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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최서림의 구멍의 시학 - 구멍, 사랑의 변증법 / 조병세

문근영 2014. 1. 25. 16:13

 

구멍, 사랑의 변증법
 ―최서림의 구멍의 시학

                                   조병세

 


   1. 새로운 사랑

 

   구멍이란 현실의 일부이고, 현실 속에 엄연하게 존재하는 것이지만, 우리는 대개 구멍을 잊고 살거나 보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삶의 욕망이란 공허에서 충만으로 향하지 충만에서 공허로 나아가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구멍이란 결코 완전히 채워지지 않는 것이다. 현실의 가장 첨예한 중심부, 모든 사물의 가장 작은 가운데 속은 텅 비어 있다. 모든 것의 중심부는 비어 있다. 따라서 구멍이란 현실에 없어서는 안 되는 현실의 결여인 셈이다.
   최서림은 이러한 복잡다단한 현실의 구멍을 직시한다. 구멍은 연장(延長)의 층위에서 뻥 뚫린 빈 간격만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현실에서는 도저한 인민들의 사연이 끊임없이 생산되고, 소멸하면서 거대한 역사를 만들어나간다. 그것은 공시적으로 기록되지 않으면 선사(先史)의 그것처럼 잊혀질 것이다. 거기 기록되지 않은 것들의 이야기 속에도 구멍이 있다.
   시인은 이러한 구멍을 적실하게 바라보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그러나 구멍에 대한 시각적 지평을 갖는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지평은 의식적 현실 안에 있고, 구멍이란 의식이 그러모으는 현실의 바깥에 있기 때문이다. 구멍은 구멍이다. 다만 우리는 관념적으로 그것을 역사적·이데올로기적 결여로 개념화할 수 있을 뿐이다. 의미 있게 배치되지 못한 흐트러진 산포(disse?mination), 요컨대 그러한 것들이 구멍을 이룬다. 신화적 배후를 갖지 못한 밤하늘의 흩어진 별들의 아직 이름 없는 묶음이 바로 구멍이다.
   따라서 우리가 정말로 가지고 있고 가질 수 있는 것은 구멍에 대한 추상적 개념뿐이다. 주체를 생산한다는 측면에서 구멍은 인식일 수 없다. 구멍은 주체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게 없다면 현실의 현실다움은 불가능하다. 때문에 구멍이라는 결여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에서 어떤 불가해한 실제적 폐색이 발생한다.
   그러므로, 최서림의 ‘구멍’은 진지하고 무거운 것이다. 그것은 시인의 작법적 취향이나 사상적 편향을 뛰어넘는 것이기에 보다 그러하다. 구멍, 그것은 현실에서 돌출되지 않았으면 하는 엄존하는 현실성이며, 현실이 지니고 있는 어떤 측면의 물자체이다. 현실에는 분명 구멍이 있다. 그리고 구멍은 사람들이 자신을 볼 수 없는 곳에서 현실의 절박한 데를 더듬는다. 최서림은 구멍의 시편들을 통해 이러한 세상의 구멍들의 공통점을 귀납하고, 그리하여 구멍의 원형에 이르려고 한다. 구멍은 그것 자체로 구조적이다.
아마도 「구멍」이 이러한 구멍에 대한 최서림의 원형적 에크리튀르가 아닐까.

 

     나는 원래 구멍 안에서 만들어졌다.
     껌껌하고 긴 구멍 안에서 처음으로
     아버지의 불씨를 이어받았다.
     聖火 봉송하는 릴레이 선수처럼.
     아늑하게 조여주는 긴 터널을 뚫고 나와 드디어
     거친 빛의 세계로 나왔다. 태초의 명령에 따라.
     빛을 받아먹고 내 안의 불씨는
     바람 센 땅의 삼나무모냥 자라 올랐다. 이글이글.
     언젠가 나는 또 하나의 구멍으로 돌아가리라.
     나의 불은 그 안에서 소멸되리라. 충직하게.
     신화와 소문의 산실, 비밀스런 구멍은
     내 몸이 드나드는 집이고
     불이 제 길을 틀어가는 통로이다.
     나는 구멍으로 너를 사랑해 왔다. 정직하게.
     사랑은 불이다. 참말로
     나의 불은 눈구멍, 귓구멍, 콧구멍, 입구멍, 땀구멍
     그리고 처음으로 내가 빚어진 구멍을 통해
     네 안의 핵발전소로 흘러들어간다. 법칙보다 고집스럽게.
     불과 불이 얽혀서 핵처럼 터지는 사랑.
     구멍 안에서 탄생하는 또 하나의 불씨 알.
     또 하나의 눈물 방울.
                                ―「구멍」 전문

 

   최서림은 자신이 ‘구멍’에서 왔음을 고백한다. “정직하게.” 거기 ‘구멍’이란 어떤 곳일까. 「구멍」을 통해 비로소 ‘구멍’에 어울리는 적당한 술어를 발견하게 된다. 「구멍」에서 비로소  구멍이 ‘∼하고 싶은’ 대상이 아니라 반드시 ‘∼해야 하는’ 것임을 알게 된다. 구멍은 시인이 태어난 곳이고, 모든 생명(‘불씨’)의 기원이며, 동시에 ‘소멸’의 양태이기도 한, 생명의 필연이다. 생과 사를 인간 삶이 어떻게 할 수 없듯이 구멍은 필연적인 것으로서 우리에게 들러붙어 있다. 살아 있는 것에 뻥 뚫려 있다. 살아 있는 각자에게는 모두 구멍이 있으며, 각자의 구멍은 각자가 스스로 바라볼 수 없다. 각자의 구멍은 각자에게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시(詩)는 이 세계 속에서의 ‘나’를 감정의 고백으로 규명하는 문학적 장르이고, 「구멍」은 최서림 자신을 규명하는 시적 작업이다. 최서림은 ‘나’를 규명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필연적으로, 자신의 기원이 구멍에 있음을 고백한다.
   구멍, 거기 빈 곳에 “불”이 있다. 물이 생명의 기원이라면, 불은 생명의 현존이다. 불은 에너지이고, 에로스의 양태이다. 살아 있는 존재는 하나의 불로서 현존한다. 구멍 안에서 불은 꺼지지 않고 타오른다. 구멍은 불을 보존하고, 그리하여 생명을 연결한다. 구멍은 생명이 살아 있다는 증거인 셈이다. 구멍은 생명에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최서림은 한 발짝 더 나아가 “나는 구멍으로 너를 사랑해 왔다. 정직하게./사랑은 불이다. 참말로”라고 고백한다. 그러니까 구멍에서 불이 보존되고, 다른 것에 옮겨 붙는다. 여기서 옮겨지는 것, 연결되는 것은 생명이다. 생명을 연결하는 이 매개를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 구멍을 통해 불이 옮겨지는 이 매개 자체를 무엇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것은 사랑이다. 사랑이 없으면 구멍이라는 통로는 필요가 없고, 불도 타오를 일 없다. 사랑하기 위해 구멍도, 불도 의미가 있다. 사랑은, 단순하게 말하면 결국 ‘너’에 대한 내 삶의 기획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사랑, 이 짧지만 숨찬 말 속에 ‘너’에 대한 기획이 얼마나 복잡하게 도사리고 있는가. 사랑의 기획은 초월적이지만 관념적이지 않다. 현실의 너머나 현실의 밑을 파고들지만, 그것은 생각 속에서만 상상되는 것이 아니다. 구멍을 통해 해명되고, 학습된 ‘너’에 대한 사랑은 낭만적인 것도 아니다. 구멍은 은폐된 형식으로 존재하지만 현실에 없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우리의 이 기계론적인 현실에서 단 한 발짝도 벗어나지 않는다. ‘나’의 생명과 ‘너’에 대한 사랑의 기획을 매개하는 불은 “눈구멍, 귓구멍, 콧구멍, 입구멍, 땀구멍/그리고 처음으로 내가 빚어진 구멍을 통해/네 안의 핵발전소로 흘러들어간다.” 그리고 그것은 “법칙보다 고집스럽”다. 근대적 자연물리학이나, 시민사회의 윤리 같은 법칙보다 구멍의 사랑은 고집스럽다. 흔히 법칙은 무감정하게 당신을 향한 사랑을 포기하고는 한다. 정신분석학이나 시민사회의 근대적 윤리란 관계를 계산하고, 감정의 손해를 덜 보려는 경제적 태도에 기초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구멍의 사랑은 그렇지 않다. ‘나’는 ‘너’를 그렇게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상대에 대한 감정, 설렘의 세로토닌은 3년을 넘겨 분비되지는 않는다고 한다. 하지만 ‘나’의 ‘너’에 대한 사랑은 그러한 법칙보다 고집스럽다. 「구멍」, 관념적인 사랑이 아니면서 세로토닌의 분비가 멈춘 다음에도 ‘너’에 대한 ‘나’의 사랑은 멈추지 않는다는 주장. 구멍의 사랑은 고작 신체의 설렘으로 증명되는 뇌과학적 애정과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불과 불이 얽혀서 핵처럼 터지는 사랑”이다. 그것은 “구멍 안에서 탄생하는 또 하나의 불씨 알./또 하나의 눈물방울”이며, ‘법칙’의 사랑이 휘발된 자리에서 ‘나’가 지금 없는 어떤 필요한 것으로써 이전에 없던 것을 요청하는 형태의 사랑이다.
실은 이 새로운 사랑을 위해서 최서림은 구멍으로, 그 허무한 곳으로 돌아간 것은 아닐까. ‘∼하고 싶은’ 사랑이 아니라 반드시 ‘∼해야 하는’ 사랑으로 회귀하기 위해 시인은 고백한다. “나는 원래 구멍 안에서 만들어졌다”고. 말 그대로 구멍을 닮은 이 정직하고 겸허한 고백은 모두 ‘너’를 위한 것이다.


   2. 구멍이라는 사랑의 양태

 

   우리는 「구멍」을 통해 ‘너’를 위해 ‘∼해야 하는’ 사랑의 형식을 발견하고는 그것에 매혹된다. 사랑에 갈급하고, 거기에 자진하여 빠져들고, 희열을 느끼고자 하는 게 살아 있는 것들의 공통된 특징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구멍의 원형에 이르게 한 시인의 에크리튀르를 역순으로 좇게 된다. 구멍의 원형을 생산한 에크리튀르를 뜯어내, 구멍의 원형으로 귀납된 것들에서 다른 사랑의 은유들을 행복하게 찾아 헤맨다.
   구멍은 현실의 시차(parallax)에 의해 발견되어지는 게 아니다. 구멍은 시차가 폐쇄된 곳에, 비가시적인 것으로 남아 있다. 기성의 언어라는 현실의 시선으로는 구멍을 바라볼 수 없다. 때문에 우리는 구멍을 개념으로만 존재화시킬 수밖에 없고, 은유를 경유해서만 구멍을 의미화시킬 수 있다.
   가령, ‘대나무’의 ‘구멍’ 같은 것에서 영영 총체화 할 수 없는 구멍의 일부를 구체화하는 것이다. 시인은 대나무가 사랑을 하는 고유한 무늬에서 타자를 향해 무한으로 휘어지는 구멍의 양태를 사유한다. 대나무는 선천적 운명으로 사랑을 선택하고 실천(수행)하는 것의 좋은 비유다.
   비어 있다는 것은 타자로부터 사랑받기 원한다는 것을 비유하지 않는다. 가슴이 뻥 뚫린 것처럼 허전하다는 것은 누군가를 사랑하여 그 누군가에게 가슴에 있는 자기를 빼앗겼다는 것 아니겠는가. 자의식이란 자신의 내면에 새겨지는 것이고, 타자가 접근할 수 없는 자기애의 창고인데, 거기에 타자가 들어와 사랑받고 있다는 것은 자기가 빈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러나 「구멍」에서의 고백처럼 살아 있는 것들은 그러기 위해 “태어났다”. 구멍은 사랑이라는 것이 사랑함의 크기, 그만큼을 베어 문 빈자리이다. 이것을 스스로 운명으로 가지고 태어난 생명은 그 사랑이 얼마나 “곡진(曲盡)”할 것인가.
   구멍의 새로운 사랑, 즉 나를 위한 것이 아닌 ‘너’에 대한 기획은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변증법적 연쇄를 이룬다. 당신을 사랑한다. 그리하여 당신과 맞닥뜨린 내 정체(가슴)가 비게 된다. 그리하여 빈 것으로 된 ‘나’에게 누군가가 사랑에 빠진다. ‘나’는 그러한 변증법적 연쇄를, 현실에서는 뚝뚝 끊어져 있는 응당한 에로스의 연쇄를 이어 붙이는 자다.
   이러한 ‘대나무’와 같은 좋은 비유를 통해 우리는 구멍이라는 사랑의 양태를 구체화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자유와 놀이다. ‘너’에 대한 나의 기획, 구멍의 사랑은 구체적으로 자유와 놀이를 통해 수행된다.

 

     대나무 구멍 안에 감추어진 소리를 읽어야 한다
     겨울밤 미친년모냥 흔들리며 울어댄 소리,
     가을날 풀벌레보다 더 외로운 빈 구멍의 소리, 침묵의 소리
     남국의 햇살 기름이 자르르 빛나는 영원의 소리.
     태초의 소리부터 부지런히 먹어봐야 한다
                            ―「대나무」 부분

 

  「대나무」에서도 ‘~해야 한다’는 구멍의 사랑의 술어는 정직하게 지켜지고 있으며, 이를 통해 ‘나’는 대나무의 안을  드나드는 소리를 ‘읽’고, ‘먹’는  것으로 대나무가 품은 에로스를 증명한다. 그리고 대나무가 품은 에로스란 사물과 사물의 황홀한 연대임을 밝혀낸다. 대나무의 구멍처럼, 구멍은 자신과 타자가 연결되는 접합부에  놓인다. 가슴이 왜 뻥 뚫리는가. 너를 사랑하느라 내 가슴이 뻥 뚫린다. 너를 들여놓느라 내게만 골똘하여 가득 찼던 내 가슴이 빈다.

 

     구멍은 사물이 놀 수 있는 자리이다
     구멍이 없는 사물들은 자유가 없다
     대나무들은 각자 자기의 구멍을 차지하고서
     스스로 놀고 있다
     구멍에서 구멍으로 이어지는 큰 구멍 속에서
     대나무들은 서로 얽히면서 부대끼면서도
     각자 바로 놀 줄 안다
                           ―「대나무」 부분

 

   이렇듯 대나무는 구멍이라는 에로스를 운명으로 가지고 태어났다. 그래서 다른 것을 자기 안에 들이는 생명으로서의 당연한 매혹 또한 겸허히 받아들인다. ‘자유’란 그런 것이다. ‘자유’란 존재자의 이기적인 자기보존을 넘어 자기 손해와 타자의 이익을 선택하는 행위일 뿐 아니라, 유전자처럼 살아 있는 현존에 필연적으로 새겨진 본성이다. 그리고 이때의 ‘자유’는 강자의 입장에서만 펼쳐낼 수 있다.
   이러한 대나무의 운명적인 유유자적함 때문에 “겨울날 삭풍에”도 그렇게 “더욱 크게 휠 수 있”다. 요컨대, 자유는 존재에 여유와 푸근함을 부여한다. 그러한 자유를 제 안에서 획득한 존재는 정말로 ‘놀’ 수 있다. 그것은 구멍을 사이에 두고 ‘너’와 ‘나’가 “서로 얽히면서 부대끼면서도/각자 바로” 노는 일인데, 이는 다른 말로 서로가 사랑으로 관계 맺으면서 각자를 더욱 확장시켜 나가는 일이기도 하다.
   여기에 에로스라는 자유와 놀이의 또 하나의 변증법이 있다. 대나무의 자유는 자신의 행복이 아니라 너의 행과 복을 선택한다. 대나무는 자신을 비우고 구부려 너의 행과 복을 택한다. 그것을 자신의 운명적 놀이로 만든다. 대나무는 그것으로 충만하고, 행복해진다. 구멍은 대나무의 아모르파티다.

 

     오동은 씨앗 시절부터 그 안에 구멍을 키워 왔을 게다
     마음에 구멍이 뻥뻥 뚫려 있어 놀 줄 아는 축들만이
     속이 텅 비어버려 쓸모없는 오동의 마음을 알아차리는 법
     구멍 없는 것들은
     놀 줄도 놀 자유도 모른다
     요새 사람들 노는 게 어디 노는 것인가
                               ―「오동나무」 부분

 

   타자를 에로스의 형식으로 좋게 받아들이느라 “마음에 구멍이 뻥뻥 뚫”린다. “오동의 마음”도 구멍의 사랑이다. 그 역시 구멍의 사랑을 수행하느라 숙명적으로 텅 빈 채 태어났다. 그리고 숙명적 ‘텅 빔’을 받아들여 겸허해지는 자들이 “속이 텅 비어버려 쓸모없는 오동의 마음”도 안다. 이 역시 구멍이라는 에로스의 변증법적 연쇄가 아닌가. 상처가 상처에게 손을 내밀듯, 누군가를 향해 사랑에 빠진 자는 역시 그러한 자를 알아본다. 그리고 그것이 삶의 숙명임을 안다. 모든 사물들은 다른 사물들과의 관계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한다. 다른 것과 좋게 관계 맺어 행과 복이려는 것이 다름 아닌 살아 있는 것의 살아가는 숙명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한편, “구멍 없는 것들”은 하나의 불가능한 욕망이고 허한 백일몽일 뿐, 현실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구멍이 없는 것”은 관념으로만 존재한다. 가령, 타자와 분리된 ‘나’라는 관념 같은 게 그것이다. 그러한 ‘나’에게는 구멍이 없을 것이다. 욕망의 대상인 이러한 ‘나’처럼 인간은 각자를 그렇게 바라보지만, 그런 ‘나’는 있을 수 없다. 그러한 욕망은 언제나 허기를 머금고 있을 뿐이다. 투명하고 고유한 ‘나’란 있을 수 없다.
   그러한 관념은 관념 그 자체로 투명해지고 고유해지려는 관성을 지니고 있다. 때문에 항구적으로, 관념 속에서, 타자를 끊임없이 밀어낸다. 하지만 실제적으로 내 안의 타자란 영영 비워낼 수 없다. 그러한 관념은 존재자를 타자와 행복하게 조우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타자를 일종의 불순한 것으로서 배척하게 만든다. 배척은 배척의 대상을 반드시 나보다 더 못하고 비교하기 싫은 것으로 만들어야만 가능하다. 즉, 배척은 열등에 대한 혐오의 운동이다. 욕망에 사로잡혀 여유와 자유라고는 없는 약자의 삶이 실은 “구멍이 없는 것들”의 삶이다.
   극단적인 약자는 허구 속에서 자신의 내부에 있는 구멍을 부인한다. 자신의 내부에 ‘놀’ 수 있는 간격(자기가 인정한 구멍)이 없으니 놀이 역시 불가능하다. 그리하여 약자는 비현실, 즉 유사 ― 삶으로서의 놀이만을 추구한다. 닫혀 있는 쾌락의 세계에서 자기의 의미를 잃어간다. 거기에서는 그 자신조차, 아무도 행복하지가 않다.


   3. 구멍의 사랑, 시간의 숲이 되는 일

 

   그러나 구멍이 ‘나’와 ‘너’의 문제이기만 하다면, 전혀 가볍거나 밝게 읽히지 않는 이 행복론은 이토록 슬프고 처연한 모습을 할 필요도, 해서도 안 되었을 것이다. 구멍은 우리 모두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고, 현실에서 우리 모두에게 공통되는 결핍을 지시하고 있기 때문에 퇴행적으로 웃고만 있을 수 없다. 구멍의 사랑의 기획은 타자인 ‘너’에 대한 것인데, ‘너’라는 것은 숱한 타자성의 임시적 결절점 같은 것이다. 따라서 ‘너’를 사랑한다는 것은 ‘너’를 이룬 것들을 복수적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이고, 사랑받은 ‘너’는 구멍을 인정하고 또 다른 ‘너’와 사랑에 빠진다. 구멍의 사랑은 너와 나의 닫힌계일 수가 없는 것이다. 사랑에 빠진 자가 세계를 좋게 바꾸어가듯, 구멍의 사랑은 변증법적으로는 물론 내재적으로도 외부로 확산해 가는 운동이다. 이렇게 확산해 가는 구멍의 사랑은 숲을 닮는다.
   구멍이 있는 것들과 구멍 자체는 타자를 단일한 하나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타자에는 복수성(pluralite?)이 내재돼 있으며, 구멍 역시 타자를 완전한 하나가 아닌 흩어진 다수로 받아들인다. ‘나’가 구멍의 사랑으로 받아들이는 ‘너’, 타자란 고유한 하나의 이름 전체가 아니라 여러 이름의 부분들이다. 이처럼 내 안의 타자란 하나가 아니라 다수이며, 그래서 그것은 가령, 나무가 아니라 흡사 숲의 모습으로 주체의 내면에 펼쳐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 내 안의 풍경과 접속하는 일은 시간의 일이다. ‘나’는 구멍을 통해 숲과 다시 연결되고 그들과 공시적인 시간을 살아냈음을 깨닫는다.

 

     깊이를 드러내지 않는 숲
     가문비나무들이 죽을 힘 다해
     시간과 바투고 있다
     별빛처럼 내려앉는 시간을 비틀어 
     나이테 안으로 비끄러매고 있다
     시간의 형상대로 빚어진 가문비나무들
     제 안에 제 시간으로 쟁여 가두고 있다

   

     살갗처럼 꺼칠꺼칠해진 나이
     푸석푸석해진 목소리
     몸은 정직하고 시간은 공평하다
     정복당하지 않으려 시간과 바투다
     내 몸에 퇴적된 시간
     가파르게 휜 세월의 모습대로 만들어진
     내 안의 숲
                   ―「가문비나무숲」 부분

 

   숲, 거기서 특정한 시간의 두께가 형성된다. 그것을 무엇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하나의 사연이란 시간에 의해 생명력을 얻는다. 숲에는 나무들이 조금씩 참여한 시간이 한 덩어리로 드리워져 있다. 그것이 그들의 공통된 사연이다. 그러한 것들이 구멍에 품어진다.
   그러므로 「가문비나무숲」이란 공통된 시간, 공통된 사연에서 뚝 뜯어낸 한 개인의 사연의 형상화인 것이다. 공통된 사연들의 시간을 다시 “제 시간”으로 갖기 위한 몸부림의 글쓰기(e?criture)인 것이다. 때문에 나무는 “시간과 바투고” 그 시간을 “제 안”에 들이기 위해 “비틀어”야만 했던 것. 하지만 시간이란 것은 “공평”하다. “바투고” “비”튼다고 하여도 “제 안”에 깃들 수 있는 시간의 한계란 분명하다. 그러하기 때문에 나무는 숲을 이룬다. 다른 나무들과 연결되어야만 자기의 시간과 자기의 사연을 갖기 위해 “죽을 힘”을 다할 수 있다.
   인간에게 나이란 나무의 나이테와 같다. 공평한 시간은 인간에게도 각자의 능력만큼만 시간을 허락한다. ‘정직한’ 몸은 다른 시간을 갖기 위해 노력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간은 공평하다”. 자신의 속도와 방향을 잃는 법이 없다. 모두가 한때는 다른 운명을 갖게 되기를 바란다. 하지만 그것은 부질없는 일이다. 시간은 공평하게도 어느 누구에게도 되돌려지지 않기 때문이다. “꺼칠꺼칠”하고 “푸석푸석”한 것들은 살아남느라 차라리 “정직하게” 그 모양을 하게 된다.
   그리하여 이제 시인은 한 그루의 가문비나무에게서 자신의 삶의 한 단면만을 보지 않는다.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가문비나무들, 그들이 이룬 숲이다. 시인은 그 속에서 그들이 공평하게 나누어가진 시간들과 사연들을 읽는다. 가문비나무 한 그루 한 그루가 자기만큼의 시간과 간격을 지니고서 서로에게 위안이 되는 숲이라는 서늘한 공동체 안에서 말이다. 다른 나무의 그늘이 아니라면 매끈하지 않은 가문비나무의 겉껍질 같은 삶이란 얼마나 비루할 텐가. 하지만 서로 모여 있으므로 각자 다른 나무를 위한 그늘의 역할을 해줄 수 있다. 그렇게 시인은 가문비나무숲의 일원이 된다.
   끝내 그렇게 함께 숲을 이루어가는 일이란 소멸이 아닌 영원한 탄생의 무늬를 한다. 나는 한 그루의 나무로서는 소멸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숲의 일원으로서는 영원을 살게 된다. 내 소멸은 다른 나무의 삶의 에너지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숲이 계속된다는 것, 그것은 시간을 구부러뜨리는 일이다. 이렇듯 시간의 재생산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구멍의 사업을 닮았을 것이다. 그리하여 구멍의 사랑은 공시적임과 더불어 본질적으로 통시적인 것이다. 공동체로서의 숲은 숲 전체가 사라지지 않는 한 은유로서가 아니라 말 그대로 공시적이며 통시적인 사연들이 영원히 반복되는 곳이다.

 

     가문비나무숲에는
     숲의 나이만큼 오래오래 뒤틀어진 시간이
     숲의 공기만큼, 공기의 두께만큼
     충만하게 쌓여 있다
     이른 아침 가문비나무 숲에는 축축한 시간이
     물방울처럼 고여 반짝이고 있다
     찰랑, 찰랑거리고 있다
     이슬에 젖은 숲이 시간을
     도요새 알 같이
     둥글게 품어내고 있다
                            ―「가문비나무숲」 부분

 

   이러한 숲이라는 공동체가 순환시키는 것은 생명이다. 최서림이 구멍의 지평을 통해, 숲에서 발견한 것은 생명의 성숙이다. 생명은 공시적이고도 통시적인 연대를 통해 시인 자신이 구멍에서 왔듯 새로운 생명을 재생산한다. 그것은 부드러운 껍질, 혹은 말랑말랑한 것으로의 진화가 아니다. 우월한 것으로의 진화는 숲의 일도, 구멍의 사업도 아니다. 그것은 구멍의 사랑이 아니기 때문이다. 숲을 이루는 것은 진화론적 세계의 일부분을 이루는 것이 아니다. 외려 진화론이라는 일방적 체계를 부수는 일이다. 숲에서는 우열이 없다. 최서림은 그곳을 그것만으로 “충만”한 곳으로 본다. “찰랑거리”는 곳이며, “젖”어 있고, 아마도 따뜻한 곳이다. 그러니 뒤틀린 시간들이 거기서 그 모양대로 편안해질 수 있다. 숲의 일은 그러한 시간들을 그 모양대로 인정하고 품는 것이다. 그리고 “꺼칠꺼칠”한 숙명을 다시 기획하면서 숲의 재생산은 영원성을 획득한다. 때문에 “숲은 나이를 모른다”. 돌아가고픈 시간이 정말로 있다면, 하나의 삶이 그리는 에로스에 통시적으로 우열이 있다는 말일 것이다. 하지만 돌아가고 싶지 않다. 때문에 “꺼칠꺼칠해”지는 것은 늙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가문비나무숲과 하나가 되는 일이다. 나이도 모르고 늙지 않으므로, 숲은 영원하다. 그렇게 ‘숲’은 현실의 통시적인 구멍인 것이고, 구멍의 통시적 사랑에 대한 은유이다. 구멍의 사랑은 공시적으로 내 안의 타자를 향한다. 더불어 구멍 자신의 비루한 앞과 뒤의 시간들을 껴안는다. ‘나’는 이러한 구멍을 통해, 구멍의 사랑을 통해 비로소 나무처럼 이름 없는 인민들과 더불어 같은 시간을 살고 있으며, 그들과 더불어 영원해지려는 시간에 참여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결국은 모두가, 나무들 모두가 혼자 서 있는 것처럼 보여도 결국 숲의 일원일 수밖에 없음을 깨닫는다.


   4. 구멍, 사랑의 보편성

 

   거기, 구멍이 껴안은 ‘숲’으로 은유된 시간들에는 “깊이” “파고들수록 더욱 까끌거리는 진실”이 감싸져 있었던 것이다. 거기, 자신의 내면에 숲의 형상으로 펼쳐진 깊숙한 곳에서 시인은 “까시래기”와 같은 진실을 만나기에 이른다. 그렇게 최서림은 구멍은 왜 사랑이어야만 하고, 그 사랑은 왜 숲의 모습을 하고 있어야만 하는가에 대한 정직한 대답에 이른다.

 

     끄집어내려고 꿈틀거릴수록
     점점 더 깊이 파고드는 까시래기
     파고들수록 더욱 까끌거리는 진실,
     광주는 영원한 보리 까시래기인가
     살아갈수록 살갗이 두꺼워져야만 하는 나에게
     아직도 까시래기답게 찔러오는가
     속옷에 착 달라붙어
     밤낮 잠도 못 들게 까끌거리던,
     간, 염통, 혈관까지 파고들어 와서는
     미치고 환장하게 들쑤시다가
     나도 모르게 정말 나도 모르게
     어느새 녹아 사라져버린 보리 까시래기, 지금
     인조 대리석보다 더 매끄러워진 내 등짝에 달라붙어서도
     여전히 보리 까시래기일까
                               ―「까시래기」 전문

 

  ‘나’는 광주에 자신의 내면을 가져다 놓고 그 안쪽에서 광주를 보면서, 까시래기라는 이야기(사연)를 만들어낸다. 광주는 지금까지도 구멍이었던 것이다.
  거기서 ‘나’는 지극히 사소한 보리낱알이 잔뜩 붙어 있는 꺼칠꺼칠한 그것을 떠올린다. 단단하고 매끄러운 인조석 같은 ‘나’는 광주를 “까시래기”로 본다. 현실의 ‘나’는 “끄집어내려고 꿈틀거릴수록” 의도대로 되지 않던 것을 기어코 끄집어내어 현실과 실제 광주 사이의 경계에 선다. “까시래기”는 현실과 실제 광주 사이의 경계이자 매개이다.
  까시래기라는 말의 태생 자체가 지금의 현실과 실제 광주를 둘로 뜯어낸다. 까시래기는 가시랑이의 경상도와 전라도에 공통된 방언이고, 교양 있는 서울의 말로부터 경상도와 전라도만큼의 공통된 먼 거리를 갖는다. 현실에서 받아들여진 ‘광주’라는 의미로부터 경상도 태생인 ‘나’와 광주의 언어는 결코 좁혀지지 않는 공통된 구멍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까시래기라는 언어로 광주의 사연에서 빈 곳, 구멍을 더듬는다.
  「까시래기」에서처럼 최서림은 구멍을 통해, 잊혀진 채 살아 있는 어떤 아픈 현실에 대해 “여전히”라는 간격 벌어진 말로 맞선다. 가령, 최서림에게 있어 ‘광주’라는 사건은 지나간 이야기가 아니다. 지나가야만 하는 이야기도 아니다. 그것은 언제든 새롭게 불러와야만 하는 이야기다. 광주가 사랑이라면 ‘새로이 와야 할 사랑’인 것이다.
   하지만 최서림은 광주를 해석하는 자가 아니다. 시인이라는 공동체적 위치는 해석하는 게 아니라, 지금까지의 현실의 해석을 부수는 역할을 갖는다. 그리하여 기존의 해석에서 부서진 광주라는 사건은 “여전히” 지금의 현실을 횡단하게 된다. 그리고 그 상처 역시 지금의 현실을 서성인다. 광주는 구멍이 되고, 새로운 사랑을 필요로 하게 된다. 광주라는 구멍을 부인하는 사람들과 달리 최서림은 광주에 대하여 승리하지도, 패배하지도 않았다. 때문에 “까시래기”를 앓는다. 그에게는 현실의 많은 것들이 광주처럼 아직 저 먼 고지이며, 현재진행형의 오래된 싸움이다.
   주목해야 할 것은, 광주에서 무관해도 되는 현실의 위치에 있는 자연인이 그것을 자신의 책임으로 짊어지고 노래하고 있다는 점이다. 자유인으로서의 ‘나’가 거기에 있다. 그러한 ‘나’는 구멍 뚫린 아픈 현실을 자신과 무관한 것으로 내버려두지 않는다. 현실에는 “여전히” 고유한 사연을 자아내는 숲이 많다. 거기엔 나무들이 있고, “까끌거리는” 시간들이 있다. 어떤 주름지어진 시간, 사건의 그때 그 모습 그대로 있다. “매끄러워진” 등이어도 ‘나’는 “까끌거리는” 그 시간들을 안다. 구멍을 통하여서다. 그것은 “제 안”의 시간들과 닮은 것이기 때문이다. 시인은 “제 안”의 시간들이 그러한 시간들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안다. 그리하여 ‘나’는 지금의 광주가 “제 안”의 시간들과 다른 시간들 속에 있다는 것 또한 안다. 두 개의 다른 시간들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둘 사이에 빈 것을 들여놓는 일이다. ‘나’는 거기에 자신을 들여놓는다. 광주의 빈 곳에 자신을 가져다놓고 가만히 둘을 이어서 더듬어본다.
   그것은 ‘나’가 시인이란 책무를 떠맡는 일이었을 것이다. 「까시래기」의 입장에서는 지금 광주의 빈 곳을 보는 자가 시인이다. 그러한 미지근하고 아픈 현실에서 자신의 것과 같은 구멍을 보는 자가 시인이다. 자신과 닮아서 사랑에 빠지고, 때문에 그것을 다시 살아 있게 만드는 게 시인이다. 살아 있다는 것은 삶을 산다는 것이다. 논다는 것이다. 광주라는 구멍은 “여전히” 슬픈지 어떤지 모를 이야기를 노래로 부른다. 시인은 그 노래를 같이 부르며 뚝 끊어져 있던 시간들을 이어 붙이는 자다. 그래서 부르면 부를수록 깊은 “광주는 영원한 보리 까시래기”이다. ‘나’는 광주라는 통시적인 시간을 “나이를 모”르고, “늙지 않는” 숲으로 데려간다.
   이렇듯 다 끝났다고 말하는 이야기에서 아직 ‘여전히’ 살아 있는 것(구멍)의 아픈 곳, 현재진행형의 시간을 오래 바라보는 자가 시인이다. 그리하여 시인은 지금은 없는 새로이 와야 할 구멍의 사랑의 공동체적인 보편성을 두껍게 한다. 그것이 가령, 새로운 광주라는 숲을 이루는 일이다.
   공동체에 보편적인 사랑은 사랑을 정치적으로 사유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다. 즉, 사랑을 정치로써 기능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다. ‘~해야 한다’의 구멍의 사랑은 정치라는 기능의 양태를 갖는다. 구멍의 사랑은 타자를 향하고, 공동체적인 것이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나’와 ‘너’는 물론, 숲을 그 정직한 모습대로 건강하고 행복하게 만드는 일이 정치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러기 위해서는 결여의 열등함을 보듬고, 우열의 체계를 부드럽게 녹여, 새로운 숲을 이루어야 한다.
   하지만 시인은 결코 정치가가 아니다. 다만, 구멍을 사랑하는 자이다. 잊혀진 채 살아 있는 것을 ‘여전’하게 보듬고 사랑함으로써, 시인은 지금 여기에 새로 와야 할 정치를 불러온다. 사랑이 정치를 통해 공동체에 편만하게 울려 퍼지길 기원한다. 노래로써 서로의 사랑으로 살아 있는 아픈 구멍들이 위무되길 기원한다.
   현실의 모든 것은 다수로 이루어져 있지만, 어쩌면 사랑, 그것만이 완벽해질 수 있는 ‘하나’이고, 때문에 삶은 비극이면서 희망일 수 있는 것일 게다. 내게 숙명적으로 빈 것이 있으므로 ‘나’처럼 구멍을 품은 ‘너’를 사랑하듯, 모두에게 구멍이 있어 도리어 삶은 희망적이고, 살만한 것이다.

 

 

 

  2011년 시에 신인 평론 추천서

 

  문자의 이면에서 현동하는 삶

 

 

   글을 쓴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에 관한’이라는 꼬리표를 단 비평은 두 개의 장치를 통과해야만 미적으로 승화될 수 있는 글이기에 그 어떤 여타의 글보다 쓰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조병세의 「구멍, 사랑의 변증법―최서림의 구멍의 시론」은 자신만의 고유한 문체와 사유를 녹여낸 평론이기도 한데, 이 처녀 비평문은 그가 무한히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이 내재된 보증수표인 동시에 그가 새로운 언어문법을 정초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비평가라는 사실에 이의를 달 수 없게 만든 수작에 해당하는 평문이다.
   비평이란 한 세계와의 만남을 통해서 새로운 세계를 현시하는 지난한 작업이다. 분명 글쓰기의 작업이 녹록하지 않은 것임에 틀림없지만, 텍스트와 치열하면서도 힘들게 대면하여 한 세계를 투시하려고 노력하는 새로운 비평가 조병세의 태도를 높이 사고 싶다. 비평은 단순한 분석의 작업이 아니다. 그것은 세계의 의미읽기인 동시에 세계와 대면하는 방식이기도 한데, 조병세의 금번 평문은 단순한 문자읽기가 아니라, 문자의 이면에서 현동하는 삶―시간―세계를 예리한 시선으로 포착하고 있다.
   따라서 조병세가 훌륭한 비평가로 성장할 것을 의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글쓰기 문법을 새롭게 진일보시킬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끝으로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시류에 편승하지 말고 자신만의 독특한 문체의 완성을 통해서 고유한 비평의 세계를 구축하기를 바란다는 점이다. 전무후무한 비평담론을 창조한, 글쓰기의 전범(典範)이 바로 조병세이기를 기대한다. 부디 온 천하를 감동시킬 아름다운 그 말의 세계가 조병세의 글이었으면 좋겠다. 발전이 기대된다. 축하한다.       

                         추천위원/김경복(문학평론가, 경남대 교수) 
                                       이경호(문학평론가)
                                       김석준(문학평론가)


 

 


  평론 추천소감

 

  가난하므로 쓴다

 

 

   먼저 김석준, 김경복, 최서림 선생님, 그리고 사모님께 감사드린다. 김석준 선생님은 내가 벽에 막혀 더듬거릴 때마다 그 길은 가능하다고 하셨다. 거기 희미하게 길이 나 있다는 걸 어떻게 아셨을까. 가끔씩 선생의 머릿속에 내포돼 있는 인식들이 무얼까 소스라치게 두려울 때가 있다. 김경복 선생님이 아니었다면 부끄러움도 모른 채, 마음도 없는 글들을 그대로 내버려두었을 것이다. 선생님의 지적이 있었으므로, 이나마 글이 된 것이라 생각한다. 최서림 선생님은 늘 그럼 할 수 있지, 라고 하셨다. 그 경상도 청도 억양의 말 속에 이리 큰 게 들어 있을 줄 몰랐다. 나는 그 말을 오래 사랑했다. 사모님은 기꺼이 최서림 선생님과 함께 몇 번이고 내 글을 읽어주셨다. 비단 그뿐일까. 지난겨울에도 내 가슴은 어떤 무심한 한파보다 더 추울 때 많았으나, 사모님의 심사(心事)에 마음의 한 자리는 그 누구보다 따뜻했다. 더불어 지면을 허락해주시고, 부족한 글을 꼼꼼하게 읽어주신 양문규 주간님께도 감사드린다. 혼자였다면 그 무언가 불가능했을 것이고, 행복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정말이지, 할 말은 감사하다는 말뿐일 것이다. 그럼에도 몇 글자가 더 허락된다면, 이 시대는 무언가 잘못됐다고 적고 싶다. 이 시대는 무언가 잘못됐다. 당신이 너무 가난하다. 당신을 위해 무언가를 쓸 수 있기를 바란다. 당신이 나다.

           

 

─『시에』 (2011. 여름)

 

 

▶조병세
서울 출생. 서울과학기술대 대학원 문창과 졸업.

출처 : 시하늘
글쓴이 : 보리향(菩提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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