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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詩, 날 선 실존의 비명 - 허수경「연필 한 자루」평설 / 이찬

문근영 2014. 1. 21. 08:46

 

詩, 날 선 실존의 비명 - 허수경,「연필 한 자루」평설 / 이찬

 

 

허수경, 「연필 한 자루」 (『문학과사회』 2011년 겨울호)

 

 

그렸다

꿈꾸던 돌의 얼굴을 그렸다

하수구에 머리를 박고 거꾸로 서 있던 백양목

부서진 벽 앞에 서서 누군가를 기다리던 어깨

붉게 울면서 태양과 결별하던 자두를 그렸다

칼에 목을 내밀며 검은 중심을 숲에서 나오게 하고 싶었다

짧아진다는 거, 목숨의 한순간을 내미는 거

정치도 박애도 아니고 깨달음도 아니고

다만 당신을 향해 나를 건다는 거

멸종해가던 거대 짐승의 목

먹다 남은 생선 머리 뼈 꼬리 마침내 차가운 눈

열대림이 눈을 감으며 아무도 모르는 부족의 노래를 듣는 거

태양이 들판에 정주하던 안개를 밀어내던 거

천천히 몸을 낮추며 쓰러지는 너를 바라보던 오래된 노래

눈물 머금은 플라스틱 봉지도 그 봉지의 아들들이

화염병의 신음으로 만든 반지를 끼는 거

어둠에 매장당하는 나무를 보는 거

사랑을 배반하던 순간, 섬득섬득 위장으로 들어가던 찬물

늦여름의 만남, 그 상처의 얼굴을 닮아가면서 익는 오렌지를

그렸다

마침내 필통도 그를 매장할 때쯤

이 세계 전체가 관이 되는 연필이었다, 우리는

점점 짧아지면서 떠나온 어머니를 생각했으나

영영 생각나지 않았다

우리는 단독자, 연필 한 자루였다

헤어질 사람들이 히말라야에서 발원한 물속에서

영원한 목욕을 하는 것을 지켜보며

그것이 음악이라고 생각하는 한 자루였다

당신이여, 그것뿐이었다

                                           -「연필 한 자루」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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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필 한 자루」는 몸에 대한 감각과 사유로 헌정된 ‘몸’의 시편이다. 그것은 시인 허수경의 타고난 체질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만큼, 그의 거의 모든 시편들에 스며들어가 팽팽한 살갗으로 피어오른다. 저 ‘몸의 세계’에 시인이 제 힘을 모조리 탕진하려 하는 것은, 그것이 ‘시적인 것’이 태어나는 자리인 동시에 그 어떤 지성의 도식으로도 말끔하게 풀어낼 수 없는 ‘살아 있는 세계’이기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시인이 한동안 시도했던 ‘고고학’ 역시 과거를 이미 죽어버린 박물관의 유물들로 전시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우리들 곁에 생생하게 살아 펄떡거리는 현재로 불러내려는 예술적 기투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이렇듯 ‘살아 있는 세계’에서 “나”의 몸은 1인칭 자아의 순결한 소장품이거나, 그가 유일무이하게 소유하는 공간의 체적일 수 없다. 그것은 오히려 보고 듣고 맛보고 어루만지는 ‘세계의 몸’을 늘 제 곁에다 거느리고 다닐 수밖에 없다. 아니, “나”의 몸은 이미 ‘세계의 몸’에 둘러싸여 있는 동시에 ‘세계의 몸’은 그 모든 1인칭의 ‘몸의 세계’에 이미 스며 들어와 있다. 따라서 “나”의 몸에는 이미 ‘세계의 몸’이 주름져 있는 것이며, ‘세계의 몸’은 타인들과 사물들과 우리들 모두인 “나”가 서로의 몸을 잇대어 살아갈 수밖에 없는 ‘공-실존co-existence’의 드넓은 터전이다.

   시인 허수경이 실존하는 자리 또한 ‘몸의 세계’와 ‘세계의 몸’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함께 얽혀든 ‘공실존’의 세계일 것이 틀림없다. 따라서 그것은 시인의 마음의 질감들을 아련한 ‘회감’의 풍경들로 “그려”낸 것일 수 없다. 그것은 “나”의 마음에 여전히 끈적끈적하게 달라붙는 회고조의 풍물들과 이로 인해 상기되는 처연한 기억들이 아니라, 그 바깥에 실재했던 ‘세계의 몸’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예컨대, “꿈꾸던 돌의 얼굴” “거꾸로 서 있던 백양목” “누군가를 기다리던 어깨” “태양과 결별하던 자두” 등과 같은 것들이다. 이러한 사물들은 결코 시인의 마음이라는 “검은 중심”으로 빨려 들어가 제 존재의 부피를 잃지 않는다. 아니, 저들의 ‘미친 존재감’을 잃어버리지 않으려는 “연필”의 힘겨운 싸움은 다음과 같은 아름다운 무늬들로 새겨진다. “칼에 목을 내밀며 검은 중심을 숲에서 나오게 하고 싶었다/짧아진다는 거, 목숨의 한순간을 내미는 거/정치도 박애도 아니고 깨달음도 아니고/다만 당신을 향해 나를 건다는 거.”

   그렇다. 인간이건 사물이건, 또 그 무엇이건, ‘대문자 역사’로 표기되는 저 숱한 상징계의 기록들로부터 사라져버린 망각의 역사와 소수자들은 얼마나 많을 것인가? 그것이 민중으로, 제3세계로, 아니면 타자로, 다른 그 어떤 이름들로 호명되든, “연필 한 자루”는 “칼에 목을 내밀며” 그렇게 “목숨의 한순간을 내미는” 제 온몸을 다해 필사적으로 무언가를 “그려”내려 한다. 그것은 바로 인류의 역사와 기억들로부터 사라지고 버려진 것들, 곧 “멸종해가던 거대 짐승의 목” “먹다 남은 생선 머리 뼈” “아무도 모르는 부족의 노래” “눈물 머금은 플라스틱 봉지” “화염병의 신음으로 만든 반지” “어둠에 매장당하는 나무” 등과 같은 것들이다. 저들은 우리들 인간 곁에서 한사코 ‘살아 있는 세계’였을 것이나, “아무도 모르는” 저들의 ‘몸의 세계’는 그것을 “그렸다”는 “연필 한 자루”에게 조차 “영영 생각나지 않”는 것일 수밖에 없다.

   “연필 한 자루”는 “점점 짧아지면서” 제 ‘존재의 집’인 “필통도 그를 매장할 때쯤”에 이르면, “이 세계 전체가 관이 될”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한다. 제 온몸을 다 바쳐 이렇게 사라지고 버려진 것들을 되살려내는 “연필”의 생애를 시인은 따뜻하고 연민 어린 시선으로 보듬지 않는다. 오히려 저 황폐한 ‘봉헌’의 역사를 잔인한 리듬감으로 소묘하고 있을 뿐이다. 그것의 말년은 “점점 짧아지면서 떠나온 어머니를 생각했으나/영영 생각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이 세계 전체”의 그 무엇도 그를 기록하거나 기념하지 않는, 단지 “관이 되는”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연필 한 자루”의 독백이 다음과 같은 독한 문양들로 마무리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다. “우리는 단독자, 연필 한 자루였다/헤어질 사람들이 히말라야에서 발원한 물속에서/영원한 목욕을 하는 것을 지켜보며/그것이 음악이라고 생각하는 한 자루였다/당신이여, 그것뿐이었다.”

   “우리는 단독자, 연필 한 자루였다”는 구절은, “연필” 자신이 이 시편의 화자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을 뿐 아니라 모든 예술가가 마주칠 수밖에 없을 어떤 운명선을 암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저 ‘대문자 역사’와 ‘상징적 질서’ 바깥에 거주하고 있는, 아니 그것의 심부에 이미 깃들어 있을 ‘외상적 중핵’인 ‘실재’에 가닿으려는 모든 예술가의 고단한 운명선을 시인 허수경은 저토록 잔인한 “연필 한 자루”의 실존에 비유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한편으로 시인들에게는 그야말로 소름끼치는 ‘실재의 도래’일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러하기에, 그것은 이 시편이 참된 예술 작품이라는 것을, 아니 시인 허수경이 우리들 곁에서 여전히 날 선 실존의 비명을 내지르는 살아 있는 예술가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일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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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찬 _ 평론가, 연구자

200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문학평론 부문에 「시적 에피파니를 위하여-이장욱론」이 당선되어 비평 활동을 시작했다. 저서로 『현대 한국문학의 지도와 성좌들』(2009), 『20세기 후반 한국 현대시론의 계보』(2010), 『김동리 문학의 반근대주의』(2011) 등이 있다. 현재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선임연구원으로 재직하고 있다.

 

 

   —《웹진 문지》주간문학리뷰, 2012.01.10

출처 : 시하늘
글쓴이 : 보리향(菩提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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