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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아쉬움―피터팬도 늙었다 - 최지하 시인

문근영 2014. 1. 26. 15:52

 

아쉬움―피터팬도 늙었다
─『꼭, 하고 싶은 거짓말』(시와에세이, 2011)

                                                     최지하

 

 

첫 번째 거짓말 : 소외(疎外)와 귀화(歸化)

 

   많은 사람들이 진리로 받아들이고 사실처럼 이야기 하는, “단순한 것이 자연스럽고 아름답다”는 말이 있다. 헌데 이는 완전한 허구요, 이상에 대한 갈구가 만들어 낸 어이없는 환상이다. 자연은 절대 단순하지 않다. 미시적으로 의미 없어 보이는 모든 미묘한 현상들이 자연과, 더 크게는 이 우주의 법칙을 지탱하는 거대한 규칙과 균형을 만들어낸다.

 

   이 도시는 암호가 있어야 들를 수 있어/말하고 싶은 고양이라든가/퉁명스러운 천사라든가/진흙밭의 시계라든가//도박사들이 들끓는 이 도시는/네모난 심장을 가진 사람과 불청객뿐이어서/웃는 사람도 없고/공모를 짐작하는 사람도 없고/손을 잡아주는 사람도 없지
             ―「Jazz 10」 부분

 

   세상살이도 똑같다. 우리가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인간사회”도 사실은 생물학적 진화가 만들어 낸 우주의 규칙 중 하나요, 먹이사슬의 한 부분이다. 자연이다. 그래서 절대 단순할 수 없고, 혼란스럽고, 복잡하며, 고통스럽다. “푸른 유전자를 가진,” “네모난 심장을 가진” 자들로 가득한, 이해할 수 없는 “암호”를 알아야 살아남을 수 있는 이상한 세상에서의 삶이 쉬운 일은 아니잖은가.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 “푸른 유전자를 가진 사람들의 발자국” 때문에, 현대사회를 비관하고 변화에 저항하는 것은 곧 주류로부터의 소외를 재촉하는 길이며 도태의 지름길인 것이다. 우리가 매일 경험하며 부자연스러움이라고 치부하는 부조화와 고통, 고독, 그리고 혼돈은 사실 우주가 만들어 낸 자연스러운 균형의 한 모습일 뿐이다.
   그래서 나는 재즈를 좋아한다. 얼핏 들으면 불협화음처럼 들리는 소리들을 연주하는 악기들이 어우러져, 대화하듯 음악을 완성하는 재즈는 우리네 세상과 닮아있다. 너와 나는 사는 방법도, 수준도, 세상을 마주하는 감정도 모두 다르지만, 결국 우리는 하나의 음악을 만들어 내는 성분이다. 같은 음만 연주하는 조율피리로는 음악을 만들 수 없다. 감정이 결여된 무미건조한 소리의 집합은 음악이라고 부르지 않기 때문이다.
   재즈가 단지 사치스럽거나, 또는 고상한 척 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과시욕을 채우기 위한 음악장르일 뿐이라는 의식은 한국에서 특히 팽배해 있다. 하지만 알고 보면 재즈는 로큰롤처럼 감정에 솔직하고, 세상 사는 모습을 담백하게 그리는 음악이다. 30년대 미국에선 그런 직설적 표현 때문에 재즈가 공공연히 배척 당하고 금기로 여겨졌다. 70~80년대의 우드스톡과 히피 문화는 사실 반복된 역사일 뿐이다.
   오히려 사랑과 인간살이를 달콤하게만, 또는 반대로 쓰디쓴 아픔으로만 노래하는 트로트가 거짓이요 기만이다.

두 번째 거짓말 : 마틴 스콜세지와 로버트 드 니로―역할극과 생존

 

   고통이 장시간 계속되면 뇌는 고통을 전달하는 특정 신경 가닥으로부터 전송 받는 신호를 무시한다. 또, 고통을 유발하는 사고의 원인을 분석하여, 고통의 근원으로부터 거리를 멀리 하도록 무의식적 레벨에서 학습하고, 이를 바탕으로 의식수준에서의 행동양식에 영향을 끼친다. 우리의 생활에서도 이러한 모습을 관찰할 수 있다. 어린이들은 영향력 있는 어른들에게 귀여움을 받도록 행동한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부모와 교사들에게 잘 보이도록 학습되어 있고, 직장에서는 소중한 나의 책상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해야 한다.

 

   골목길을 걷는데/매번 책갈피에서 살해되었던 젊은 그가 되살아나/괴상한 걸음으로 쫓아온다/나 때문이냐, 집요한 그림자/악몽일까, 불안이 엄습해 오기는 하지만/괜스레 유쾌하게 노래를 불러보는데/울컥울컥 질긴 속을 긁어내는/검은 나무가 보인다
           ―「그림자들」 부분

 

   특정 작품이 슬프다고 작가가 우울한 사람일 것이라고 추측하는 독자들이나, 또는 특정 시가 반사회적이어서 운동권이 아니냐는 질문을 하는 독자들이 있다. 하지만, 마틴 스콜세지 감독이 로버트 드 니로를 자신의 분신으로 삼고, 드 니로는 스콜세지의 페르소나였을지언정, 드 니로와 스콜세지 모두가 가난한 이태리 계 미국인은 아니다. 직장에서 상사에게 비치는 모습과 가정에서 가족에게 비치는 모습이 같을 수는 없다. 하지만 그 중 한 가지 모습이 나를 정의하는 것은 아니며, 동료에게 다정하고 상사에게 아부하고 주말엔 잠만 자며 가족에겐 무뚝뚝한, 모든 모습들이 나의 정체성을 형성해 간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예쁘지만 그림자”일 수도 있지만, 그림자라도 예쁜 걸 또 어떻게 하란 말인가?
   삶을 통해 진정한 내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이 영원히 미제이며 우문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나의 욕망과 사회적 요구 사이에서 우리는 (타협과 고통으로부터의 회피를 위해) 셀 수 없이 많은 모습의 주체로서 행동해야만 하는데, 이러한 주체들은 제각각 다른 인격과 행동양식을 가지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사회학, 심리학적 측면에서, 우리는 이러한 주체를 위격, 또는 페르소나라고 부른다. 시작(詩作)을 함에 있어 이러한 페르소나는 작품이라는 형태를 띠고 나타나게 된다. 작품을 통해 그려지는 페르소나는 “매번 책갈피에서 살해된 젊은 그”처럼 봉인하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집요하게 쫓아오는 “괴상한 모습의” 나일 수도 있고, “쓸쓸할 때 죽고 싶은 이브” 같은 이상향일 수도 있다. 삶의 여러 측면을 노래하려면, 작품도 여러 성격을 띨 수밖에 없다. 적어도 작가는 현실과 타협하기 위해 가면을 쓰는 대신 작품을 남길 수 있으니 오히려 행복하지 않은가?

 

세 번째 거짓말 : 만리장성―성벽에는 반드시 문이 있다

 

   작품들 모두를 관통하는 주제어로 “벽”을 빼 놓을 수가 없다. 독자들 사이에서 항상 논란이 되는 부분인데, 벽이 상징하는 “단절”과 “구속”의 이미지가 불러오는 필연인 것 같다.

 

   저기 저 즐비한 침대 위에 착한/척하는 사람들이 누워 있어요/저 사람들은 똑같은 생각을 하도록/교육받은 해골들이죠/이젠 안녕, 시간 맞춰 읽는 이 대본은/귀찮아, 시계를 거꾸로 돌릴게요
               ―「내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부분

 

   하지만 벽이 항상 수동과 구속, 자유로부터의 물리적 고립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똑같은 생각을 하도록/교육받은 해골들”에게나 해당되는 말이다. “착한 척하는 사람들”은 벽을 만든 이들로부터 저항 없이 가만히 “누워”있도록 교육을 받았다. 벽은 아마도 공부 잘하는 어린이가 착한 어린이고, 집과 직장만을 왕복하며 돈 잘 벌어 오는 사람이 성공한 사람이라고 가르친 그들과 같은 사람들이 세웠음이 분명하다.
   인간사회는 이데올로기와 체제를 불문하고, 불안이라는 리모컨을 통해 이룰 수 없는 욕망들에 목매도록 그 구성원들을 조종한다. 이는 교육을 통해 습관으로 정착시키면 비교적 쉽게 이룰 수 있는 목표이다. “착한 척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영원한 젊음, 소비행위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영원한 육체적 쾌락, 영원한 사랑을 원하도록 교육 받았다.
   무거워진 나이보다/내 안의 그리움/가벼워지기 전에/표구를 할까/복제를 할까(「나이에 대해」 전문)에서 “표구”, 박제, 또는 “복제”를 통한 나름대로의 백업(Back-up)은 잃고 싶지 않은 것들, 즉 영원에 대한 욕망이 낳은 유산이다. 이러한 보존 절차를 통해 우리는 삶이라는 전투에서 노획한 전리품을 전시하고, 과시한다.
   하지만 누군가는 “신발 끈을 더 단단히 매고,” 벽 밖의 “포옹하는 사람들”을 상상하며 해골들에게 작별을 고하고 있다. 하물며 달에서도 보일 만큼 거대한 만리장성에도 문이 있는데, 마음속의 벽에 문이 없으랴? 아마도 벽 너머에는 전쟁도 없고, 불안도 없으리라.

 

네 번째 거짓말 : 그래도 삶은 아직 달콤하다

 

   사람들은 가장 가까운 채 모르고 살잖아요/옆모습만 보이지 마세요/흘러가는 것은 혼자 해야 할 일이지만/가끔은 송두리째 흔들리세요/레몬 향이 나는 구두를 훔쳐보세요/(중략)/심장에 박힌 못은 마주보고 빼세요/그러면 함께 출렁일 수 있어요/볼 수 있다는 건 느낄 수 있다는 건/살아 있다는 것 아닌가요/이곳에서 날 유혹하세요
                  ―「레몬 맛 각설탕 먹기」 부분

 

   무게가 버겁고, 홀로 걷기 두려운 혼돈의 세계일 지라도, 그 고통은 살아 있기 때문에 느끼는 것이리라. 달콤한 맛을 상상하고 입에 넣은 각설탕이 시큼한 맛으로 배신하더라도, “레몬 향기 나는 구두”처럼 의외의 행복을 맛보기 위해서 “심장에 박힌 못을 마주보고 빼”보자. 그 과정이 조금은 고통스러울 지라도 가끔은 “함께 출렁여 봐야” 할 일이다. 아직 나를 유혹하는 것들이 세상에 있다고 믿으면서.

 

 

 

  ─『시에』 (2011. 겨울)

 

 

▶최지하
충남 서천 출생. 1999년 시집 『웃는법』으로 등단. 시집 『꼭, 하고 싶은 거짓말』.

출처 : 시하늘
글쓴이 : 보리향(菩提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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