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의 명령에 나는 매일 굴복한다
─『젯밥과 화분』(신생, 2011)
김수우
시는 내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했다. 아니 명령했다. 우선 시는 내게 자유로워라고 명령했다. 그 말이 내게서 자유를 뺏는 것을 모르고 나는 환희를 느꼈다. 시는 사람을 사랑하라고, 그러면서 세상에 저항하라고 명령했다. 세상과 사람은 같을 때도 많고 전혀 다를 때도 많다. 그래서 사랑과 저항 그 틈에서 매일매일 갈팡질팡이다. 시는 내 가죽가방과 가죽구두를 부끄럽게 했다. 그래서 가방과 구두를 천소재로 바꾸었다가 결국 구두는 할 수 없이 도로 가죽으로 된 것을 신는다. 시는 내가 서른 평 아파트에 사는 것도 부끄럽게 하고, 서울 가는 기차를 타는 것도, 문단을 기웃거리는 것도 부끄럽게 했다. 그러면서 시는 산속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고 세속을 얼쩡거리게 했다. 치즈를 듬뿍 올린 스파케티를 먹는 것도 부끄러웠고, 감성에 예민한 것도 부끄러웠고, 이성적으로 내린 판단도 부끄러웠다. 지구 저편의 전쟁을 뉴스로 보면서 무심히 밥을 먹는 내가 어이없었고, 너무 쉽게 웃는 것도 함부로 술잔을 기울이는 것도 부끄러웠다. 세상이 고통으로 그득한데도 가족만 챙기는 것도 부끄러웠다. 도시에서 아무나와 행복하게 어울릴 수 없었다. 하는 것마다 민망하고 부자연스러운데 어떻게 자유로울 수 있겠는가.
그러면서 시는 목소리를 낼 것을 강요했다. 가난을 편들고 부자들에게 따지는 것도 자꾸 복잡해졌다. 중요한 건 어린이처럼 사는 거다. 단순하게 살자. 순수하게 모든 장면과 마주치자. 아니었다. 그것도 아니었다. 마주치는 것들이 도무지 순수하지 않았다. 그것을 간과할 수 없었다. 어차피 정답은 없다. 사르트르의 말대로 인간은 상황적 존재이니 상황에 맞게 움직이는 거다. 아니었다. 그것도 아니었다. 상황은 나를 합리화시킬 뿐이었다. 그래, 자연, 자연을 사랑하면 다 되지 않을까. 생긴 대로, 자연이 시키는 대로 살자. 봄이 오면 봄처럼, 겨울이 오면 겨울처럼. 아니었다. 그것도 아니었다. 모든 문제는 세속과 그 구조에 있었다. 소외와 불평등에 결코 무심할 수 없었다. 싸우자. 자본주의과 싸우고, 인간성을 뺏는 구조와 싸우자. 하지만 늘 엄마가 대바늘로 떠준 옷을 입고 자랐던 나는 세상에 대한 적의도 없고 어떤 이데올로기도 없었다. 산복도로 샛골목에서 아무리 배고팠어도 그 가난이 불행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시에 억압당하고 있다. 나 자신뿐만 아니라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까지도 모두 지치게 한다. 가족도 친구도, 내 사랑하는 이들을 모두 피곤하게 만드는 이 억압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일까.
도무지 살 수가 없다. 어떻게 살라는 거냐, 시에게 따지기도 한다. 막막한 날들이 한 해 두 해 흘러갔다. 하루하루 막막해지면서 굳은살이 많아지는 노예처럼 손바닥발바닥만 어루만지는 일, 그것이 내게 시다. 그러고 보면 시를 사랑하고부터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다. 할 수 없이 내게 유일한 재산인 몇 뭉치 책보따리를 부산의 원도심 인쇄골목 한 모서리에 풀어놓았다. 책이라도 나눠 읽고, 함께 이 시대를 극복해나갈 가치를 함께 궁리해보자. <백년어서원> 이것이 내가 시에게 대답할 수 있었던, 시의 비위를 맞출 수 있었던 나만의 선택이었다. 참여와 실천, 그런 말을 입에 담으면서 그때부터 조금씩 시에게 덜 미안해진다. 정말 시간이 아깝다는 이기심에 시달리고, 글쓰기에 조급증과 불안이 생기기도 하지만 일단은 시에게 조금이라도 체면이 선다. 시를 쓴답시고 현실과 타협하는 일은 이제 없다. 하루하루 전쟁이다. 굼실굼실, 쉬지 않고 포기하지 않는 숨은 게릴라전이다. 이젠 먹고사는 게 우선이라고 말하는 다른 문학인들을 똑바로 응시할 수 있다. 시의 명령은 나에게 시쓰기를 더 어렵게 했다. 하지만 시를 살 수 있게 하고, 시의 정신을 말할 수 있게 하고, 시를 기다릴 수 있게 했다. 서울 가는 기차를 타지 않아도 내 문학도 내 영혼도 건강하다.
이 모든 결의에도, 도저히 동의할 수 없는 자본의 형식에도 불구하고, 매일 돈 걱정이 늘어간다. 내가 살면서 원시의 제의(祭儀)을 찾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삶과 죽음의 경계, 사랑과 미움의 경계, 욕망과 가치의 경계에서, 내가 할 것은 바닥에 몸을 붙이고 엎드려 사물의 소리를 듣는 일이었다. 제의는 감성과 이성, 혼돈과 질서의 경계에서 생명에 지극할 수 있는 형식이었다. 기독교인이면서도 백팔배의 절이 내 기도와 수행 방식인 그런 까닭이다. 내 이마와 무릎이 바닥에 닿는 순간, 뱃속 밑바닥에서 절절하게 끓어오르는 것이, 나는 그것이 시라고 믿는다.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이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이것이 내 시적 방정식이다. 그것이 시집 『젯밥과 화분』에 담기기를 바랬다. 세상에서 가장 지극한 밥인 ‘젯밥’을 짓고, 흙화분에 생명을 가꾸어내는 게 내 문학의 형식이기를 꿈꾼다.
모든 진실은 모순과 경계에 있다. 헤르메스의 지팡이 카두세우스처럼 독과 치유를 상징하는 두 마리의 뱀이 서로 얽혀 있는 것이다. 개체이면서 전체인, 천천히 서두르는 모순어법의 나열인 시의 작업이 갈수록 어렵고 곤혹스럽다. 내게 제의는 그 반대물의 합의를 찾아가면서 시의 눈동자와 마주치는 긴긴 여정이다. 시집 『젯밥과 화분』도, 골목 모퉁이 <백년어서원>도 그러한 나그네의식의 소산일지도 모른다. 하여 나는 틈틈이 빈손을 들여다본다. 어쨌거나 그러한 고단한 갈등을 통해, 시는 나 살자는 것이 아닌, 사회를 향한, 역사를 향한, 정의를 향한 시선을 갖게 했다. 희생의 방식치고는 너무 사치스럽기는 하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나를 엄청 소외에 시달리게 하고, 인생을 두렵게 한 것을 보면 나름대로 희생은 희생이었던 걸까.
목소리, 중요한 것은 목소리다. 김수영이 지적한 대로 모기만할 지라도 자기 목소리를 내야하는 것이다. 나는 시에 속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앞으로도 시에 속을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시를 쓰는 순간만이 가장 행복하기 때문이다. 그 순간만이 내가 가장 나다워지기 때문이다. 어차피 진실이란 인간적인 삶의 갈망, 그 존재감 외에 아무것도 아닐 것이기에.
─『시에』 (2011. 겨울)
▶김수우
부산 출생. 1995년 『시와시학』 으로 등단. 시집 『길의길』, 『당신의 옹이에 옷을 건다』,『붉은 사하라』, 『젯밥과 화분』. 산문집 『씨앗을 지키는 새』, 『백년어』, 『유쾌한 달팽이』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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