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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이은봉 작품론 - ‘각자(各自, 刻字, 覺者)’의 시학 / 김수이

문근영 2014. 1. 26. 15:54

 

‘각자(各自, 刻字, 覺者)’의 시학 / 김수이
[53호] 2011년 11월 10일 (목) 김수이 시인

1. 시인은 ‘각자’다

이은봉에 의하면, 시인은 ‘각자’다. 각자이며, 각자여야 한다. 무엇보다 이은봉은 적극적으로 각자의 시인이 되고자 한다. 그는 아예 자신의 호를 ‘각자’로 정해 놓고 있다. “스스로 호(號) 하여, 각자 이(李) 선생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 동구 밖, 오래된 느티나무의 모습으로 살고 싶은, 그렇게 묵묵히 젊은 느티나무가 있다”(〈젊은 느티나무〉 《내 몸에는 달이 살고 있다》 창비, 2002) 시인 이은봉의 극화된 캐릭터임에 틀림없는 ‘각자 이 선생’은 오래되었으면서도 젊은, 육중하면서도 생기 넘치는, 묵묵하면서도 너그러운 품성을 지닌 것으로 유추된다.

 자연스러움과 온유함과 순박함을 지녔으며, 바로 그 본성에 의거하여 세상의 소음과 폭력에 맞서는 사람. 각자 이 선생은 이은봉의 시세계에 자생하는, 해학적 핍진성이 도드라지는 인물로서, 현대시인의 기꺼운 존재방식의 하나를 선명히 보여준다. 당위의 세계와 부스러진 현실 사이에서 어쩔 수 없이 분열하는, 그럼에도 자신의 ‘한심한’ 실상을 포기할 생각이 조금도 없는.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그가 열애하고 있는 것이 “서정시 나부랭이”거나 흘러간 “뽕짝가락”이라 할지라도.
(이미 철 지난 사내, 지금은 아무도 읽지 않는
서정시 나부랭이나 쓰고 있는
참 한심한 각자 선생을 나는 알고 있다
접는 의자에 앉아
아직도 뽕짝가락 따위 흥얼거리고 있는)

깨어진 창틈으로 머리통 자꾸 디밀고 있는, 날벌레여 세월 너무 지겨워 단 하루 만에 생명 탁 놓아버리는, 영겁이여.
―〈바윗덩어리라면!〉 부분(《책바위》 천년의시작, 2008)

“이미 철 지난 사내”인 각자 선생의 입장에서는, 이를테면 ‘영겁’이라는 무한 범주의 말을 시에 쓰기 위해서는 약간의 불온하고 삐딱한 뉘앙스를 사용해야 한다. 각자 선생에게 ‘영겁’은 온갖 종류의 불가능성을 함축하면서, 그의 무모한 행위와 옹색한 처지를 분명히 확인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 영겁이 조그마한 ‘날벌레’가 단 하루 만에 성취하기도 하는 것이라면, 그 앞에서 각자 선생의 기묘한 웃음과 절망의 농도는 한층 짙어질 수밖에 없다.

이은봉을 “흥취의 시인”(황현산)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그 흥취의 적지 않은 부분이 “깨어진 창틈”의 현실과 ‘영겁’ 사이에서 헤아릴 수 없는 근본적인 곤혹에 처한 그의 자기 극복의 일환이라는 점에 기인한다. 예를 들어, 각자 선생이 활활 타오르는 세계의 용광로 불길 속을 지나기 위해 “기껏 종이비행기를 타고” 호기롭게 내달리는 장면은 그 극복의 과정이 지난하면서도, 일견 냉철한 자의식에 의해 떠받쳐지고 있음을 알게 한다.

어떤 식으로든 세계를 돌파하는 순간의 각자 선생이란, 바로 그 세계에 의해 힘이 꺾이고 있고 심지어 모멸당하고 있는 중이라는 사실. 이은봉 특유의 고전적인 해학과 비극적인 유머는 이 점을 끊임없이 직시하는 냉엄한 현실인식으로부터 발생한다. 이은봉의 해학과 유머의 동력원으로서 비판적인 사유의 대상은 자신을 제외한 세계가 아니라, 자신을 남김없이 포함한 세계인 것이다.

맨드라미 붉은 꽃술로 되살아나기는 하더라도 너무 딱해라 이 사람 각자 선생! 기껏 종이비행기를 타고 활활 타오르는 용광로 불길 속 내달리다니!

시간을 끌고 다니며 서편 하늘로 지고 있는 낮달, 각자 선생 향해 혀 끌끌 차며 웃고 있네.
―〈종이호랑이를 타고〉 부분(《책바위》) 

이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서글픈 자기 희화가 현대 시인이 처한 갖은 난경을 살아내는 필사적인 방법론의 하나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중에서도 각자 선생이 자본주의의 무례하고 일방적인 공습에 대처하는 방식은, 해학과 유머로 덮어쓰기 한 이은봉 특유의 비판과 저항이 어떻게 실행되고 있는지를 목도하게 한다. 

시인 이각자 선생, 여섯 달 만에, 참 오랜만에 시 두 편 팔았다 처음으로 현금하고 맞바꿨다 육만원 받았다 흐뭇했다 ‘아싸 호랑나비’하는 마음 있었다

이각자 선생, 그 마음으로 만원은 떼어 두어 권 신간 시집 샀고, 나머지 오만원은, 과감하게 여섯 달째 잠수함 타는, 친구 놈에게 보냈다 그 머저리 같은, 대책 없는 룸펜 프롤레타리아에게

그러고는 ‘아싸 호랑나비’하는 마음으로 ‘아싸 짜잘쿠나’하는 마음, 덮어씌워 버렸다 그 마음에 매달려, 그 마음 자꾸 격려했다 기렸다 추켜세웠다 어휴 참, 시인 이각자 선생이라니…….
―〈어떤 소시민〉  전문(《절망은 어깨동무를 하고》 신어림, 1994)

여섯 달 만에 시 두 편 값으로 받은 원고료 육만 원. 시인 이각자 선생이 이 돈을 쓴 용도는 두 가지다. 하나는 시집 구입, 또 하나는 대책 없는 룸펜 프롤레타리아인 친구 놈에게 보내기. 시를 푸대접하는 자본의 조악한 체제 속에서 시로 벌어들인 ‘뜨거운 감자’와도 같은 돈을 그 자본의 논리를 거스르는 용도로 사용하는 것. 시인 이각자 선생은 그러한 자신에 대해 논평하는 것 또한 잊지 않는다.

“‘아싸 호랑나비’하는 마음으로 ‘아싸 짜잘쿠나’하는 마음, 덮어씌워 버렸다 그 마음에 매달려, 그 마음 자꾸 격려했다 기렸다 추켜세웠다”.
현재 등단 30년을 바라보고 있는 이은봉은 지금까지 《좋은 세상》 《봄 여름 가을 겨울》 《절망은 어깨동무를 하고》 《무엇이 너를 키우니》 《내 몸에는 달이 살고 있다》 《길은 당나귀를 타고》 《책바위》 등 일곱 권의 시집을 펴냈다. 리얼리즘, 자연 서정시, 생태시, 선시 등의 반경을 시대·사회의 굴곡과 함께 넘나들어 온 이은봉의 시세계는 한마디로 ‘각자의 시학’이라고 이름 붙일 만한 것이다.

실제로 그가 ‘각자 선생’을 자처하고 있기도 하거니와 정치, 사회, 경제, 자연 등 현실의 다양한 국면을 관통해온 이은봉 시의 실질적인 창작자이자 발화자는 다름 아닌 ‘각자―시인(들)’이기 때문이다. 이제 그 ‘각자―시인(들)’의 내적·외적 공생기를 살펴볼 차례이다.   


2. 각자―시인(들)의 공생기

이은봉이 ‘시인’의 정체성이자 애칭, 동시에 자신의 별칭으로 삼은 ‘각자’는 여러 가지 의미를 포괄한다. 해석의 층이 두터운 동음다의어로서 ‘각자’는 우리 시대 시인이 수행해야 할 다양한 역할을 피력한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이은봉의 시는 현실의 모순에 민감하게 대응하면서 다채로운 역할을 치열하게 이행하고자 하는 한 정직한 시인의 보고서이자 고백록의 성격을 지닌다.

 “내 안에도 남들처럼 여러 놈의 내가 살고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을 때는 잠시 혼란스러웠다// (……) //시간의 불수레를 타고 종종대며 달려가다 보면 더러는 꽤 괜찮은 나를 만날 때도 있기는 했다.”(〈내 안의 외뿔소〉 《책바위》) “내 안의 각자 선생”(〈묵언의 밤〉 《길은 당나귀를 타고》 실천문학사, 2005)은 이 여러 명의 ‘나’들이 모여 이룬 자아―공동체 혹은 공동체―자아라고 할 수 있다. ‘나’라는 자아―공동체/공동체―자아로서 ‘각자―시인’은 크게 세 가지 층위로 구성되어 있다.

먼저, 각자(各自)―시인. 사전적으로 “각각의 자기 자신” “각각의 사람이 따로따로”의 두 가지 뜻을 지닌 각자(各自)는 시인이 본질적으로 단독자이며 독립자여야 함을 환기한다. 단독자·독립자로서 ‘각자(各自)’의 위상은 그것이 근대문명이 호들갑스럽게 부각시키면서도 실은 뿌리 깊이 부정해온 대상이었다는 점에서 역설적으로 드러난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오직 자신의 유지에만 관심이 있는 비민주적 정권이 최후까지 억압하는 것은 단독자·독립자로서 개인이며, 모든 인간적인 가치를 말살하는 자본주의가 원천적으로 봉쇄하고 억압하는 것 또한 단독자·독립자로서의 개인이다.

각각의 자기 자신인 ‘각자(各自)’는 이은봉이 1980년대의 파행적인 정치의 시대를 격렬하게 통과할 때는 리얼리즘 시의 근거(‘주체’)가 되었고, 1990년대 이후 갈수록 심화되는 자본주의의 횡포와 생태 위기에 직면해서는 리얼리즘 시와 생태시가 공존할 수 있는 토대(‘주체’이자 ‘자아’이며 그 자아를 기꺼이 철회할 의사가 있는 ‘초(超)자아’이기도 한)가 되었다. 더불어 반(反)자연, 반(反)생명, 몰(沒)인간의 자기파괴적인 현대적 삶에 맞서서는 자연과 우주의 섭리에 순응하는 선시 지향의 자연친화적인 시들의 뿌리[타자와의 합일을 통해 도달하는 ‘몰아’ 혹은 ‘비아(非我)’]가 되어주기도 하였다.

그러니까 이은봉은 사람들을 조각나고 고립된 각자(各者)들로 만드는 근대문명과 그 독특하게 일그러진 한국적 현실에 저항해, 온전한 ‘각자(各自)’로서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 분투해온 것이다.(이은봉에게는 이것이 진정한 시인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길과 그대로 일치하였다.) 이 명제는 역으로도 그대로 성립되는데, 두 가지 항목이 선후관계가 뚜렷이 없이 하나로 얽혀 있는 까닭이다. 이은봉이 특히 자본을 향해 날카로운 비판의 날을 벼리는 것은 ‘이념의 시대’로 불리며 혁명의 가능성으로 불타올랐던 1980년대와 그 이후의 시대를 연결하는 역사적 문제의식의 소산이기도 하다.

 “어디서든 사납게 발톱 세우는 놈, 아무거나 함부로 그렇게 물어뜯는 놈, 물어뜯으며 마구 피 뿌리는 놈”(〈유령들 ―자본〉 《길은 당나귀를 타고》), “발전소여 고무풍선처럼 부풀어오르기만 하는, 자본주의여.”(〈발전소 ―서울〉 《길은 당나귀를 타고》) “달리는 자본주의여 피를 흘리며 끝내 강물 위에 다리를 놓는 이데올로기여!”(〈달리는 핵폭탄〉 《책바위》) 이은봉은 ‘각자(各自)―시인’을 부정하는 현실의 갖가지 위협에 온몸으로 대항하며 일관된 삶의 자세를 견지해온 것이다. 어쩌다 이은봉이 자신을 만신창이로 만드는 현실에 기진맥진해 있을 때는 득달같이 “내 안의 각자선생이 달려나온”다. 각자―시인은 자신의 내부의 또 다른 각자를 통해 무도한 세계의 칼날을 끝내 견디고 이겨내는 것이다. “어느덧 가슴 속 깊이 자작나무 한 그루 저 혼자 숲을 이루”는 아름다운 기적은 이렇게 하여 일어난다.
 
평생 부엉이 울음소리와 함께 살아도 좋다, 하고 어금니를 깨무는 동안, 성한 곳 하나 없는 몸, 만신창이

끝내 견뎌내지 못하고 내 안의 각자선생이 달려나와, 만신창이 몸 훌쩍 어깨에 들쳐 멘다

  (……)

각자선생이 곁에 있는 한, 번쩍 빛을 발하며, 칼날들 몸 속 지나가도 좋다, 하며 상처투성이의 시간이 저 혼자 중얼거린다

이윽고 칼날들, 찢겨진 날개에 추락하는 소리 들린다.
―〈묵언의 밤〉 부분(《길은 당나귀를 타고》)

내 가슴에 모욕을 만들고, 수치를 만들고, 설움을 만든 것들…… 실은 그것들도 자본이라는 공장의 몇 장 벽돌에 불과했다
  (……)
어쩌다 보니 내 마음도 강물에 빠져 출렁이며 흘러가고 있었다 그날의 모욕, 그날의 수치, 그날의 설움…… 기억조차 못할 것 같았다
어느덧 가슴 속 깊이 자작나무 한 그루 저 혼자 숲을 이루고 있었다.
―〈망각의 자작나무〉 부분(《책바위》)

자작나무 한 그루가 저 혼자 숲을 이룬 내면의 소유자 각자―시인이 자연을 대대적으로 학살하는 현대문명의 횡포를 그냥 지나칠 리는 없다. 이은봉이 생태시로 나아간 것은 자연스럽고 응당한 귀결이었다. “저 혼자/ 가죽구두 벗어든 채 죽은 바다 두드려 깨우고 있”는 각자 선생은 살해당한 자연의 현장을 혼자서라도 배회하면서 자연의 파수꾼을 자임한다.

이은봉에게 생태시는 자연의 만물 각자의 독생 및 공생의 정당성과 그것을 성취하기 위한 노력을 의미한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각자―시인 이은봉은 최대한 각자(各自)로서 살아가고자 하며, 자신을 둘러싼 세상 만물을 저마다의 각자(各自)로서 인정하고 존중하는 가운데 시를 쓰고 있는 것이다.

바다는 아예 제정신 잃어버렸다
이미 제 숨결 놓아버렸다
  (……)
한바탕 시궁창 냄새가 일고
녹슨 포크레인 삽날 몇 개
까맣게 이빨 벌리고 있는 바다
가, 저 혼자 차갑게, 하늘 물어뜯고 있었다
거기 갯가 모퉁이 어슬렁거리고 있는 뜻밖의 사내
는, 각자 선생이다 각자 선생이 저 혼자
가죽구두 벗어든 채 죽은 바다 두드려 깨우고 있었다
―〈바다 2 ―톱머리〉 부분(《내 몸에는 달이 살고 있다》 창비, 2002)

두 번째로, 각자(刻字)―시인. 각자(刻字)는 “글자를 새김. 또는 새긴 글자”를 의미한다. 이때 시인의 임무는 세계의 도처에 편재하는 각자의 문맥을 해독하여 풍부하고 새롭게 풀어내는 것이다. 이은봉이 즐겨 읽어내는 각자(刻字)의 텍스트는 ‘바위’이다.

바위는 제 몸에 낡고 오래된 책을 숨기고 있다
  (……)
지금은 일실된 옛 글자로 씌어진 이 책을 읽기 위해서는 자꾸만 더듬거릴 수밖에 없다
홍당무처럼 낯을 붉히는 참식나무들의 마른 잎사귀들이나 귓가에 다가와 글자들의 뜻을 겨우 속삭여 주기 때문이다
더러는 멧새들이 날아와 하나씩 글자들을 짚어 가며 재잘재잘 뜻을 설명해줄 때도 있다
―〈책바위〉 부분(《책바위》)

바위는 주둥이 꽉 다물고 있다 끈질긴 인내심으로
제 마음 검붉게 달구고 있는 무쇠덩어리
춘삼월 새파란 욕망의 혓바닥까지
바위는 꽈악, 끌어안고 녹여버리고 있다
바위는 그렇게 모든 생명들의 꿈……
제 속으로 철없는 손오공 키우고 있다
온갖 정성으로 빚은 사랑을 먹고
훌륭하게 장성한 손오공
근육질의 구릿빛 어깨 빛내며
마침내 法 구하기 위해
늠름히 서역으로 출발할 때까진
바위는 별별 서러움, 안으로 찍어누르고 있다
―〈바위의 길〉 부분(《내 몸에는 달이 살고 있다》)

이은봉은 바위를 바위책, 책바위라고 명명하는데, 이는 자신이 궁구하는 ‘바위’가 “제 몸에 낡고 오래된 책을 숨기고 있”는 대자연의 섭리의 집약적 상징임을 말하기 위해서이다. 즉 바위는 그 자체로 자연과 우주의 각자(刻字)이다. 이 각자를 읽어내기 위해서는 시인은 “자꾸만 더듬거릴 수밖에 없”으며, 바위의 친척들인 나무와 새들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각자(刻字)―시인은 하나의 ‘거대한 책’으로서 자연을 읽어내는 자이자, 그 독해의 경험을 바탕으로 자신의 언어들을 시에 새겨넣는 자이기도 하다. 그러나 각자(刻字)―시인 이은봉의 해독의 대상은 자연에 한정되지 않는다. 이은봉은 생활세계의 곳곳에서 읽어내야 할 각자(刻字)들을 발견한다. 사람들이 매일 아침저녁으로 사용하는 ‘비누’가 한 예가 된다. “비누: 나는 시인가? 마음 더러워지면 못 견디는 사람들, 아침저녁으로 읽고는 하는…… 읽고 나면 마음 가벼워지지”(〈시와 비누〉 《책바위》)

바위책 혹은 책바위를 열고 들어가 그 속에 쓰인 “신의 섭리”(〈선(善)에 대하여〉 《내 몸에는 달이 살고 있다》)로서 각자(刻字)를 읽어내고자 하는 이은봉은 외부세계의 겹들과 내부세계의 겹들을 함께 바라보는 시선을 지니고 있다. 이는 각자―시인이 다양한 층위의 존재 양상을 갖고 있으며, 자신의 안과 밖으로 분열하는 것과 같은 선상에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은봉이 이처럼 열렬히 분산되는 자신을, ‘법(法)’을 구하기 위해 서역으로 떠나는 손오공과 동일시하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이로부터 각자―시인의 세 번째 의미망이 갈라져 나온다.

세 번째로, 각자(覺者)―시인. 각자(覺者)는 ‘부처’의 다른 이름이며, 깨닫기 위한 수행을 마치고 자신의 깨달음으로 남을 깨닫게 하는 사람이다. 또한 우주와 인생의 진리를 깨달아서 모든 의혹과 번뇌를 버리고 마음의 안정을 찾은 사람이기도 하다. 따라서 각자(覺者)―시인은 정확히는 각자(覺者)를 흠모하고 지향하는 시인이라고 하는 것이 옳다. 각자(覺者)―시인에게 현실은 힘겨운 고행을 통해 가로질러가야 할 ‘제석사막’(〈제석사막〉 《책바위》)이다.

그런데 제석사막은 집 바깥의 외부세계에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고향집 뜰 안 살구나무 그늘 밑”도 제석사막의 한 지점이다. 깨달음이 ‘나’의 바깥, 어디 멀리서 오는 것이 아닌 이치와 여일하다. 고향집 뜰 안 살구나무 그늘 밑에서 “시(詩)와 선(善)이 하나라고?”라는 화두를 들고, “나다 아니다 각자 선생이다 아니다 점차 몽롱해지는 사이,” 깨달음은 불현듯 찾아온다. “나는 없네 나를 털어 바친/ 매화원, 꽃송이들만 앞다투어 피고 있네// 보게나 꽃송이들로/ 피어나는 나일세// 꿀벌들, 윙윙대는 날갯짓도/ 때로는 나인 적 있네”(〈매화원에서〉 《책바위》)

고향집 뜰 안 살구나무 그늘 밑이다 모처럼 가부좌를 틀고 눈 감아본다 무엇 하나 떠오르지 않는다 詩와 善이 하나라고? 무거워진 머리통 자꾸 흔들린다 초여름 햇볕 밝고, 풀숲 우거지고, 재잘대는 새소리, 수돗물소리……

반시간도 지나지 않아 의문이 온다 손깍지 베개를 하고 아스라이 누워 있는 저 사람은 누구인가? 나다 아니다 각자 선생이다 아니다 점차 몽롱해지는 사이, 멀리 자동차 소리 들려온다 조카애들 까불대는 소리, 풋살구 떨어지는 소리……
―〈모처럼 가부좌를 틀고〉 부분(《책바위》)

불타는 나무리!
허공 떠도는 바람들 불러 모아
반야심경 외게 하누나

나무는 불타리!
공중 헤매는 제비들 불러 모아
천수경 외게 하누나

머리칼 풀어헤친 채
온몸 가득, 푸른 하늘 빨아들이고 있는 나무여

그대 이미 불타거늘!
땅에 내린 뿌리 너무 얕아
여태 절 믿지 못 하누나.
―〈불타는 나무〉 전문(《책바위》)

 

물론 이 깨달음들은 궁극의 절대적인 것이 아니며, “신의 섭리”를 향해 가는 아득한 도상 위에 있는 과정적인 것이다. 그 아득한 거리를 이은봉은 위트 섞인 시적 상상력을 통해 메우고자 한다.

 “불타는 나무리”는 푸른 생명력으로 불타오르는 나무[木]와 “불타(佛陀)는 나무(南無)리”로 중의적으로 해석되는데, 이 중의법에 기대어 이은봉은 “나무여 그대 이미 불타거늘!”이라고 미리 선취된 깨달음의 경지를 사유하는 것이다. 주목할 것은, “머리칼 풀어헤친 채/ 온몸 가득, 푸른 하늘 빨아들이고 있는 나무”가 이은봉이 오래 천착해온 생태시의 현실적인 이상(理想)이며, 그가 비판해온 자본주의가 회복해야 할 근원적인 가치라는 점에 있다.

이는 또한 각자(各自)―시인의 비유적 초상이자, 각자(刻字)―시인이 극진히 해독해야 할 대상이기도 하다. 각자(覺者)―시인이 앞서 두 각자―시인들과 상통하는 지점이 여기서 마련된다. 최소한 세 유형의 ‘각자’를 품고 살아내고 동경하고 있는 시인 이은봉이 걸어온 길이, 또 걸어갈 길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어느덧 가슴 속 깊이” “저 혼자 숲을 이루고 있다.” 

 

김수이 | 문학평론가.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평론집으로 《쓸 수 있거나 쓸 수 없는》 《서정은 진화한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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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시하늘
글쓴이 : 보리향(菩提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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