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삶으로 빚은 그릇 / 구모룡 | ||||
| 김연동 작품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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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삶의 양식으로서 형식
시조 시인에게 형식은 곧 삶의 양식이다. 그는 주어진 형식의 구속과 시적 자유를 자신의 내부에서 통합하고 선험적인 시조의 형식을 체화하여 자기의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런데 정형시인 시조의 형식은 고정된 것이 아니다. 굳어 있는 형식이지만 여기에 생기를 불어넣는 것은 시인의 뜻[志]이다. 그저 외적 조건에 맞추어가는 것이 아니라 외부의 형식을 내부의 내용과 일치시키는 노력이 요구된다. 시조를 선택하는 것은 세계관의 작동과 무관할 수 없다. 그것은 형식과 내용이 일치된 삶의 지평에 대한 염원과 결부된다. 김연동은 다음과 같이 자신의 글쓰기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다수의 사람들은 어떤 형식적 구애를 받는 것 자체를 싫어한다. 그러나 나는 형식이 엄연한 시조를 변함없이 사랑한다. 형식 속에서 내용의 자유를 얻는 일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라고들 여기지만, 시조의 형식은 이러한 묘미를 찾기에 넉넉한 그릇이다. 이 그릇이 지닌 묘미가 나를 시조에 천착하게 하고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게 한다. 많은 사람은 형식과 내용의 조화로운 만남을 추구하는 과정은 쉽지 않은 일이라 여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시조 형식의 유기적인 운용으로 개성적 형식미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믿게 되었다. 형식이 지닌 구속성을 넘나들 수 있어야 비로소 자신만의 가락을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만의 형식이라는 말 위에 올라타지 못하면 좋은 시조의 창작은 물 건너갔다고 봐야 한다. 형식과 언어를 보다 섬세하게 조탁하는 과정은 나를 수양하는 과정이기도 하였으며, 또 그런 과정 속에서 신선하고 아름다운 이미지를 건져 올리려고 노력해 왔다.
시조 창작의 이념적인 기원이 있다면 그것은 공자가 말한 “문질빈빈(文質彬彬)”일 것이다. 오늘의 개념으로 번역할 때 ‘문’은 형식이고 ‘질’은 내용이다. 공자도 형식과 내용의 조화를 강조한 셈인데 춘추시대라는 시대적 혼란을 배경으로 한다. 이 어구 속엔 꾸며진 말들이 범람하고 권력의 언어들이 난무하는 시대를 바라보는 공자의 심경이 반영되어 있다. 이러한 기원의 관점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관철되고 있는 양식이 시조이다. 시조는 현대적 삶의 잡스럽고 곤궁함을 극복하고 화해(和諧)를 실현하려는 과정에서 전유된다.
김연동 또한 인용문이 말하듯이 시조를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빚어지는 ‘그릇’으로 받아들인다. ‘형식 속에서 내용의 자유’를 구하는 지난한 도정에 자신을 기꺼이 내어놓는데, 이 경우 시 쓰기는 곧 자기수양이라는 인격주의와 등가가 된다. ‘형식의 구속성을’ 넘나들면서 ‘비로소 자신만의 가락을 만들어’ 내는 일은 요동하는 구체적 삶을 견인하면서 균형과 절제를 견지하는 일에 다름이 없다. 그래서 시인에게 시조는 ‘묘미’를 선사하는 미적 삶의 양식이다.
불혹을 바라보는 나이인 1987년에 등단한 김연동 시인(1948년 하동생)은 그동안 네 권의 시집을 발간했다. 《저문 날의 구도》(1993), 《바다와 신발》(2001), 《점묘하듯, 상감하듯》(2007), 《시간의 흔적》(2010). 네 권의 시집에 그려진 시인의 역정을 한 마디로 요약하긴 어렵지만 외부의 형식을 삶의 양식으로 만들어가려는 지속적인 의지가 읽힌다. 그래서 첫 두 시집에서 삶이라는 내용을 주어진 그릇에 담아내려는 힘겨운 노력이 배어난다면 나머지 두 시집에서는 외부와 내부가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루는 경과를 보인다. 말할 것도 없이 이러한 단계 구분은 명료한 것이 아니며 다소 주관적인 인상에 의한 것이다. 텍스트를 읽으면서 김연동의 시적 성취를 헤아려 보자.
2. 추억과 현실의 긴장
김연동이 문학 활동을 한 것은 30대 후반(제2시집의 연보에 의하면 1985년 ‘섬진시조문학회’에서 활동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이며 공식적으로 문단에 얼굴을 드러낸 것은 막 40이 되었을 무렵이다. 많은 경우 등단작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 문학적 지향이 잘 드러나기 때문이다. 김연동의 등단작인 〈광양만에서〉도 그의 시적 경향을 예견하게 한다.
물목에 바위를 놓아/ 뭍으로 꾸미던 날// 정성으로 모은 목선/ 부표 밖으로 밀려나고// 둥지를 빼앗긴 파도가/ 배고픈 철새로 운다. 준설선 이빨에 물려/ 바동거리는 해안선,// 황톳물 던진 파고는/ 허리 죄인 어부의 가슴// 안개는 매운 연기 속/ 광양만을 더듬어 운다. 물길을 헤아리며/ 등대로 섰던 섬도// 이제는 물을 길 없는/ 역사 속에 가라앉고// 태초의 그 말 그 뜻도/ 헐리어 묻히고 있다.
‘광양만’은 지금 부산항 다음으로 큰 항만을 지닌 해항(sea port)이다. 모든 항만이 그러하듯 광양만도 기존의 풍경을 무너뜨리고 장소를 파괴하면서 건설되었다. 시인은 이러한 변화의 현장을 응시하면서 3연의 연시조를 구성한다. 의식에 공감을 일으키는 것이 장소라고 할 때, 시인은 장소 상실의 아픔과 낯선 공간이 주는 이질감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마치 부표 밖으로 밀려난 목선과 같은 심정이다.
파도와 철새의 울음에 감정의 이입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하다. 이러한 화자의 시선은 작은 것, 가까운 것에서 보다 크고 먼 것으로 이동하면서 감정을 가라앉히면서 심연을 헤아리게 된다. 1연에서 ‘바위’ ‘목선’ ‘부표’ ‘파도’ ‘철새’와 같은 사물을 바라보던 화자의 시선은 2연에 이르면 ‘해안선’ ‘파고’ ‘광양만’으로 확장되며, 마침내 3연에서 풍경 아래로 사라진 ‘섬’에 대한 기억 혹은 부재를 향한다. 이처럼 시인은 사라져 가는 것들, 개발과 같이 힘에 의해 파괴되는 장소들에 대한 애착을 보인다. 추억과 현실의 긴장된 만남이 시조라는 형식 안에서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김연동 시인의 시인됨의 연원은 등단작에 비춰 비극적인 감성인 듯하다. 대체로 비극적인 인식은 〈신도 한 밤이란다〉와 같은 시가 시사하듯이 ‘부재하는 신’이라는 서구적 사유와 연관되지만 비극적 감성이 곧 비극적 세계관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에게 비극적 감성은 역사적인 질곡이나 폭력에 기인한 개인적이고 집단적인 상처와 연관되는 경우가 많지만 상처의 치유나 극복 그리고 궁극적인 화해를 지향하는 경향이 크다. 다시 말해서 비극으로 몰입하지 않고 희망과 행복의 실마리를 찾아 끝내 희극에 이르려 하는 낙관주의를 보인다.
순환하는 자연의 이념은 이러한 낙관주의의 배후다. 비바람과 가뭄을 견디고 싹을 틔우고 잎을 맺고 꽃을 피워 열매를 영글게 하는 식물처럼 구경의 생에 대한 신뢰가 있는 것이다. 김연동 시인의 첫 시집 《저문 날의 구도》는 시인이 지닌 비극적 감성과 더불어 생에 대한 근본적인 낙관이 직조된 시편들이 많다. “상흔”(〈청사진 한 장〉)이나 “절망”(〈노을〉) 그리고 “슬픔”(〈일기 8〉)과 “어둠”(〈회전목마를 타고 싶다〉) 등의 감정 양식을 지향하는 시인의 의식이 두드러지지만 이러한 데서 벗어나려는 의지 또한 강하다. 가령 이러한 의지는 “산비탈 바람 앞에 홀로 서서 눈 맞으며/ 피맺힌 시간을 트는 한 그루 동백처럼/ 시리고 시린 절망을/ 태울 꽃을 피우리라.”(〈의자〉)와 같은 구절에서 잘 드러난다.
붉은 동백은 불타는 꽃이다. 그것은 꽃 피는 희극이자 꽃 지는 비극이다. 그러나 시인은 지는 꽃에 더 많은 의미를 두지 않는다. 절망을 태워 꽃피우는 데 주목한다. 그만큼 시인의 의지는 생의 긍정과 희망을 향해 있다. “피 흘리는 하늘 아래 철망 쓴 장벽처럼/ 통곡마저 삼켜버린 차단된 길 있다 해도/ 이 시간 가야만 하는/ 거역할 수 없는 노정.”(〈밤의 고속도로〉)
그런데 시인이 지닌 비극적 감성의 경험적 기원은 분명하지 않다. 물론 이러한 기원을 추적하는 일이 반드시 필요한 일도 아니다. 다만 그것이 유년 시절 겪은 전쟁의 상흔이 아닌가 짐작이 갈 뿐이다. 시인의 유년을 공포로 물들인 한국전쟁의 기억은 여러 시편에서 흔적으로 배어난다. 흔적으로 배어난다는 것은 기억 속에 억압의 기제가 있다는 것인데 예를 들어 “전화(戰禍)로 일그러진 우리들 혈맥 속을/ 비 오고 바람 불어 내벽은 금이 갔다.”(〈일기 10〉―그런데 이 시의 표제는 제2시집에서 〈행간〉으로 바뀐다.)와 같은 구절이 이를 시사한다. 하지만 애써 시인의 전기적이고 가족사적인 내력을 염탐할 까닭은 없다.
그럼에도 시인이 폭력을 내재한 이념이나 개발에 대하여 반대의 입장에 서는 것이 단순하게 시인이기 때문이라고만 할 수 없는 경험적 배경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유년의 경험이 그를 시인으로 이끌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시적 비전의 삼박자와도 일치한다. 원초적인 화해의 세계와 그것의 파괴 그리고 상처의 회복은 김연동 시인의 시작 계기와 지속성을 보장하는 의식 형태이다.
목이 타는 강언덕 쌓이는 노을 속에/ 한 점 설움마저 화인(火印) 찍힌 풀잎들이/ 인동(忍冬) 끝 얼룩진 하늘을/ 호명하며 매달릴 때,// 자성의 창백한 길을 휘파람만 불며 가다./ 나는 강물이 되어 출렁이는 노래가 되어/ 흐르는 저 시간 위에/ 부딪치고 부서지며,// 비록 날선 바다를 만난다고 할지라도/ 찬연하게 빛나는 햇살 한껏 반짝이고/ 속살에/ 단비 내리는/ 그런 날을 꿈꾸며 간다.
이와 같이 아름다운 시가 지닌 문법은 김연동 시인의 의식지향을 매우 잘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애초의 ‘화인’ 같은 상처를 견뎌내고 세월의 추이와 더불어 생을 연단하면서 마침내 “햇살 한껏 반짝이고/ 속살에/ 단비 내리는/ 그런 날”을 만날 것이라 예감하고 있다. 사실 모든 희망의 예감은 절망이 거름이 될 때 생성한다. 환상이 없다면 환멸이 없겠지만 그 역도 마찬가지로 성립한다. 시인은 “지난 길 돌아보지마// 환한 꽃잎 잘리던 날”(〈찻잔에 비친 계절〉)이라고 말한다. 환멸과 상처의 시간을 생성의 시간으로 바꾸어 나가는 과정이 시인의 삶이자 시적 과정이다.
“늘 어둠에 싸여 폐광처럼 비어 있었다”(〈나의 항구〉)는 구절을 시인의 내면에 대한 진술로 단정하는 것은 성급한 일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단순한 외부 풍경의 서술로 볼 수도 없다. 벌써 표제가 내부의 풍경임을 시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추억은 시인에게 상처이기도 하지만 먼 곳의 불빛처럼 아득한 희망의 원천이기도 하다. 그만큼 양가성을 지니고 있다. 시인은 “고향길”을 “이끼도 슬지 않는 포도 위 찬 가슴은// 침울한 하늘 아래 속이 까만 새가 되어// 물 푸른 길섶을 베고/ 별을 짚어 흐른다”(〈고향길〉)라고 노래한다. ‘속이 까만 새’와 ‘별’의 이미지가 만드는 대비가 자못 심각하다. 그러나 고향엔 “어머니”(〈어머니〉를 참조하시라)가 있다. 유년의 기억은 “차디찬 지상”(〈어머니〉)을 견뎌내는 생명의 기원이기도 하다.
내 영혼의 뜨락 위에 금간 계절이 내려/ 우수 깊은 이마를 짚고 목련을 피우건만/ 봄 한 날 그늘진 가슴/ 눈물이듯 비에 젖네// 한 잎 두 잎 지는 꽃을 수틀에 심는 동안/ 시대의 아픔들은 불면으로 뒤척이고/ 지상엔 불신의 눈빛이/ 잎새처럼 피고 있네
3. 완성을 향한 도정
“잉태한/ 어둠만 삼키는/ 나의 노래 노래여,”(〈회전목마를 타고 싶다〉)라고 고백하고 있듯이 시인이 드러내고 있는 시적 의식의 주조음은 비애에 가깝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이러한 의식지향이 그의 시를 비가(悲歌)로 이끄는 것은 아니다. 고통이나 슬픔을 극복하는 것은 의지적 행위만 아니다. 때론 의지가 그것들을 심화할 수도 있다. 비극은 결국 강한 의지에서 비롯하는 파국에 다름 아니다. 시인이 지닌 비극적 감성은 이러한 파국에 대한 예지와 연관된다. 시인의 지혜는 수동성으로 생을 긍정하는 낙관주의를 형성한다. 그러므로 식물적 상상력은 단순한 회피가 아니다. 그것은 주체와 세계가 거듭 부딪히면서 체득하게 되는 인식의 소산이라 할 수 있다.
그대 맑은 영혼 수반 위에 올려놓다// 고인 물 위에다 비처럼 뿌려보면// 우리네 투명한 가슴 차오르는 밝은 햇살// 산하 그늘진 곳 변방 어디 상한 그곳// 이마엔 꽃이 필 거야 강울 일어설 거야// 창백한 유산을 넘어 노래 출렁일 거야
이처럼 시인은 “창백한 유산”을 넘어 희망의 지평으로 나아가려 한다. 적어도 제3시집의 시기에 오면 어둠의 노래를 벗어나려는 시인의 입장이 분명하다. “점멸하는 시간 앞에 무딘 몸 추스르고/ 붓촉을 다시 갈고, 꽁지깃 벼린 날은/ 절정의 피가 돌리라/ 내 식은 이마에도”(〈솔개〉)와 같은 구절에서 시인의 태도는 미학적 ‘절정’에 대한 집중을 드러낸다. 그렇다면 시인이 고난의 삶과 고통의 세계를 버리고 미적 지평으로 이월한 것인가? 그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시인이 시를 자신을 다스리는 그릇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진창에 빠진 욕망// 비워라/ 다시 비워라// 빈 그릇에 남는 허기”(〈흔들리는 찻잔〉). 이와 같이 시인은 ‘진창에 빠진 욕망’에서 벗어나려는 생각을 지니고 있다.
‘진창에 빠진 욕망’이란 비단 세속에 한정되는 것은 아닐 터이고 자신이 지닌 원망과 분노 등을 모두 포함할 것이라 여겨진다. 가령 유년을 “죽비 들고 건너가는 휘인 강 언저리로/ 꽃신을 신고 와서, 잊은 시간 몰고 와서/ 물총새 흔드는 유년/ 은빛 꿈이 파닥인다”(〈꽃신〉)라고 아름답게 회상할 수 있는 것도 유년에 대한 시인의 시선이 질곡이 아니라 원초적 화해로 바라보고 있음을 뜻한다. 실로 놀라운 시적 전환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시적 전환이 일거에 시인의 시적 풍경을 다르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한 족장 넘어서면 파란 바다 있다지만/ 내 지금 뿌리내린 앙금 깊은 이 물길/ 지상은 지친 삶의 소리/ 초록 꿈도 얼고 있다”(〈겨울 광려천〉)와 같은 구절이 말하듯 시인은 여전히 세상의 한파를 증언한다. 하지만 과거의 기억에 구속된 세계를 말하고 있진 않다. 그만큼 기억의 공간에서 벗어나 있다는 증좌다.
삭은 사진첩이 윤나는 얘기하듯/ 한 해가 하루처럼 지나가는 포도 위에/ 추억은 빗물이 되어/ 추적추적 뿌립니다// 낡은 책갈피 속 시들은 꽃잎 같던/ 유년의 삿갓을 꺼내 빗소리를 듣습니다/ 빗방울 영혼을 깨우듯/ 토란잎에 구릅니다// 낮게 가라앉아 숨 돌리는 쉬리처럼/ 무수히 부대낀 시간 거울 앞에 눕습니다/ 물길을 헤집고 가는 역류의 꿈도 접고
한 개인의 역사에 경험적으로 놓인 ‘상흔’은 그것이 사고의 진전을 방해하고 의식의 열림을 구속할 때 소위 콤플렉스가 된다. 그러나 그것이 자기를 비추는 ‘거울’과 같이 대상화될 때 이야기가 된다. 아마 이 시가 후자의 영역에 속한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라 믿는다. 특히 이 시의 결구는 추억이 고통스러운 기원의 기억으로 이끌리는 과정이 아님을 시사한다. 그보다 앞서 읽은 〈꽃신〉의 한 구절처럼 회상의 한 장면으로 그려진다. “낡은 책갈피 속 시들은 꽃잎 같던/ 유년”이라는 진술처럼 시인에게 유년은 어느 정도 미적 거리를 지닌 대상이 된다. 이러한 과정과 더불어 시인의 시적 경향이 경험적 진술보다 미적 형상화에 더 많은 무게가 놓이는 것은 당연하다.
신호를 기다리는 차창을 두드린다/ 회색 근무복 입은 비정규직 노동자가/ 창백한 혼돈의 세계/ 그 전단을 내민다// 사회면이 지운 기사 바람에 휘날린다/ 눈길이 머무르면 종양이 되는 창 밖/ 수술실 실리어 가는/ 환자처럼 흔들린다// 가로수 검은 가지 초록의 싹이 돋아/ 추상의 푸른 시를 흩뿌리고 있는 아침/ 내 좁은 이마 위에는/ 사월에도 눈 내린다
이처럼 시인의 시선이 지금―이곳의 일상적 삶에 가 닿아 있다. 우선 이러한 일상성의 획득을 의미 있게 평가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시조가 고답과 초속의 형식미에 유인되는 폐단을 지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일상성을 특권화할 필요는 없다.
이 시의 묘미는 이웃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 화자의 태도가 3연의 정직한 대비를 만들어내는 데 있다. 타자의 슬픔과 고통을 안다는 것은 자기의 고통과 슬픔을 아는 일과 연관된다. 고통과 슬픔의 감염은 결코 나르시시즘에서 유발되지 않는다. 시 속의 화자는 담담한 진술로 고통의 감염 과정을 말한다. 그리고 ‘추상의 푸른 시’와 ‘창백한 혼돈의 세계’라는 대비를 얻는다. 푸른 시의 추상과 창백한 세계의 구체가 시인의 내부에서 길항하고 있는 장면이다.
이러한 장면은 “시장 길을 돌아 나온/ 흰 시간 몇 가닥을/ 깊숙이 음각하는/ 좁은 내 이마 위에/ 세속의 길/ 등 시린 삶도/ 그려 넣고 있습니다”(〈갈꽃처럼〉)라는 구절에서도 반복된다. 그만큼 시인의 경향이 현실을 배제하는 미학주의로 흐르지 않는다.
시인의 시적 지평을 잘 드러내고 있는 시가 아닌가 한다. 지금 시인은 세속과 초속 사이의 경계에서 시적 기대 지평을 형성하고 있다. 그의 ‘은빛 물고기’가 어떠한 경지를 말할지 아직 분명하지는 않다. 그럼에도 틀림없는 사실은 그의 시가 더욱 자연스럽게 형식과 내용의 일치를 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문질빈빈’의 도정을 꾸준하게 걸어온 탓이다.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를 ‘시론’으로 삼은 〈미켈란젤로―시론〉처럼 그는 또한 시와 도예를 하나의 경지로 바라본 초정 김상옥의 후예이기도 하다.
모더니스트들이 말한 ‘잘 빚어진 항아리’가 아니라 도(道)와 시가 하나의 지평에서 융합된 시학을 탐색하고 있다. 물론 “풀잎에/ 말갛게 매단/ 무채색의 눈물”로 표상되는 염결주의를 표방한 〈이슬―시론〉은 삶의 태도를 말한다. 시 쓰기를 인격주의로 통합한 그이기에 자연스러운 진술이다.
청자 빛 하늘 위에 상감한 무늬같이/ 화해 그 흰 날개로 천년을 날고 있는/ 단정학 고혹한 태깔/ 눈감아도 부시다// 풀잎의 가는 몸짓 목이 쉰 울음소리/ 골목을 돌아 나와 구름 씻는 바람소리/ 만나면 노래가 되는 결 고운 그릇 하나,// 백의의 혼불 같은 무수한 전설들이/ 어둠 속 별빛처럼 이마 위에 내려앉아/ 닳은 내 손톱 밑에도/ 파아란 불꽃 튄다
구모룡 | 문학평론가. 1959년생. 198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문학평론) 당선으로 등단. 평론집 《앓는 세대의 문학―세계관과 형식》 《구체적 삶과 형성기의 문학》 《한국문학과 열린 체계의 비평담론》 《해양문학이란 무엇인가》 《시의 옹호》 《감성과 윤리》 등이 있다. 편저로 《예술과 생활―김동석문학전집》 《백신애연구》를 엮었다. 현재 한국해양대 동아시아학과 교수. |
-http://www.yousim.co.kr/news/articleView.html?idxno=5447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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