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시인 들여다보기
과거 현재 미래가 공존하는 육체, 사유하는 존재들을 위하여
―김홍조, 해림, 임형신 시인
박선경
독자들은 시인들을 향해 묻곤 한다.
“결국,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이 질문이 곤혹스러운 것은 바로 “결국”이라는 부분 때문이다. 시의 의미를 결과론적인 합일점으로 찾아내려는 태도가 모순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시의 기능이 아니라 언어의 기능일 것이다. 사회적인 약속과 법칙 그리고 사용 가능한 범위를 가늠하려는 것, 그래서 그것의 잣대로 대화의 방식과 소통의 질서를 만들어내려는 언어 말이다. 이럴 때 언어의 기능은 보다 빠르게 나의 요구와 욕구를 충족시키고, 불편한 것에 대해 서로 공평하게 참아내려는 암묵적인 약속과 규칙 같은 것이리라. 하지만 시는 언어의 기능을 반복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언어가 담아내지 못한 사물 본질에 대한 의문점들을 끊임없이 갈구하고 탐구하려는 일종의 호기심일 수도 있으며, 어쩌면 그곳(대상)에 도달할 수 없는 언어의 한계를 헤매기 위한 것일지도 모른다. 따라서 시인이 바라보는 대상에는 수만 가지 이상의 언어의 법칙이 새롭게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니 “결국, 무엇을 말하려는 것입니까”라는 질문은 “어떠한 방식으로 (무엇을)그려내고 있습니까” 정도가 가능한 질문이 아닐까. 여기서 중요한 것은 “결국”이 아니라 “어떠한 방식”이다. 시인이 새롭게 발견하고 구축한 언어의 약속과 규칙이 대상을 스스로 발현할 수 있도록, 도드라지도록 하는 것이다. 그것은 쓰는 사람의 찰나이자, 읽는 사람에게는 발견의 기쁨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김홍조, 해림, 임형조 시인의 시들은 읽는 이로 하여금 새로운 구조의 각기 다른 시선으로 ‘존재’의 의미를 발견하게 한다. 사유하는 육체가 도달할 수 없는 대상을 향해 끊임없이 항해하는 과정을 세 시인은 고통스럽게 들여다보고 있다. 때로는 생성과 소멸의 순환구조로서, 때로는 사유하는 육체의 다양한 의미 변주로서, 채움과 비움의 열린 구조로 바라보는 세 시인은 결국 우리에게 사유와 육체의 공존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만들어 내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가수면 상태에서 눈을 뜬다
관성으로 넋을 추스르면
친절한 당신 손이 일으키는 새벽
하양 고무신의 맨발 걸음으로 살짝이
오던 빗줄기, 다시 난폭해진다
일생의 정중앙을 관통하는 폭우에
평생 닫혀 있던 창문 크게 흔들리고
모골이 송연한 방에 갇힌 나는 외람되게도
발기한 안테나를 빳빳하게 세워
초 단위로 당신을 수배한다, 오늘도
경보와 주의보를 무시한 불친절한 밤이 오고
집이 물에 잠기고
산과 둑이 무너져 내린다
―「장마」 부분
가득 채워 곧 비워내는
있음과 없음의 한 몸
저런 숨겨둔 천국이 있었다니
달의 깊은 자궁, 슬픔의 중심에 들어
어린 아이처럼 행복했다
―「개기월식」 부분
버림받은 영혼은 그대뿐이 아니다
입 닫히고 귀 막혀 정신까지 놓은 시골 아낙
잊어버린 사랑의 감각 돌려달라고, 사내 품 찾아 떠도는
비장한 순례길을 아느냐
온전한 피붙이의 손길도, 찬란한 연인의 입술도 잃어
마음 둘 곳 못 찾고 거리를 헤매는
충분히 외롭고 가난한 무적자(無籍者)들이
세상에 넘친다는 것을 아느냐
그러니 이젠 울지 마라
모든 것은 지나가는 법이니
눈물 그치면
그대 인생의 어두운 돌담 밑에
한 송이 흰 수선화 피어나리니
―「수선화를 위하여」 부분
김홍조의 신작시 세 편은 모두 불완전한 존재의 의미를 ‘있음’과 ‘없음’의 구멍과도 같은 텅 빈 육체로 보고 있다. 텅 빈 ‘구멍’은 있음과 없음을 동시에 간직하기에 ‘달’에 비유되기도 하며, 여자의 ‘자궁’과도 닮아 있다. 그것은 ‘없음’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 아니며, ‘있음’을 보여주기 위한 것도 아니다. 개폐방식의 열림과 닫힘의 구조로 순환하는 육체의 의미로서 재현하고 있다.
그의 시 「장마」에서 주체는 뚜렷한 결론에 서 있지 않다. “가수면, 새벽, 정중앙”의 시어에서도 알 수 있듯이 주체는 어느 것에 귀속되지 않은 채, 변화 가능한 ‘중간(가운데)’에 있다. 그리고 흥미로운 것은 이 상태를 “관성”으로 유지한다. 즉 이 상태를 지속하려는 능동적인 입장으로서의 주체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무기력한 텅 빈 상태가 아닌 “발기, 안테나”를 “세우다, 무너져 내린다”와 같은 의미로 확장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 시에서 말하는 텅 빈 존재는 ‘능동적인’ 텅 빈 상태를 유지하려는 의지로서 존재한다.
이 능동적 상태의 ‘비움’은 곧 그의 시 「개기월식」에서 “자궁”에 비유된다. 달이 지구의 그림자 속에 가려지는 현상인 개기월식은 태양과 지구 사이에 가려진 달의 존재를 의미한다. 지구의 그림자 속으로 들어가서 완전히 가려지는 개기월식의 현상을 빗대어 시인은 부재하는 것(달)의 존재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가득 채워도 비워내”고, “있음과 없음의 한 몸”을 의미하는 달(개기월식)의 이미지를 통해 시인은 ‘달=자궁=있음과 없음의 공존=천국’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이 비움의 과정을 “슬픔의 중심”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시인은 있음 그 자체로 슬프거나 없음 그자체로 슬프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것의 과정, 즉 비움과 채움의 순환 자체를 “슬픔의 중심”이자 어린아이 같은 순수한 “행복”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존재 방식은 이러한 “긴장과 이완” 속에서 “조율”하는 법을 배워가는 과정인 것이다.
그것은 다른 의미에서 “입구”(「수선화를 위하여」)이기도 하다. 울고 있거나 위로가 필요한 노숙인, 산재 노동자와 같은 버림 받은 영혼들을 시인은 “외롭고 가난한 무적자(無籍者 )”라고 표현한다. 소외되어 위로나 보호를 받고 있지 않은 자. 즉 있음과 없음의 과정을 오고 가며 텅 빈 존재들을 바라본다. 시인은 매일 아침 출근길 입구와도 같은 구멍 속(“상계역 지하철 입구”)으로 빨려 들어가는 그들을 위로한다. 하지만 그의 위로는 섣부른 희망이나 가난과 외로움에 대한 공감이 아니다. 그는 입구에 빨려 들어가는 무적자(無籍者)들에게 ‘통과’의 의미를 강조한다. “모든 것은 지나가는 법”이라고 말하는 시인은 ‘비움’도 지나가고, ‘채움’도 지나가고 부재와 존재의 공존 사이에서 “긴장과 이완”의 “조율법”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언제나 이렇듯 시의 주체는 위태로운 존재와 비(非)존재를 넘나든다. 이 불완전한 경계는 곧 사유의 거처이자, 시가 그려내고 재현하고 싶어하는 육체일 것이다. 따라서 시의 주체는 욕망과 욕망의 상실을 체험하며 항해하는 불완전한 존재인 것이다. 그는 이 양극의 세계를 넘나들며 노래하는 시인의 운명을 잘 보여주고 있다.
나무는 사선으로 기우는 오후의 햇살을 채집한다
새가 되고 싶은 나무,
뿌리째 흔들리는 욕망의 불꽃이
꼭짓점을 향해 사선으로 기울어진다
오후의 햇살이 사선에서 멈추는 순간
나무에서 새의 깃털이 하나 둘씩 돋아나기 시작했다
날갯죽지를 펴는 새,
새는 몇 개의 생각들을 접어
나뭇가지에 걸어놓는다
―「오후의 풍경화」 부분
빛과 어둠 사이에서
두 명암 사이의 경계에서
어디로 가야 하나 망설이고 있는데
네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너의 가슴이 얼마나 따뜻한지는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라고
세상이 나를 모니터에 입력하고 검색했다
어느 길로 가야 할까
나는 길 잃은 방랑자가 되어
내가 아닌 나를 찾아서
걷고 또 걷는 동안에
천 년의 시간이 검은 동굴 속으로 사라졌다
―「사라진 시간」 부분
펄펄 끓는 용광로에 쇳덩이를
달구어 담금질하는 장인(匠人)처럼
시의 언어를 연금술 하는 술사들의 노래여
―「애모」 부분
「오후의 풍경화」에서 나무의 욕망은 새이다. 하지만 이 시에서 그려지는 욕망은 상승하지 못한 채 불완전하다. “사선으로 기우는 오후 햇살”을 채집하거나, “뿌리째 흔들리고”있으며 욕망을 향해 모두 “기울어진” 상태이다. 새의 비상하는 이미지는 기울거나 뿌리째 흔들리고 있는 불완전한 상태의 현재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곳에서의 욕망은 더욱 극대화될 것이다. 햇살을 깃털 삼아 꽂은 나무의 모습과 생각을 부풀리듯 몸의 부력을 넣는 나무의 이미지가 그렇다. 이것은 시인이 바라보고 있는 현실이며 “좁은 골목, 폐지, 초로의 여자”가 상징하는 바로 우리들의 모습이다. 시인은 그가 꿈꾸는 “바닷새”를 통해 나무의 욕망과 초로의 여자를 동일시하고 있는 것이다. 폐지를 줍듯 버려진 것들을 수집하여 눈부신 깃털로 비상하고 싶어 하는 존재들의 욕망이다. 이렇듯 욕망과 현실을 동시에 거느린 채 현존하는 것들에 대해 시인은 집중한다. 길을 잃거나 양극을 오고 가며 갈등하는 시의 주체는 망망대해를 표류하는 존재지만 시인은 결코 절망하지 않는다. 오히려 대립적 구조 속에 놓인 시의 주체는 「사라진 시간」에서 보여주듯 인식의 한계를 넓힌다.
「사라진 시간」에서는 떠나간 배가 만선으로 돌아오고, 날아갔던 새들이 돌아온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돌아오다”라는 동사이다. 떠나갔던 모든 것들이 다시 제자리로 회귀하는 것, 이것은 상실감과 욕망의 공존을 의미한다. 사람들은 기다리고, 축배를 들고 또다시 떠나기 때문이다. 이 과정을 허무의 망망대해에 비유하며 주체를 표류하는 존재로 무기력하게 묘사한 시인의 의도는 아마도 “빛과 어둠”, “두 명암 사이의 경계”가 곧 우리들의 삶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여기서 시는 멈추지 않는다. 허무의 이미지를 다시 공간과 시간의 확장을 통해 새롭게 탄생시킨다. 주체는 경계에서 허무하거나, 길을 잃거나, 방랑자가 되지만 끊임없이 나를 부정하며 검은 동굴 속으로 사라진 주체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 듯 “천년의 시간”이 된다. 그리고 주체가 떠돌던 “허무의 바다”는 이제 경계 밖으로 사라져 “빛과 어둠”, “두 명암 사이의 경계”를 뛰어 넘은 새로운 시공간의 한계를 넓힌다. 이 과정을 시인은 “사라진 시간”의 이미지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현재의 시간을 간직한 과거의 시간이며, 미래를 암시하며 끊임없이 나아간다. 그러한 주체는 ‘시간’의 속성과 한 몸이 되는 것이다.
그의 시 「애모」에서처럼 시의 주체가 바다를 항해하는 항해사라면 시인은 바다를 용광로로 삼아 담금질하는 “장인(匠人) ”이다. 삶의 모든 출렁임을 받들어 섬기는 시인은 기술자이자 연금술사인 것이다. 늘 사랑하면서 그리워할 수밖에 없는 시에 대한 “애모”인 것이다.
바다 건너 또 한 사람 건너오네
울음 우는 명량나루 건너 유배지로 건너오네
무오년 사약 받으러 내려 간 이주와 함께 오네
영등사리 갈라지는 모세의 바닷길 따라 건너와
한 줄기 햇빛 붙들고 있는 석실에서
오늘도 해배(解配) 기다리네
금골산에서 세 사람 놀고 있네
먼저 온 나
뒤에 온 나
이주와
오늘도 금골산에서 해배 기다리네
―「금골산에서 놀다」 부분
잠 깨고 나서 둘러보니
접시꽃 주저앉은 장독대 받침돌로 괴어 있는
삼엽충화석
달곳 황기밭에 마실 나갔다 온다
산마늘 밭에서 등짐을 지고 가던 물방울화석도
잠시 개암나무 밑에 땀 식히며
바다가 산이 되던
개벽의 날을 반추한다
꼭꼭 숨었던 무지개도 나와서 원생대적 쪽빛 하늘
이고 가고
―「삼엽충 화석」 부분
먼 강물소리
환청에 귀를 세우던 나무들
달 오르자 마디마디 막혔던 물길 흐르고
불볕 아래 소신공양을 끝낸 민달팽이
화상 입은 발 서늘한 달빛에 담그고 있다
지금은 하늘과 땅이 만나는 시간
―「달이 오르면」 부분
과거 현재 미래가 공존하는 육체는 갈등할 수밖에 없으며 시인은 갈등을 일으키는 부조화에 대해 집착하게 된다. 여기서 부조화란 과거 현재 미래를 지나오거나 지나가야 할 주체의 의식과 무의식을 다 포함한다. 갈등하는 육체의 시공간을 고민하는 임형신의 시에서는 시간의 한계를 넘어 생명의 기원과 육체의 거처가 되어주는 시간에 대해 탐구한다. 즉 육체는 시간의 기원을 좇으며 과거 현재 미래가 공존하는 시간의 집인 셈이다.
「금골산에서 놀다」에서 ‘금골산’은 이러한 시간의 공존을 잘 보여준다. 해배(解配)를 기다리는 공간인 금골산은 지나온 시간과 앞으로 다가올 시간을 모두 포함한다. 시간의 경계가 무의미한 금골산은 지명 이상의 시간의 본질을 드러내는 장소가 된다. 시에서 바다를 건너오는 사람은 모두 ‘나’이다. 더 자세히 말하면 ‘나의 시간’인 것이다. 유배지를 건너오거나 사약을 받으러 내려가는 ‘나’는 오늘도 고뇌하고, 떠나고, 기다리는 삶의 총체적 모습을 보여준다. 어쩌면 시인은 삶 자체를 귀양으로 보고 있는지 모른다. 금골산에서 귀양이 풀리기를 기다리는 ‘나’의 모습은 결국 ‘나’의 모든 육체와 사유의 시간을 내포하는 삶의 시간이자, 시간의 기원 그 자체인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시간과 육체의 경계를 마치 시간의 단면을 잘라 화석의 모습으로 들여다보듯 현재의 시간 안에 놓아둔 것이다.
「삼엽충화석」에서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시간의 흔적들을 현존하는 찰나의 순간에 담아낸다. 시인은 장독대 받침돌로 괴어놓은 삼엽충화석을 통해 바다가 산이 되던 개벽의 날을 반추한다. 비 맞은 접시꽃을 바다에 뿌리내린 것에 비유하고, 작은 존재의 낮잠을 봄꿈에 묘사하는 시간의 확장은 해양 생물의 화석은 얼마나 긴 시간을 간직한 삶인지를 가늠하게 한다. 이러한 시간의 영원성을 현존하는 짧은 시공간에 담아내는 시인의 시선에서 인간의 육체는 자연에 잠시 거처를 신세지는 존재에 불과하다. 그러니 존재하는 것들은 모두 자연에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자연 안에서 ‘비움’과 ‘채움’을 반복하는 존재들은 이 과정에서 시간의 경계를 허물며 자신의 삶에 소신공양을(「달이 오르면」) 하게 되는 것이다. 그의 시 「달이 오르면」에서는 자연에 몸을 내어주거나 몸을 바꾸는 과정을 달이 차오르는 과정에 비유한다. 시간을 채우듯 차오른 만월의 이미지는 상처입고 지친 존재들을 위로한다. “맨 발의 누이”가 채우는 “달무리”처럼 삶은 치친 시간들을 다시 위로받으며 채우게 되는 것이다. 마치 달의 차고 기움과 같이 시인이 바라보는 시간은 직선적이기보다 마주하며 흘러간다. 즉 이 시에서 “하늘과 땅이 만나는 시간”이란 경계가 허물어지며 주체의 지난 시간과 과거의 시간이 조우하는 ‘현재’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시인은 이러한 시간의 고통과 놀라움을 삶의 비애로서, 운명으로서 끌어안는다. 현실은 죄를 짓고 유배 온 귀양살이를 각인시키며 끊임없이 해배(解配)를 기다리는 불완전한 존재들인 것이다. 이들은 위태로운 경계에 서서 자신의 과거 현재 미래에게 몸을 내어주며 ‘비움’과 ‘채움’의 과정을 반복한다. 육체는 끊임없이 사유하며 개폐방식으로서 현존할 뿐이다. 이렇게 열리고(채우고) 닫히는(비우는) 과정을 통해 인간은 사유하고 주체를 확인한다.
시인은 가끔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왜 쓰는가?”
하지만 시인에게 유일한 목적은 존재 방식의 사유뿐이다. 그것으로서 주체를 파악하고 현상을 이해하며 대상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리하여 결국 시인은 쓰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결국”이라는 운명적인 결론뿐이다. 일정한 곳에 머물게 하는 형벌을 받아 유배지에 온 시인은 늘 해배(解配)(이곳에서 벗어나기)를 꿈꾸는 것이다.
─『시에』 (2011. 겨울)
**박선경
서울 출생. 2003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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