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의 각도, 흔적의 시어 찾기
―김윤환과 김홍조의 시
김선주
시적 언어의 순환론
김윤환이 바라보는 ‘시’의 시각은 절대적 시간 위에 놓여 있다.
사유의 깊이에 대하여 진지한 탐색을 하고 있다. 시는 자아의 인식성과 시적 대상물 사이에서 상상력을 통한 반성을 갖게 한다. 그의 시 세계는 개인적인 사고의 한계를 넘어서 보다 구체적이며 예사롭지 않은 직관으로 시적 풍경을 그리고 있다. 자연의 힘에 보태진 시인의 언어조탁은, 때로는 평화롭게 때로는 적요함으로 소멸해가고 있는 근원적 운명에 접근한다. 그것은 존재를 통하여 존재의 증명을 시적 자아로 풀어내는 독특한 인식구조를 가지고 있다. 시인에게 있어 세계는 쉽사리 그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자기연민과 상처를 세계에 대한 질서 회복으로 대치시키고 있다.
오늘도 손만 씻고
밥이나 축냈던
공복의 하루가 지나간다
― 「손을 씻다가」 부분
「손을 씻다가」는 인간의 책임론을 말하고 있다. “공복의 하루”와 “나는 책임이 없다”, “순백의 책임”과 “성결의 책임”은 다시 “약속”과 “세수”로 세상에 대한 지독한 절망을 이야기한다. 뒤틀려진 언어 뒤에 숨은 ‘양심’은 스스로의 비겁함에 분노하고 있다. 시인은 책임의 기원을 탐색하다가 지친 삶을 내려놓으며 탄식하듯 말한다. 깨끗한 물에 손만 씻으면 뽀드득 소리가 나도록 씻게 되면, 내안에 켜켜로 쌓여 있던 “책임”이란 놈도 씻겨 나가는 것으로 믿었다. 성경 속에 내재된 잠언들은 가장 쉬운 듯이 가장 참된 언어의 모습으로 인간들에게 읽혀지고 있다. 시적 상관물의 전언 속에는 평생 풀어도 풀지 못하는 인간의 욕망과 집착을 대립과 모순을 통하여 암시하고 있다.
철쭉이 피고 지는 것을 본다
시간 앞에 대항하지 않고 화관마저 버리고
몸에 붙은 제 분신을 땅으로 떨구는 꽃
제 목숨 내려놓은데 이유가 없다
천리(天理)를 천리대로
죽음조차 선선(鄯善)한
순교의 계절이
지나고 있다
― 「오월」 전문
자연의 순리는 “시간 앞에 대항”하지 않고 “분신”조차도 땅으로 “떨구는 꽃”이라고 말한다. 어찌 철쭉만 그러하겠는가. 자연계의 모든 순환의 고리는 ‘비움’과 ‘없어짐’ 즉 지워져야 하는 아픔이다. 철쭉의 본성은 ‘화려한’ 꽃피움에 있다. 그러나 피움 뒤에는 철저하게 지워져야하는 게 현실성이다. “목숨”을 내려놓고 “죽음”도 “선선(?善)”한 “순교”로 다시 올 세상을 안고서 가는 게 자연의 법칙이다. 기억의 무늬마다 새겨 놓았던 그리움과 고통과 아픔조차도 적멸에 들 수밖에 없지 않는가. 시인은 자연과 나와 합일의 공간 안에서 봉인되어 철저히 잠겨져 있는 세상의 이치에 간을 맞추며 살아가는 법을 알려주고 있다. 눈 짐을 털고서, 하늘을 머리에 이고서, 살아야하는 이 지독한 생의 환치기는 결국 소유에서 자유로워질 때 시는 비로소 아름다운 풍경으로 갈 수 있다. 시적 이미지와 시적 화자가 사유와 결합하는 순간 시는 한걸음 더 가까이 독자에게 다가간다. 내적인 성찰은 곧 시적 화자의 ‘자기완성’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시를 통해서 독자와 시인은 함께 시의 순수한 풍경으로 진입하며, 시적 감성에 몰입된 독자는 매 순간 감흥을 얻기도 한다.
우리 조상은 왜
밥 떠먹는 연장에다
‘가락’이라고 이름 붙였을까
아무리 세련된 세상이 와도
밥은 노래이기 때문일까
숟가락 들 때마다
설레이는 입술
숟가락 들 때마다
속삭이는 가락
― 「숟가락」 부분
김윤환 시에 나타난 이미지의 그물망은 단정하고도 섬세하다. 또한 정리된 언어와 독특한 감성으로 기억의 퍼즐들을 수놓고 있다. 절제된 감정의 편린들이 함축된 언어로 삶의 현장을 시로 형상화한다.
「숟가락」을 “밥 떠먹는 연장”으로 혹은 “가락”으로 이름을 붙인 건 “아무리 세련된 세상이 와도” “밥은 노래이기 때문일까”라고 시인은 스스로에게 묻고 답하는 형식을 취한다. 평범한 식기로서의 “숟가락”이 마법의 리듬을 타고 “노래와 가락”으로 “입술”에 닿고 있다.
먹는 것은 단순한 식(食)아니라 “노래”의 원형이다. “밥”을 “먹는” 행위는 “설레이는 입술”을 통하여 아름다운 “가락”을 짓는 일이다. 이토록 단단한 현실 탐사 속에서 우러나오는 시적 자아는, 초라한 자아든 비겁한 현실 참여든 인간의 실존에 대한 부끄러움은 아니다. 시인의 실존은 조롱과 냉소가 머무는 곳이라 해도 거침없이 나아가는 데 있다. 시는 인간들에게는 또 다른 미래의 제시이다. 불확실성 시대를 살아가는 오늘의 시는 상상적 이미지와 현실적 이미지로 결합하여 인간들에게 ‘행복’과 ‘믿음’과 ‘웃음’을 주는 데 있다.
흔적의 시어 찾기
장황한 서사가 시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 사설적인 말투며, 치렁치렁 매달린 언어의 꼬리에 현대인의 슬픔이 내재되어 있다. 한 시대를 어찌 몇 마디의 말로 또는 시로 대변한단 말인가. 더러 숨죽일 때는 숨을 죽이고 활개를 칠 때는 활개를 쳐야하는 법이다. 시의 행간이 어찌 이토록 격렬하단 말인가.
김홍조의 시 세계는 얼핏 보면 ‘난감’ 그 자체이다. 한 편의 짧은 소설을 보고 있는 느낌이다. 곳곳에 모스부호가 숨어 있다. 시인의 암호로 통하는, 하지만 거기까지이다. 김홍조의 머릿속에 기억되어 있는 모스부호는 7월의 장맛비처럼 뚝, 뚝, 뚜두두둑 시(詩)가 떨어져 내리고 있다. 떨어져 내리는 빗방울에 춤을 춘다. 창문을 여니 빗물이 유리창에 가득 고여 있다. 바람에 창문은 쉴 새 없이 흔들리고 멈출 수 없는 시(詩)의 부호를 김홍조는 적고 있다. 드디어 끝이다. 웃으며 모스부호를 정리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 멈추었다. 시가 기다리고 있다. 이 매력적인 공포, 그는 무섭다는 걸 알면서 기다리고 있다.
시의 집에 갇힌 그가 보인다. 이렇듯 김홍조는 우리 모두가 밟고 있던 시의 세상을 새롭게 조명하고 있다.
사진관 주인 K의 낮과 밤은 대조적이다 햇빛이 있을 땐 포지티브 필름의 세계를 살지만 어두워지면 네가티브의 세계로 옮겨간다 낮의 행동 양식은 양각화의 모습이지만 밤엔 음각화의 형태를 띠고 있다 땅거미가 지기 시작하면 가게 문을 닫고 거리의 아르바이트를 하는데 이는 디카와 DSLR의 대중화에 밀려 고전하는 그의 생존 전략인 동시에 자신의 또 다른 초상에 카메라를 들이대는 행위이다(의도적이든 아니든)
…(중략)…
그의 렌즈는 가짜가 진짜고 진짜가 가짜며 약과 독이 중첩되는 세상을 정면으로 쏘아보고 있다 K는 낮엔 살아 있는 타자를 경배하고 밤이면 죽은 자아를 경배하는 셔터를 날마다 누른다
―「사진사 K의 지극히 사소한 이중생활」 부분
물체의 밝은 부분은 어둡게, 어두운 부분은 밝게 뒤바뀌어 재생된 화상(畵像), “네가티브” 사진의 사전적 정의다. 시인의 사진기는 오히려 세월에 밀쳐진 “모던”이며 “포스트모던”이다. 사진기의 주체는 역시 인간의 모습을 담아내는 데 있다. 뷰파인더를 통해서 굴곡진 삶을 조명한다. 접사로 찍은 사진에는 시간의 상처와 때가 깊게 패여 있다.
시인의 이야기는 가장으로서 의무를 져버린 ‘나’로 인하여 어둠 속에서는 또 다른 ‘내’가 되어 흑백으로 서 있다. 기억의 거울엔 누가 담겨져 있을까? “찌라시”와 “대중” 그리고 작가가 되기 위한 몸부림은 “교만”과 “분노”로 대치되어 나타난다. “앤디 워홀”이 되지 못한 삼류의 비애가 드디어 “싸구려”로 전락을 하고 “전화기”에 매달려 힘든 현실을 토하고 있다. 싸구려 사진사의 사진기에는 “몸속의 뼈와 장기가 모두 드러난 오드리 헵번, 아인슈타인, 마릴린 먼로와 모택동, 글랜 굴드, 리즈 테일러”가 담겨져 있다. “스타”와 “인간”사이에 놓인 사진기의 역할은 “본체를 제거한 본색”을 밤새 인화하는 것이다. ‘현상액’의 수치가 낮을수록 인화의 시간은 길어진다.
김홍조 시에서의 “사진사 K”는 표현대상과 심리적인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하고 테크놀로지에 익숙한 시대의 우화를 찍으려고 한다. 사회와 문화적인 상황을 표현하는 인물사진이란 세상을 제대로 볼 수 있는 시각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사진 중에서 인물사진 만큼 넘쳐나는 것이 없다. 흔하게 찍는 인물사진의 번호표는 전경 속에 가려진 후경을 찍고 싶어 하는 김홍조의 시적 자아이지 않을까.
밤 열 시 라디오는 약속처럼 기적 울리고
폴 모리아의 ‘이사도라’ 플랫폼 적셔오면
안녕하세요 김세원입니다
낮게 깔리는 첼로 음색
간이역에 비
안개 부르는 주술에
유령처럼 누워 있던 영혼 벌떡 일어나
공포가 옹립한 죽음의 상징체계
의 난수표 같은 암호 풀어
식은 피 흐르는 심장 떼어내고
온갖 불온한 혁명의 베이스캠프인
봉인된 골방
의 창백한 공기 위무하는 살풀이, 쿨럭이며
떨어뜨린 흰 수건 들어 올리면
이국의 항구 뒷골목 수은등 아래
배회하던 집시 가수
두고 온 과거와 화해하기 위해 귀향길 오르는,
다시 떠나는 삼등 열차 꽁무니로 긴 여운 남기는
애수의 트럼펫
각혈하던
멜랑꼴리
― 「밤의 플랫폼」 전문
“안개 부르는 주술”은 “각혈하던 멜랑꼴리”로 시인 자신의 삶 주변부는 서정시풍의 시적 공간에서 배경을 시의 제목인 「밤의 플랫폼」으로 잡고 있다. 시간적 배경은 “밤”이며 오래된 기억의 창고에서나 봄직한 “라디오”가 보인다. “밤 열 시”에 “기적”이 울리면 “유령처럼 누워 있던 영”과 “공포” 그리고 “죽음”으로 이어지던 “봉인된 골방”은 “쿨럭”대는 잔기침으로 일어나기 시작한다.
시인 자신의 젊은 시절이 “밤”사이로 떠다니고 있다. 시인의 경계에는 언제나 “밤”이 있고 “밤”과 “시”가 접신을 이루는 순간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나를 전환시키는 다양한 흐름들이 있다. 존재와의 관계성 속에서 시인은 마음의 눈뜸을 가지게 된다.
“밤의 플랫폼”은 소리로 듣고 눈으로 보기도 하며 “밤”의 본질적 속성에 충실하려는 시인의 의지가 보이기도 한다. 거대한 물체로 다가오던 “불온한 혁명”은 “수은등 아래” 다시 과거와 화해를 시도하고 있다. “귀향길”의 “삼등 열차”는 삶에 대하여 시인의 새로운 인식의 지평을 열게 하고 있다. 인간의 영원한 고향은 너무 먼 곳에 있는 것일까.
김홍조 시인의 시는 현대시가 가지는 ‘낯설게 하기’를 비교적 잘 담아내고 있다. 시인의 자아에서 새롭게 발견되는 존재의 형상화, ‘낯설게’는 시니피앙(말), 시니피에(느낌)로 때로는 시적 좌절을 맛보게 된다. 시인의 내밀함 속에 숨겨진 욕망이 구체적으로 표현될 때 ‘낯설게’는 ‘잘 짜여진 언어의 그물’로 새로운 이미지를 창출한다.
시는 논리가 될 수는 없다. 선험적 감각으로 ‘내적인 떨림’을 표현하는 것이다. 즉 시는 언어의 흔적이다. 다른 곳에 속해 있는 것처럼 보이면서 없는 것처럼, 흔적은 바로 드러내지 않음에 있다. 김홍조 시인이 가지는 흔적은 영원한 현재이며, 정지된 지금의 체험이다.
─문학 무크 『시에티카』 (2011. 하반기)
▶김선주
서울 출생. 2010년 『문학과의식』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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