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준 시 깊이 들여다보기
화장한 언어와 슬픔의 민낯
송종원
박성준 시의 언어들은 화려하다. 그의 시만큼 다종다기한 시의 대상이 출현하는 시도 드물 것이다. 그의 시는 꽃을 이야기하다 돌연 어느덧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고 있고, 누군가를 호명하다 어느새 피에 대해서 쓰며, 피를 이미지에서 느닷없이 입술의 힘으로 비약하는 식이다. 다소 혼란을 일으킬 정도로 복잡다단한 그의 언어 운용방식은 무언가를 덮어버리거나 지워버리려는 화장술을 연상시킨다. 그런데 이 화장술은 좀 특이한 데가 있다. 그의 언어가 복잡하고 화려해지면 할수록 기이하게도 그의 시에는 다른 어떤 무엇으로도 덮거나 지워버릴 수없는 슬픔의 민낯이 그려진다. 화장의 비유로 풀자면 화장이긴 화장이되 화장 불가능한 무엇을 드러내는 화장인 셈이다. 다시 말해 박성준의 시에는 비릿하면서도 순결한 슬픔의 냄새가 난다. 이를 지우려 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을 지울 수 없음을 수락하고 끊임없이 언어의 화장에 몰두하는 시인을 모습을, 그리하여 언어를 통해서라도 슬픔을 다른 무엇으로 변환해내려는 작업을 이번 그의 신작시들에게서 읽을 수 있었다.
나는 왜
열 살부터 너라는 이름의 평전을 쓰기 시작했니?
동무야, 화단 밖에는 너보다 일찍 다녀간 통증이 있단다
부르자마자 입술과 헤어지는 말이 있단다
꽃을 감싸고 있단다
저 꽃은 꽃이 아니려고 애 쓰는 동안에만 꽃인데
나무야. 온갖, 젊지도 않은 모양으로 구름을 쑤시는 필체가 있단다
어머니보다 긴 이름의 여자가 있단다
대책 없이 모르는 날씨
누이야. 숨을 쉬기 시작했니?
―「몰아 쓴 일기」 전문
어떤 시는 한 구절만으로도 시가 된다. 작품 전체의 통일성 내지는 조직 같은 것을 차지해두고라도 한 구절의 아름다움만으로도 독자들을 강력하게 붙들어 세우는 시가 있다. 가령 저 시의 다음과 같은 구절, “저 꽃은 꽃이 아니려고 애 쓰는 동안에만 꽃인데”가 그렇다. 자신으로부터의 소외라는 아픔을 한 번이라도 경험한 적이 있는 이라면 이러한 구절에 무심해지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무슨 말인가. 짧은 시지만 ‘몰아 쓴 일기’라는 작품의 제목에서도 유추할 수 있듯, 이 작품에는 자기를 의탁하는 것처럼 보이는 대상들이 다양하게 출현한다. “너”와 “동무”, “통증”과 “꽃”, “나무”와 “필체”, “어머니보다 긴 이름의 여자”, “대책 없이 모르는 날씨” 그리고 마지막으로 “누이”까지. 이들은 모두 시인이 때때로 자신이라고 믿어온 존재들이거나 또는 자신이 기대고 살아온 수많은 대상들로 볼 수 있다. 그것들을 통해 시인은 자신의 모습을 발굴해내려고 하지만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것은 자기 자신의 모습이라기보다 자기기만과 자기 왜곡을 통해 자신을 방어하는 자기 자신이다. 자기이면서 자기 자신에게 도달하지 못하는 이 난감한 존재론적 상황은 충분히 시적이다. 박성준의 최근 시들은 이와 같은 존재론적 균열의 지점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갈 곳이 마땅치 않았지만, 움직일 수밖에 없었소
오늘도 나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고 내가 사는 집은
웬만한 야산보다 높지만 나무뿌리 하나가 쥐고 있는
흙의 질량보다는 가벼운 곳, 풍선처럼 허공에 둥둥 떠다니는 방
집과 가까워질수록 뿌리 없는 집들이
내 키 높이를 따라 다시 낮아지고 있다는 걸, 아직
모른단 말이오? 외출이 두렵소. 허공에 친숙한 내 집이
내가 외출을 하자마자 떠다니다가, 떠다니다가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 같아 당신! 당신을 내 집 곁에 두었지만
그 덕에 나는 이별하는 법을 먼저 배우고 있소
―「엘리베이터에는 터가 없다」 부분
외출은 외출이되 기이한 외출이다. 축자적 의미에서의 외출은 밖으로 나가는 것을 의미하지만 이 시의 외출은 그러한 목표로 지니지 않는다. 나가자마자 돌아오는 길을 이야기하는 1행과 2행의 표현에서 보이듯, 이 시의 외출은 밖으로 나가는 것보다 같은 곳으로 돌아오는 일을 중요시한다. 왜 그런가. 시인 스스로가 자신이 같은 곳으로 돌아올 수 있을지를 끊임없이 의심하기 때문이다. 편안한 안식처의 공간으로서의 집이 이 시에는 없다. 시인의 표현대로라면 “허공에 둥둥 떠다니는 방”이 있고, “뿌리 없는 집”들이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같은 곳으로 다시 돌아왔다는 안정감 같은 정서는 애초부터 기대하기 힘든 지도 모르겠다. 이와 같은 시적 상황은 일차적으로 도시적 삶의 부박함과 불안함을 연상시킨다. 군집적인 삶의 공간을 형성하고 있으면서도 모순적이게도 극심한 외로움을 발생시키는 도시적 삶의 공간은 안정적인 터로서의 기능을 잃어버린 지 이미 오래다. 그러니까 이 시는 일차적으로 삶의 터전을 끊임없이 상실하게 하는 도시적 공포를 형상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다음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앞선 시의 분석과정에서 이야기 되었던 존재론적 균열이다. 이 시에서 흘러나오는 불안의 목소리는 삶의 공간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내’가 거주하는 ‘나라는 존재양식’의 불안이기도 할 것이다. 속된 말로 표현해서 내 속에 거주하는 이는 오직 나뿐인가라는 문제. 박성준의 시는 끊임없이 저 ‘나’라는 문제를 부여잡고 묻는다. 나는 언제까지나 동일한 나인가. 내가 거주한다고 믿는 나라는 양식은 뿌리 없는 집이고 허공이지 않을까. 그러므로 나는 새로운 “간격”(외출을 포함)에서 새롭게 태어나고 사라지는 것은 아닌가라는 의심, 그 의심에서 비롯되는 불안 섞인 쾌감은 끊임없이 박성준의 시가 존재의 균열을 발설하도록 유도한다. 이 시가 다음과 같은 마무리를 맺는 것은 우연일까.
당신이 진정 머무는 곳이 어딘지.
왜 난 당신 몸속에서 이별을 상상할 수밖에 없는지.
오늘도 내 집은 그 곁에 잘 있는지. 아무래도
당신은 분명 여기 있지만 또는 여기 없소
―「엘리베이터에는 터가 없다」 부분
당신에 대해 묻고 있는 외양을 취하고 있지만, 이때의 당신은 또 다른 나의 분신으로 읽어도 크게 무리는 아니라고 본다. 그러고 보니 내가 진정 머무를 수 있는 곳, 나의 존재양식이 덜 외롭고 덜 소외받는 곳은 어디인가에 대해 시인의 고민은 존재론적 문제와 사회학적 문제를 동시에 제기할 수 있는 테마이지 않던가.
집 한 채를 촛불 위에 올려놓고
신문(神門)을 두드려도 열리지 않아
버려진 사내들을 몸을 열어 받아 주고
촛불에 올린 제물 불경하다
불꽃은 타오르지 않고
물은 물답게 꽃은 꽃만큼 휜다
칼날 위에 서서 부르는 이름, 화자
몇 번을 두드려도 열리지 않는 화자
봉우리가 틀 때 이미 벌 나비도 찾지 않는, 그런 꽃
촛불 위에 사는 여자
가족들 부적을 정월에 꼭 챙겨주는 여자
나의 다른 엄마라고, 나를 협박하는 꽃향기
혼잣말을 하는 사람, 하나꼬
화자를 하나꼬라 부르면 숨기고 싶은 남의 얘기 같은 것
꽃은 불꽃 보다 더 발갛고
하나꼬는 화자보다 더 여자 같다
나와 산(山)밖에 모르는, 언제까지 그렇게
―「화자를 하나꼬라 부르면」 전문
이 시는 박성준의 시작 방법의 일부를 암시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그는 언어 시스템이 하나의 커다란 위장공간임을 잘 안다. 무슨 말인가. 가령 이 시의 상황처럼 화자라는 이름을 하나꼬(화자의 일본어식 발음이다)라는 명명으로 바꿔 쓸 때, “화자”라는 말이 거느리고 있는 세계와는 다른 느낌의 세계가 “하나꼬”라는 명사를 통해 펼쳐진다. 둘은 분명 의미론적으로 같은 지시대상을 가리키더라도 말이다. 이는 달리 말해 발화자가 특정 대상을 대하는 태도나 그에 대해 품는 감정조차도 명명의 변화를 통해 변화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함축한다. 그러니까 박성준의 이 시는 자신이 품고 있는 상처의 세계를(어떤 개인사와 관련이 있을 듯하다) 일종의 번역을 통해 질적으로 변화시키려는 전략으로 읽을 수 있다.
하지만 이 전략의 실행을 통해 시인이 발견하는 바는 다른 말로 명명하는 행위가 자신의 상처를 완전히 은폐시킬 수는 없다는 완강한 사실이다. 화자를 하나꼬라고 바꾸어 부른다 하더라도 나의 이야기가 완전히 다른 남의 이야기가 될 수는 없는 일이니 말이다. 시인이란 그런 존재가 아니던가. 언어를 가지고 무언가를 가리는 존재라기보다 언어를 통해 가릴 수 없는, 언어를 초과하는 무언가를 늘 마주하고 목격하는 일을 발생시키는 존재. 더불어 A를 B로 바꾸어 명명하는 데 익숙한 자라기보다는 하나의 세계를 다른 세계로 번역할 때 번역불가능한 절대적 지점에 사로잡히는 자, 그가 바로 시인이지 않던가. 그러므로 박성준 시인이 무언가 다른 명명을 시도할 때 우리는 그의 명명이 위장에 실패할 수밖에 없는 순결한 슬픔과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항상 얼굴의 북쪽에서만 키스를 하겠소
한 무리의 싱거움을 조롱하고 가는 입김
수련의 속내가 태양의 뿌리를 흔들며 연못을 개봉하고
가라앉은 얼굴을 꺼내 봉인해온 말을 터뜨리면
자꾸 모르는 이름만 가시를 쥐고서 여름을 방문하고 있소
외침이 될 때까지 몸이 될 만한 것들을 찾아
헤매는 춤의 하소연이란
애인의 소란스러운 울음을 감싸 안을 때처럼
반짝이는 빈틈으로 여기에 거울을 깨고 있소
모르는 말이 건너오는 동안
바늘을 쥐고 삼베처럼 웃으며 깊은 혀를 꾹 다문 수련
저기 후련하게 수련이 물을 쥐고 솟아있소
물속을 듣던 바위의 귀는 오래오래 초록을 껴안고
시시때때 하얀 발톱들은 잇몸 근처에서 자라나오
어쩌자고 물속에는 찡그린 미간들이 그리도 많아
물의 어깨를 비튼단 말이오, 비바람과 수련이 키스를 나누는 동안
저 부력은 감은 눈꺼풀에서 풀려 나오는 힘
눈을 감고 응결하는 입술과 입술들의 향연
빗줄기의 청력이 허공과 연못을 꿰매고 있소
서로가 서로에게 눈이 없어 몰라도 좋을 얼굴, 그저 묻고 있소
향기로 취미를 가진 우울한 표정들이여, 꺼져가는 물속의 핏빛을 보오
뚝 터진 엄지에서 연못을 향해 베어 나오는
개봉된 허공의 저 피를 보시오
―「후련한 수련」 전문
표면적으로 볼 때 수련의 이미지가 먼저 있고 그 이미지를 보강하는 차원의 남녀의 사랑 이야기가 더해져 있는 식으로 읽을 수 있겠지만, 실상은 연애와 관련된 시적 정서 내지는 정황이 먼저 있고 그것을 슬쩍 가려놓은 수련의 이미지가 더해져 있다. 수련을 흔들고 가는 비바람처럼, 화자를 흔들고 간 누군가가 있다. 아니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그런 만남이 있었고, 지금은 그 사연으로부터 헤어 나오지 못한 화자의 슬픔이 있는 셈이다(그런 점에서 본다면 이 시의 제목은 일종의 반어라고 할 수 있다).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소중한 기억 내지는 보존하고 싶은 과거를 지켜내는 일은 그것을 기억 내지는 과거로 만들지 않는 것이다. 기억과 과거가 되는 순간 그것은 언어적으로 이미 사라질 운명이 예정된 상태로 규정되기 때문이다. 언어의 위장과 효과에 예민한 박성준은 그것에 대항하는 방식으로 현재적 사건의 이미지와 과거 사건의 이미지를 중첩시키는 듯하다. 다시 말해, 수련의 흔들리는 이미지와 겹쳐진 그의 경험 또한 여전히 시인의 마음을 사로잡고 요동치게 하는 현재적 감정적 사태로 거듭난다는 것이다. 시인은 “가라앉은 얼굴을 꺼내 봉인해온 말을 터뜨”린다고 표현하고 있지만, 이 시의 언어가 작동하는 방식은 봉인된 말을 터뜨려 가라앉은 얼굴을 다시 떠오르게 하는 과정을 형성한다. 그리고 결국에는 얼굴이 “울음”을 부르고, “찡그렸던 미간”과 입을 맞추며 비틀렸던 “어깨”를 다시 떠올리게 하는 것은 물론 사연의 끝의 “우울한 표정”까지도 부활시키는 과정으로까지 나아간다.
박성준의 시에서 숨겨진 감정의 조각을 발견하고 그를 통해 시의 언어를 재구하는 순간 그의 시는 엄청난 감정적 폭발을 예정한다. 감출 수 없는 슬픔의 민낯만큼 우리를 감정적으로 동요시키는 것은 없을 테니 말이다. 모순적이게도 박성준 시의 언어는 논리적 외양을 띄고 있지만 그것은 자신의 슬픔이 지는 순결함을 보전하려는 일종의 방편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시에』 (2011. 겨울)
**송종원
충북 충주 출생. 200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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