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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홍일표의 좋은 시 찾아 읽기 (72) - 낯선 풍자의 힘

문근영 2014. 1. 26. 15:54

 

낯선 풍자의 힘
홍일표의 좋은 시 찾아 읽기(72)
 
홍일표
머리를 빡빡 민
임희구
 
머리를 빡빡 민 옷은 스님인데 표정이나 행동은 깍두기 같은 한 무리의 졸개들이 행사장 무대에서 출구 쪽으로 쭉 늘어선다
 
풍채 좋은 오늘의 왕초인 듯한 통통한 스님이 무대 앞쪽에서 출구 쪽으로 걸어나오신다
 
머리를 빡빡 민 옷은 스님인데 표정이나 행동은 깍두기 같은 한 무리의 졸개들의 호위를 받으며 스타 연예인처럼 짱짱한 주먹처럼
 
폼 나고 절도 있게 신속하고 무게 있게 걸어 나오신다 이 땅엔 예수나 석가가 내다버린 부와 권세를 틀어쥔 근엄한 왕초들이 있다
그들을 안전하게 모셔야 하는
 
머리를 빡빡 민 옷은 스님인데 표정이나 행동은 깍두기 같은 한 무리의 졸개들이 있다 그 아래 슬금슬금 길을 비켜줘야 하는
 
뭇 중생들, 부처는 납작 엎드려 긴다

 
# 모처럼 재미있는 시를 만났다.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풍자가 살아있는 시, 바로 임희구의 솜씨였다. 우연히 시인을 알게 됐고, 모 문학 행사장에서 그의 시 ‘김씨’를 눈을 빛내면서 읽은 적이 있다. 현실과 정면 대응하는 시들이 갖는 경직된 시선이 그의 시에는 없었다. 지상의 삶에 충실하면서도 편향된 시각, 일방통행식 논리에 함몰되지 않은 임희구의 시가 색다르게 보인 이유였다. 한동안 시의 정치성에 대한 논란이 제기되었을 때도 그의 시는  눈에 띄지 않았다.

 이 시에는 스님이 등장한다. 선승도 학승도 아닌 권승 쯤 되는 모양이다. 그 주변에는 ‘깍두기 같은 한 무리의 졸개들’이 있다. 성직자를 한낱 뒷골목의 양아치나 조폭으로 비하하는 풍자의 시선이 은근하면서도 매섭다. 1연부터 3연까지는 왕초 스님의 거동을 반복적으로 묘사한다. 여기서 이미 시의 의도는 들통이 났다. 그런데도 독자를 끌어들이는 흡입력이 만만치 않다. ‘예수나 석가가 내다버린 부와 권세를 틀어쥔 근엄한 왕초들’의 뒤쪽 풍경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예수나 석가모니가 버린 ‘부와 권세’에 목매고 사는 성직자들과 그 주변의 졸개들까지 비판의 대상이 되면서 시의 시위는 팽팽하게 조여진다.

 ‘머리를 빡빡 민 옷은 스님인데 표정이나 행동은 깍두기 같은’ 비승비속(非僧非俗)의 졸개들에게 ‘슬금슬금 길을 비켜줘야 하는’ 것은 다름 아닌 ‘뭇 중생들’인 것이다. 중생들에게 군림하고 위세를 부리는 성직자들에 대한 풍자와 왜곡된 현실에 대한 비판이 이 시의 핵심이다. 정작 부처인 중생은 납작 엎드려 가고, 현실의 이욕에 눈 먼 성직자는 폼 나게 거동하는, 섬겨야 할 대상이 오히려 섬김을 받으며 행세하는 모습은 전도된 현실의 씁쓸한 풍경이다.

 이 시에서 목청 높이지 않고 슬쩍슬쩍 잔 펀치를 날리면서 대상의 실체를 드러내는 익살스런 세태 풍자가 성공한 것은 현실과의 적당한 거리 때문이다. 거리 조절에 실패한 시들이 노출하는 조급성과 완고함을 극복한 것이 이 시의 미덕이다.

 요즈음 지면에는 성형미인 같은 시들이 넘쳐난다. 잘 쓴 시인데 감동도 새로움도 없는 고만고만한 시들에 식상한 독자들에게 임희구의 시는 새로운 자극이 될 것이다. 개인데 개 같지 않고, 말인데 말 같지 않은 그런 시들이 그리운 계절이다.
 

홍일표 편집위원
 
(1992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전문지 『시로 여는 세상』 주간)

 

 

-'문화저널21'에서

출처 : 시하늘
글쓴이 : 보리향(菩提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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