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셔츠에 목을 넣을 때 생각한다
이 안은 비좁고 나는 당신을 모른다
식탁 위에 고지서가 몇 장 놓여 있다
어머니는 자신의 뒷모습을 설거지하고
벽 한쪽에는 내가 장식되어 있다
플라타너스 잎맥이 쪼그라드는 아침
나는 나로부터 날카롭다 서너 토막 나는
이런 것을 너덜거린다고 말할 수 있을까
2
티셔츠에 목을 넣을 때 생각한다
면도를 하다가 그제 벤 자리를 또 베였고
아무리 닦아도 몸에선 털이 자란다
타일은 오래되면 사람의 색을 닮는구나
베란다에 앉아 담배를 피우는 삼촌은
두꺼운 국어사전을 닮았다
얇은 페이지가 빠르게 넘어간다
뒷문이 지워졌다 당신, 찾아올 곳이 없다
3
티셔츠에 목을 넣을 때 생각한다
간밤 당신 꿈을 꾼 덕분에
가슴 바깥으로 비죽이 간판이 하나 걸린다
때 절은 마룻바닥에선 못이 녹순 머리를 박는 소리
당신을 한 벌의 수저와 묻는다
내가 토닥토닥 두들기는, 춥지 않은 무덤
먼지의 뒤꿈치들, 사각거린다
누군가는 죽는데, 누군가는 살아서 죽은 이를 애도한다. 애도의 시간들은 현재를 끊임없이 유예하면서 그 자리에 어떤 가정(假定)의 시간들을 들여놓고 생각하며 사는 것이다. 그 가정의 시간들 속에서 산 자들은 밥도 먹고 동물원으로 소풍도 가고 연애를 하고 잠도 잔다. 여전히 봄이 오고, 여름이 오고, 가을이 오고, 겨울은 온다. 그런 계절의 순환 속에서 애도의 슬픔에서 깨어나지 못한 시의 화자는 산자들을 “죽일 년놈들이 되어 잠든 우리”(〈공중의 시간〉)로서 되돌아보게 한다. 그렇다고 죽은 자가 남긴 부재의 공허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삶은 그것과 함께 흐른다. 누구나 산 자들은 죽은 자가 남긴 고아들이다. 나이가 들면서 이 고아들은 내면으로 들어가 칩거한다. 우는 것도 속으로만 운다. 헤쳐 나갈 수 없는 불행의 느낌들, 혹은 누구도 손을 내밀지 않는 내면의 절대고독 속에서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신경림, 〈갈대〉)에 깊이 공감한다면 당신의 내면에도 고아가 살고 있다는 증거다. 울음은 내면을 꽉 채운 불행을 밀어내고 그 빈자리를 씻어내는 무의식의 제의(祭儀)다. 벗어나기 위한, 치유를 위한 “지금은 내가 나를 우는 시간” (유희경, 〈금요일〉)!
〈티셔츠에 목을 넣을 때 생각한다〉는 아버지가 부재하는 풍경을 보여준다. 어머니, 삼촌, ‘나’는 있는데, 아버지의 모습은 없다. 아버지는 어디에 갔는가? 아버지는 죽었나 보다. 시인은 아버지는 “아버지의 기호”로 변해 있고, ‘나’와 아버지 사이에는 이만 헥타르쯤의 운동장이 넓게 자리 잡고, 이따금 알약 반 개 같은 씨앗을 심지만 자라는 것은 없다고 말한다. 아버지는 없고 아버지와 캐치볼을 하던 기억만 생생할 때, “방금 불어온 바람을 등지고 어리고 슬픈 내가 공을 주우러 뛰어간다 당신은 누구인가 이 글러브는 누구의 가죽이고 날아가는 것을 보면 왜 소리를 지르고 싶어지는가”(〈지워지는 지도(地圖)〉)라는 물음에 자기를 묻게 된다. 아버지의 부재가 드리운 그늘들이 넓게 드리운 자리에 산 자들의 일상이 있다. 어머니는 말없는 뒷모습을 보이며 설거지를 하고, 삼촌은 베란다에서 담배를 피운다. 나는 면도를 하다가 벤 자리를 또 베이고, 몸에 자라는 털은 깎아도 또 자란다.
티셔츠에 목을 넣고 입는 것은 청년이다. 청년 안에는 울고 있는 소년이 있다. 소년은 쪼개진 어른이 아니다. 소년은 그 자체로 완성된 우주 자체, 진정한 인간이다. 그 소년의 때를 지나서 그제 벤 자리를 다시 베면서 면도를 하는 청년이 되었지만, 그의 내면에는 여전히 소년이 있다. 소년은 “아버지, 두고 간 얼굴을 주웠을 때 그것은 떨어뜨린 면도칼처럼 차가웠다”(〈소년 이반〉)는 사실을 알아버렸다. 아버지를 잃는다는 것은 무의식에서 〈낱장의 시간들〉에서 얼핏 보이는, 분리불안(分離不安 : “너의 헐벗은 두 팔이 검게 타오르도록 내버려두고”)이나, 유기공포(遺棄恐怖 : “세상이 검게 변하는 순간에 아무것도 없고 너만 있고”)의 기원이 될 수도 있다. 즉 근원적 상처가 된다는 뜻이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사랑하는 자를 잃고 사랑받을 수 없는 자가 되어버린 소년의 트라우마는 그렇게 생겨난다. 부재자는 그의 부재로써 소년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어느 날 문득 “아무리 닦아도 몸에선 털이 자”라고, “타일은 오래되면 사람의 색을 닮는”다는 걸 깨닫는다. 시의 화자는 끝없이 자라는 털에 대한 가벼운 염증, 그리고 오래된 타일의 변색에서 “사람의 색”을 발견하는데, 그 발견은 사는 것에 기필코 달라붙은 누추함과 비루함을 각인시키고, 그것이 무의식의 층위에서 죽은 자의 순결함에 견줘지면서 그것이 산 자가 감당해야 할 몫이라는 걸 되새기게 한다. 티셔츠에 목을 넣는 행위는 사소한 일상을 이루는 한 요소다. 그 사소한 행위에 빌붙는 “생각”들이 시인은 거기서 “한 벌의 수저와 묻”은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불러오고, 죽은 아버지의 기억에 눌린 한 집안의 기이한 침울과 공허를 폭로한다. 이 집의 실내에 부유하는 “먼지의 뒤꿈치들”이 침울과 공허를 밟는 소리만이 사각거린다.

유희경(1980~ )은 서울에서 태어났다.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와 한국예술종합학교 극작과를 졸업했다. 200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얼마 전 목포에서 열린 김현문학관 개관식에 갔다가 거기서 우연히 유희경을 보았다. 기린처럼 키가 큰 청년이 사진기를 목에 걸고 행사장의 여러 장면을 열심히 찍고 있었다. 누군가 그가 유희경이라고 했다. 서른을 막 넘긴 시인은 〈서른〉이라는 시에서 자신을 가리켜 “지금쯤 나는 뿔만 남은 짐승”이라고 한다. 이 아름다운 뿔만 남은 짐승은 제 생의 뿌리를 자꾸 과거 쪽으로 뻗고 있다. 죽은 아버지가 찾아와 그에게 말을 건네는데, 그때마다 “아버지 내게 말 걸지 마세요”라고 한다. 등단하고 3년 만에 펴낸 유희경의 첫 시집 《오늘 아침 단어》는 불행한 죽음과 불행한 죽음으로 지워진 얼굴과 그 얼굴 가장자리에서 많은 이파리처럼 돋아나 흔들리는 슬픔들이 만든 단어들로 차 있다.
유희경의 첫 시집 《오늘 아침 단어》는 눈물에 젖어 축축하다. 그 축축함에 기여하는 문장들. “아무도 울지 않는 이런 날엔 또 모두가 울고/날아간 것은 새들의 아득한 꿈이었을지도/ 젖어가는 것은 속속들이 빗물이었을지도”(〈우산의 고향〉), “시간이 지날수록 귀에는 낡은 흔한 울음이, 알 수 없는 애를 쓰며 매달려 있었다”(〈소년 이반〉), “서늘하다 달래기 힘든 아이가 울기 때문에”(〈검은 고요〉), “소년이 울고 있었다/누구도 들어보지 못한 소리로/눈물은 떨어지고 있었다”(〈소년〉), “내가 소리 내어 울고 있다”(〈나이 어린 조각들〉), “울며 말했다 울음이 말을 막고 말이 울음과 섞여서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는 그 소리가 나를 잡아당겼다”(〈불행한 반응〉), “허공에 대고, 울어놓은 자리마다 흔적이 생겼다”(〈닿지 않은 이야기〉). 자기 울음소리에 조용히 귀를 기울이는 소년들. 소년들의 귀에는 늘 울음이 매달려 있다. 눈물은 “선홍빛 비”로 내려 범람하고 소년은 오래 물속에 있기도 한다(〈소년〉). 그 울음은 아버지의 죽음과 잇대어 있다. 청년은 울지 않는다. 다만 청년 안에 있는 소년들이 운다. 그 울음은 끈질기다. 그 소년은 유희경의 어린 시절을 가리키는 것일까. 세월이 많이 흘렀을 텐데, 유희경 시의 화자들은 아직도 그 울음 속에 있다. 한 죽음이 남긴 상처가 그만큼 깊고, 아직도 치유 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일까.
사진 : 김선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