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괴와 절멸의 공간 | ||
| 홍일표의 좋은 시 찾아 읽기(73) | ||
| 서정적인 삶 김 안 당신은 나를 향해 몸을 벌려요 나는 그것이 사랑이 아닌 것을 알고 있지만 어느새 내 얼굴은 녹색이 되어요 당신이 몸을 벌리면 파르르 서리 낀 창이 흔들려요 방 전체가 하얀 서리들로 가득 차요 밤이 거짓말을 하기 시작하고, 당신의 벌어진 몸에선 노래가 흘러나와요 나는 이 노래를 알고 있지만 아무리 불러도 첫 소절로만 돌아갈 뿐이에요 나는 이 노래의 끄트머리에 뱀과 쥐들, 개와 파리들이 가득하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나는 당신의 노래를 움키고 당신의 푸른 질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요 온갖 은유를 만져요 제발 나를 안아 주세요 베어 먹지 않을 게요 제발 나를 안아 주세요 베어 먹지 않을 게요 당신은 사려 깊은 장님이 되어 내 손을 빼내어 당신의 입안으로 넣어요 아직 나의 고백은 끝나지 않았는데 당신의 입안에서 내 손이 사라져요 # 시인의 첫 시집은 하나의 씨알이다. 시의 자궁이다. 새로운 세계의 열림이요 태동이다. 조심스럽게 첫 시집을 여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김 안 시인의 첫 시집 『오빠 생각』에서 낯선 표정과 목소리를 발견한다. 다행이다. 대개는 첫 시집이라는 것이 덜 익은 시모음집이거나 아무런 방향도 색깔도 보여주지 못하고 덤덤하게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보통의 경우이다. 그러나 김 안 시집은 등단 후 7년 동안 숙성시켜 갈무리한 고농도의 시편들로 가득하다. 시인은 자서에서 “여기에 실린 글들은 차라리 사람이 아닌 것이 되고 싶었던 시절의 흔적들”이라고 밝히고 있다. ‘서정적 삶’ 역시 그러한 정황을 잘 드러내주고 있는 시라고 할 수 있다. 시의 제목에서부터 반어적 표정이 뚜렷하다. 연인의 태도가 ‘사랑이 아닌 것’이라고 알고 있지만 화자는 ‘파르르 서리 낀 창’의 상황을 맞게 되고 밤은 거짓말을 하기 시작한다. 연인의 몸에서 노래가 흘러나오지만 화자는 노래의 끝이 ‘뱀과 쥐들, 개와 파리들이 가득하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그러나 화자는 연인의 푸른 질 속에 손을 넣고 ‘은유’를 촉감한다. 그리고 ‘제발 나를 안아 주세요 베어 먹지 않을 게요’라고 간청한다. 그러나 화자의 간청은 입 안에서 사라지는 손으로 비유되어 비극적 정황을 맞게 된다. 이 지점을 평론가 허윤진은 ‘탐식과 파괴의 공간’으로 설명하고 있다. 즉 ‘입’은 사람의 공간이 아니라 절멸의 공간일 뿐이다. ‘나’의 고백은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사라진 손과 더불어 ‘나’는 좌절과 상실의 아픔을 겪게 된다. 이 시에서 ‘당신’과 ‘나’의 관계는 시종 대립적 예각을 드러낸다. 이 둘의 관계는 단순한 연인 사이일 수도 있고, 시의 공간을 확장하여 읽으면 ‘당신’이라는 대상은 언어나 시의 세계일 수도 있다. 보다 근원적 접근이 필요한 것이겠지만 결국 세계와의 불화가 ‘서정적 삶’ 의 질료라고 할 수 있다. 하나의 우주를 형성하는 시의 단독성은 중요하다. 모든 예술가는 단독성을 지향하지만 대개는 고유한 색상과 무늬를 얻지 못하고 폭력적 시간의 저편으로 사라진다. 김 안 시인의 첫 시집을 읽으며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세계와의 조우로 이틀 낮밤을 설레며 보냈다. 시의 원천이 깊고 넓은 그의 시에 대한 설렘이 오래 지속되었으면 좋겠다.
홍일표 편집위원 (1992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전문지 『시로 여는 세상』 주간) |
-'문화저널21'에서
출처 : 시하늘
글쓴이 : 보리향(菩提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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