀴처럼, 세월이 거꾸로 흘러갑니다. 삼십 년도 넘는 까마득한 기억 속으로 나를 데려가더니, 다시 천천히 오늘을 향해 시계바늘을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눈 덮인 무덤에 손자국이 나” 있습니다. 어느 겨울이었을까요. 모진 눈바람 속을 걸어 산중에 다다른 아버지의 손바닥이었을까요. 아니면 아버지가 다녀간 발자국을 한발 한발 짚어가며 걸어온 나의 손바닥이었을까요. 무덤에 누운 이를 조금이라도 더 느끼고 싶어 하는 간절함을 어떻게 헤아릴 수 있을까요.
세상에! “지상에서 가장 아득한 높이에/ 자리 잡은 봉분 위”에서 녹고 있는 “따뜻한 손가락”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시인이라니요. 그가 이마에 와 닿는 “선연한 무엇”을 느끼는 그 순간 이 세상에는 더없이 아름다운 한 편의 시가 태어납니다.
나는 그의 시선이 움직이는 동선을 따라 백곡의 물길과 산자락을 끼고 나 있는 길을 천천히 걸어갑니다. 내 발길이 다다른 곳에는 작은 봉분이 하나 솟아 있습니다. 그해 겨울 이곳을 찾아와 무덤에 지워지지 않는 손자국을 남겼을 아버지가 어머니와 함께 나란히 누워 있는 봉분 속에서는 두 분이 나누시는 은밀한 이야기들이 들려오는 것도 같습니다. 발뒤꿈치를 들지 않아도 정수리가 훤히 들여다보일 만큼 낮은 봉분이지만, 이 시인의 말처럼 저곳이야말로 지상에서 가장 아득한 높이일 것입니다. 아무리 오르려 해도 가 닿을 수 없는 그곳을 나는 얼마나 많이 꿈꾸었던가요. 그 절망감이, 그 그리움이 바로 한 명의 시인을 세상에 태어나게 한 것이겠지요.
“이울어진 목울음으로만 흐르는/ 애잔한 강바람 소리”, “산그늘 배웅해주는/ 치맛자락 스치는 소리”에 한순간 우주 구석구석이 환해지는 것을 느낍니다. 울음 한 조각이 시나브로 허공을 붉게 물들이기 시작합니다. 당신을 따라 “무덤 위의 두 손 맞잡아 들이는/ 마음을”, 이 황홀한 심정을 어떻게 불러야 할까요. 아버지.
-계간 [주변인과 시] 2011년 여름호
-http://blog.naver.com/parkwanho/20103240063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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