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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홍일표의 좋은 시 찾아 읽기(76) - 존재의 허기

문근영 2014. 1. 21. 08:47

존재의 허기
홍일표의 좋은 시 찾아 읽기(76)

 

 


 
이영주
 
문이 언제 열릴지 모르니 담요를 덮읍시다 담요가 좋아요 무수한 총격과 해일이 덮치고 간 후에도 담요를
 
우리는 어둠으로 밀려난 게 떼처럼 열심히 기었습니다 가도 가도 서로의 옆구리
 
새로운 폐허의 시대가 도래한 것일까요 우리는 서로의 뼈를 찾아 안으로 안으로 들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기차 안에서도 담요를 덮어요 낯선 도시에 내릴 때에는 담요를 두르고 눈빛을 숨겨야 합니다
 
이런 저녁에는 바람이 안으로 들어와 긴 울음뼈 하나 세우고 갈지도 몰라
 
우리는 어둠 속에 남겨진 게 떼처럼 배를 뒤집었습니다 반군과 정부군은 알 수가 없지만
 
안쪽으로부터 싸움은 시작되고 있었어요 배를 까뒤집고 등으로 진창을 기어가는 우리 몸 속에서부터 차갑게 가라앉고 있었습니다
 
방공호에서 담요를 나눠 덮고 우리는 바닥 밑에서 손을 잡습니다 자도 자도 잠의 바깥
 
모든 것이 무너져도 우리는 살아 있습니다 담요를 둘러쓰고 영원히 끝나지 않는 이 허기 때문에
 
 
# 전쟁의 상황이 보입니다. 인간이 발명한 것 중 최악의 것이 바로 전쟁이지요. 이 시에는 정부군과 반군의 싸움으로 고통 받는 인간의 비극적 정황이 드러납니다. 적과 아군으로 나뉘어 전쟁을 치르지만 ‘어둠으로 밀려난 게 떼’일 뿐이고 향하는 곳은 앞이 아니고 고작 ‘서로의 옆구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곳엔 굶주림, 고통, 참혹한 절망만이 있습니다.

 ‘폐허의 시대’에 나약한 인간이 가진 것은 ‘담요’ 한 장입니다. 편안한 잠은커녕 공포와 불안에 떨면서 순간순간을 모면해야 합니다. 안락한 잠은 한낱 꿈일 뿐입니다. 담요 한 장으로 버텨야 하는 참혹한 현실 어딘가에 ‘긴 울음뼈 하나’ 세워지고, 그 상황에서 인간은 ‘배를 까뒤집고 등으로 진창을 기어가는’ 것입니다. 방공호에서 남루한 담요로 몸과 마음을 덮고 서로의 손을 잡고 바닥의 삶을 견디지만 행복한 잠은 실재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잠의 바깥’을 서성이며 모진 현실을 벗어나고자 몸부림칩니다.

 적도 아군도 아닌 한 개인의 삶은 폭압적 현실에 굴복하지 않고 극복 의지를 불태웁니다. ‘영원히 끝나지 않는 이 허기 때문’이지요. 존재의 허기는 삶의 원동력이고 절망의 저편을 바라보게 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입니다.

 인간의 역사는 전쟁과 천재지변으로 얼룩져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상황 속에서도 생의 의지를 불태우는 것이 인간입니다. ‘울음뼈’ 하나 푯대처럼 세우고, ‘모든 것이 무너져도’ 다시 일어서는 것이 존재의 이유임을 이영주의 시가 조용히 말해 주고 있습니다.
 
 

홍일표 편집위원
 
(1992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전문지 『시로 여는 세상』 주간)

 

 

-'문화저널 21'에서

출처 : 시하늘
글쓴이 : 보리향(菩提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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