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뭇거리며, 단어의 뼛속까지 가 닿기
ㅡ시집,『나를 두고 왔다』 2011년, 신승우 『푸른사상』
그에게 시간은 잘려나가기 쉬운 가장자리이며, 월경越境 직전의 모서리와 같다. 그의 내면은 불안한 작은 ‘모서리’들로, “혼자만의 추위”로, “들킬까봐 곤란한” 눈물로 이루어져 있다. 그의 세계는 근원적 불안으로 축축해지는 현존의 세계다. 그는 큰 보폭의 걸음을 걷지 않는다. 환한 대낮의 거리를 휘저으며 나아가기보다는, 머뭇거리며 뒤로 물러서는 듯 앞으로 나아간다. 섬세한 촉수로 더듬더듬 “꺾인 벽을 타고 넘는다.” 그는 시의 걸음을 느린 속도로 개진시킨다. 그는 천천히 본다. 천천히 듣는다. ‘곤란해 하고’ ‘머뭇거리고’ ‘불안해하면서’ 그러는 동안 충분한 시간을 갖고 사물과 대화를 한다. 사물이 걸어오는 말에 귀를 기울이고 사물에게 말을 건다.
“겨울이 뼛속을 훑고 지나가는 저녁이면” “귀를 땅에다 붙이고 간지러운 소릴 먼저” 들어보려 기다리는, (「당나귀-봄」) 그의 노고 때문에 “두그닥 두그닥, 어찌 들으면 먼 길 돌아오는 말발굽 소리 같은” 봄을 누구보다도 먼저 예비한다. 그러므로 불안은 그에게 간지러운 생명을 촉감하게 해 주는 선물을 준다. 그것이 바로 신승우 시의 역설적 힘이다. 감정을 노골화하지 않음으로써, 슬픔을 유예하며 얻게 되는 능동적 수동성, 수동적 능동성. 그런 방식으로 신승우는 시를 통해 멈추지 않고 움직인다. 뚜렷하진 않지만 분명히 작은 떨림으로 그의 시편들은 살아 움직인다. 그가 움직이는 방향, 모서리 너머 가 닿고 싶은 세계는 생명의 뿌리 쪽이다. 자서에서 표현한대로 그는 뜻밖의 사고로 생명을 잃을 뻔했다. 월경을 경험한 자다. 시간의 가장자리에 서 보았던 자다. 그에게 목숨보다, 생명보다 분명한 향일성은 없다. ‘오줌싸개’가 되고 싶지 않다는 시적 발화는 말을 넘어서 그의 전부를 건 절박한 고백으로 다가온다.
오줌싸개 놀이 알지.
이젠 네 차례야.
간신히 서 있는데, 다른 사람처럼 흙을 다 가져가면 난 쓰러져.
처음에 잘못 결정했다고 그러지마. 지금 어떻게 해야만 한다고 말하지 마,
그냥, 한번 안아줘.
너마저 흙을 그렇게 가져가면 난 쓰러져. 다신 일어서지 못할 거야.
난 오줌싸개가 되고 싶지 않아,
날 안아줘.
-「오줌싸개」전문-
다 큰 어른에게 ‘오줌싸개’만큼 암시적인 시어는 드물 것이다. 어린 날에도 어른이 된 후에도 오줌싸개가 된다는 사태는 불안하고 불쾌하고 당혹스런 일이다. 실컷 흙장난을 하거나 불장난을 하고 난 끝에 악몽을 꾸게 되는 어린 날이 있다. 낮 동안의 격렬한 즐거움이 자는 동안이나 꿈속에서는 불안으로 바뀌어 결국 오줌싸개가 되는 것이다. 즐거운 놀이가 불안으로 울음과 오줌으로 변하는 사태를 설명할 수 없는 것처럼 자신에게 들이닥친 불운을 시를 쓰지 않았다면 언어로 표현하기 어려울 것이다. 오줌싸개 놀이를 할 때처럼 어떤 순번에 의해 놀이처럼 찾아온 불운. 오줌을 쌀 것처럼 불안하고 공포스러운 운명의 히스테리 앞에서는 다 자란 어른도 오줌싸개가 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누구도 오줌싸개가 되고 싶진 않을 것이다. 악몽의 주인공이 되고 싶진 않을 것이다. 그는 호된 악몽을 꾼 아이처럼 간신히 서 있다. 얕은 흙 가운데 겨우 서 있는 나무막대기처럼 오줌을 쌀 정도의 불안으로 상대방이 흙을 다 가져갈까봐 불안해하고 있다. 다시 쓰러질까봐 다시는 일어서지 못할까봐 두려워하고 있다. 그 순간의 간절한 진실은 오줌싸개가 되고 싶지 않다는 것. 악몽에서 깨어나 울고 있을 때 누군가 안아서 구원해 주었던 어린 날처럼 누군가 안아주길 다독여 주길 그는 간절히 바라고 있다.
“모서리를 보았다고 그게 있다는 거야./ 눈을 크게 뜨고 다시 보아. 그걸 어떻게 볼 수 있지./ 혹시, 빛이 건너가는 걸, 본 건 아니야.”(「모서리」) 그는 모서리를 빛으로 전회轉回한다. “달팽이가 기어간다. 더듬이를 머뭇거리더니, 꺾인 벽을 타고 넘는다./ 그때 보았다. 모서리가 사라지는 것을.” 그는 모서리에 대한 인식을 빛에 대한 인식으로 바꿀 뿐만 아니라 모서리를 갖고 있는 벽을 월경越境함으로써 모서리가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가 시를 쓰는 행위는 달팽이가 예민한 촉수로 더듬거리며 머뭇머뭇 모서리를 넘어 넓은 면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과 같다. 그는 ‘오줌싸개’가 되고 싶지 않아 모서리와 싸우며 시를 쓴다. 그가 “짊어진 거울”에 반사되는 풍경들은 다른 운명의 표징이 아니라 그의 시의 표징이 될 것이다. 불안은 그를 파괴하지 않았다. 그는 시를 통해 복구되고 새롭게 생성된다. 그러므로 그의 상처와 두려움은 그의 시의 분화구다. 그가 “침침한 복도”같은 “사나운 발소리”같은 “낭떠러지” 같은 사건, 사태를 겪지 않았다면 그는 단어의 뼛속까지 들여다보지 못했을 것이다. 불안하지 않았다면 과민하지 않았다면 “꽃이 말할 수 없는 것”까지 들을 수 있는 예민한 귀를 얻지 못했을 것이다.
너의 미소에 반했다 말하는 사람들에게, 발을 보여주렴.
길에서 흘린 땀과 주름, 그 생채기를.
네 눈빛에 입 맞추고 싶다는 사람들에게 발을 보여주렴.
지나왔던 이야기와 연결된 골목들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이젠 열매를 보고 꽃술과 나비의 설렘을, 궁금해 하지 않아.
코를 세우고 턱을 깎을 순 있겠지만, 여행을 위해 물집을 터뜨리며
신발 끈을 단단히 묶진 않지.
꽃송이를 보며 뿌리가 어떠할 거라, 감히 상상하지 말기를.
드러난 것들만 진실이라고 배워온 눈에게, 뿌리는 생경한 저편의 이야기.
뿌리는 길을 빨아들여, 오늘도 너를 피워낸다.
-「꽃이 말할 수 없는 것」-전문
꽃의 감추어진 진실을 그는 단지 보는 눈이 아니라 이해하는 눈으로 본다. 그의 시적 심미안은 낮은 곳으로 낮은 곳으로 사물의 뿌리 쪽으로 내려가 있다. 꽃의 미소가 전부가 아니라는 것, 꽃의 발은 보았는가, 라는 질문을 통해 그는 꽃의 근원을 탐구한다. 그의 시에 의하면 꽃은 길 위에 있다. 발 없는 붙박이가 아니라 숨겨진 발을 가졌기에 길에서 흘린 땀과 생채기와 주름을 지니고 있는 움직이는 존재자가 꽃인 것이다. 미소와 눈빛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 꽃의 은밀한 진리다. “너의 미소에 반했다 말하는 사람들에게, 발을 보여주렴.” “네 눈빛에 반했다는 사람들에게 발을 보여주렴.” 시인은 꽃의 미소보다 눈빛보다 더 깊이 꽃을 파고들어 꽃을 이해한다. 꽃의 정신을 보려고 하는 시인의 의지가 투사된 것이다. 꽃의 내력, 꽃의 서사를 시인은 파고든다. “지나왔던 이야기와 연결된 골목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시인은 궁금하다. 시인은 꽃의 주름과 흘린 땀과 생채기에 주목하고 있다. “지나왔던 이야기와 연결된 골목들”의 상처와 그는 교감을 나누는 것이다.
시인은 꽃과 혈연을 맺은 것처럼 꽃과 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의 장애와 불편은 오히려 그가 대지 쪽으로 대지의 발쪽으로 가까이 가 닿을 수 있도록 그의 세계의 지평을 열어준다. 꽃이 아름다운 미소와 눈빛을 갖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골목들을 걸어왔는지 많은 땀을 흘렸는지 그는 진심으로 이해하고 있다. “드러난 것들만 진실이라고 배워온 눈”들은 시인이 보기에는 뿌리는 “생경한 저편의 이야기”로 치부해 버리는 자들의 것이라는 거다. 꽃이 자신의 뿌리에 대해서 말하긴 어렵다. 꽃의 뿌리에 대해, 꽃의 발에 대해 말하는 자가 시인일 것이다. 그러므로 신승우는 함부로 꽃을 상상하지 말라고 당부한다. “꽃송이를 보며 뿌리가 어떠할 거라, 감히 상상하지 말기를.” 꽃은 “길을 빨아들여” 꽃송이를 피워내는 자들이므로 꽃의 길을 모르고 꽃을 말하긴 어렵다는 것이다.
시인은 남다른 감각기관을 가진 자인가? 그는 봄 흙에서 작은 발 냄새를 맡는다. “흙 알갱이들이 손끝에서 흘러내린다./냄새를 맡아보니, 작은 발 냄새가 난다./ 네 작은 발 냄새”(「봄흙」) 발달한 감각기관 덕분이라기보다는 흙의 발 냄새, 봄의 발 냄새까지 맡으려는 그의 의지 때문일 것이다. 생에 대한 기울기, 경향, 절실함 때문일 것이다. 생의 미세뿌리까지 감지할 수밖에 없는 경험. 그 경험이 닿아 있는 곳은 꽃의 길을 지나 시인이 지나왔던 어떤 이야기이고 시인이 지나온 무수한 골목들이다. 그는 햇볕이 잘 들지 않는 골목에서 오랫동안 봄을 기다려 왔을 것이다. “봄이 오는 길을 다 닦아 놓고” 봄을 기다리는 신승우의 시에서는 바람이 아니라 봄 햇살이 분다. 그는 “바람이 멈칫할 때마다, 봄 햇살이 불었다”고 말하고 있다. 오래 햇볕이 들지 않는 납작 집에 살았던 사람이나 마음이 냉골인 사람이 남향집에 대한 무조건적인 편애를 갖는 것처럼 따뜻한 것, 화사한 것에 대한 무의식적 전회를 봄 햇살을 통해 기획하고 있다. 그는 황사 바람대신 봄 햇살이 그의 생애에 모처럼 불어오길 기대하고 있다.
지나왔던 어느 골목보다 외지고 캄캄했던 너를
왜 다시 들어섰는지는, 어떤 문장으로도 설명 못한다.
빈 젖을 칭얼대는 아이의 유년을 건너, 사내는 어미의 머리채를 낚아채고, 시간 맞추어 울음소리가 퍼질 때면, 곰팡이의 기호로 얼룩진 담벼락이 가리고 있던 빈 집에선, 누군가 자꾸만 떠나갔다
곰팡이의 성지인 이 골목 끝에, 강철 새벽이 있다며, 두부장수가 지나갈 때면,
무너지지 않으려, 담벼락을 등에 받치고 서서, 운명은 꿈꾸는 게 아니야, 받아들이는 거야라는 너에게서, 도망칠 수 없었다.
네 작은 발로 찍어낸 발자국들이, 밤하늘에 점멸할 때면, 어쩌자고 이 컴컴한 골목길에 들어섰을까, 한숨도 쉬지만.
골목을 들어서는 발걸음은, 결코 설명되지 않는다.
-(「골목길」)전문-
시인의 발이 혹은 꽃의 발이 이끌리는 곳을 다 설명할 수는 없다. 발이 저절로 가는 곳은 물론 마음이 가는 곳이다. 사람의 마음 속 시계가 반드시 반듯한 정오를 향하진 않는다. 불운에, 어둠에 마음이 더 끌릴 때도 있다. 악마성이라고 할 수도 있고 마력이라고 할 수도 있는 어둠을 반드시 확인하고 싶을 때가 있다. 그리워하거나 상상하거나 꿈꾸거나 돌이켜보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 항상 놓여 있는 파란 바다를 눈으로 확인하고야 닫힌 세계의 지평이 열리듯이 열린 세계에 대한 갈망의 공속으로 인간은 본능적으로 어둠을 골목을 찾게 된다. 부정하면서 그리워하게 된다. 타나토스적 본능이라고 할 수도 있고 모성회귀라고도 할 수 있는 동굴본능에 의해 발은 저절로 지나왔다고 생각하는 어둠의 시간으로 골목 쪽으로 다시 이끌려 들어간다.
“지나왔던 어느 골목보다, 외지고 캄캄했던 너를” 왜 다시 찾아갔는지는 “어떤 문장”으로도 표현하지 못한다. 외지고 캄캄했던 ‘너’는 받아들이고 싶지 않지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운명’일 수도 있고 시인이 등에 짊어지고 있는 거울 속 나르시즘일 수도 있다. 골목에서 무엇을 맞닥뜨리게 되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문제는 신탁처럼 꼭 그리로 끌리게 된다는 점이다. 나쁠수록 어두울수록 꼭 매혹되는 그런 심사. 그 골목의 외지고 캄캄한 시간에 “빈 젖을 칭얼대는 아이의 유년”이 있고 “어미의 머리채를 낚아채는 사내”가 있고 어김없이 당하는 폭력의 못된 습관이 있고 폭력의 시간에 맞추어 새어 나오는 “울음소리”가 있다. “곰팡이의 성지”가 되어가는 골목의 시간에 사람의 흔적이, 악착같은 삶의 그림자가 남아 있는 것이다. 골목의 말을 내뱉던 너. 골목을 닮은 너의 말. “운명은 꿈꾸는 게 아니야, 받아들이는 거야.” 자신의 운명을 언표로 확인받을 때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다. 살펴본 대로 그의 시적 사태들은 골목의 상상력이며 골목에서 시작되는 세계들이다. 그는 그곳에 골목에 (누군가를) (나를)두고 왔다.
바람 부는 언덕에 동생을 두고 왔다.
곁에 아무도 없어, 혼자일 텐데, 무섭고 외로울 텐데.
원인 모를 두통이 그치질 않는다. 머리 한 편이 바람에 얼얼했다.
흙손을 붙잡아 닦아주면 하얗게 빛나며 나타나던 손바닥은 내 손에서 떨어진 적 없었다. 빠진 이 창피한 줄 모르고, 활짝 보이며 웃던 소리가 귀에서 내려간 적 없었다. 그 입으로, 하루 종일 혀 짧은 소리로 지저귀던.
동생은 내가 책 읽는 걸 좋아했다.
공부를 하면 나중엔 사탕을 주며, 종일 놀아줄 줄 알았나보다
책을 펼치기만 하면 놀아달라 보채지도 않고, 물끄러미 지키다 잠이 들곤 했다.
책을 읽고 언덕을 내려와 한 일을 생각해보면,
승진도 결혼도, 뭣도 아닌, 바람부는 언덕에 동생을 두고 온 것이다.
나도 사람이었다. 언덕 쪽으로는 고개가 돌아가지 않았다. 독한 심장이 짐승의 목을 잡아채었다.
나도 안다. 허기진 몸에 부는 바람은 살갗을 뚫는다는 것을,
나는 또 안다. 언덕에 동생을 두고 와, 이제는 두툼한 옷이 배부른 몸을 감싸고 있지만,
죽어서도 그 언덕 바람은, 그치지 않을 거라는 것을,
-「나를 두고 왔다」-전문
그는 자신이 빠져나온 골목에 어둠 속에 “(나를) 두고 왔다”고 말한다. 자신과 동일시 될 수 있는 약한 것, 어린 동생을 지켜주지 못하고 그곳에 두고 왔다고 한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이 떠나온 골목을 “바람 부는 언덕”이라고 표현한다. “죽어서도 그치지 않을” 언덕의 바람은 끊임없이 그의 실존을 자극할 것이다. 그는 죄의식 때문인지 “원인모를 두통에” 시달린다. 상실감과 죄의식으로 머리 한편이 “얼얼하”다고 고백한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시편「나를 두고 왔다」는 시인의 가계에 들이닥친 불운의 한 자락을 엿보게 한다. “곁에 아무도 없어, 혼자일 텐데. 무섭고 외로울 텐데.” 책을 읽어주느라 놀아 주지 못한 어린 동생의 손을 어쩌다 놓치게 된 것일까.
책을 좋아하는 사람은 책 밖의 사람들을, 가까운 사람들을 섭섭하게 하기 쉽다. 다른 무슨 악의가 있어서라기보다는 책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책에 홀려, 의지하고 바라보아주고 기다려주는 손바닥을 놓친 기억은 두고두고 상처가 될 것이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과 책 밖의 사람은 서로가 서로에게 부재의 상처를, 깊은 상실감을 빚처럼 남기게 되는 것이다. 나중에, 나중에, 그렇게 책 읽는 시간을 제외한 나머지 시간을 자꾸 유예하며 옆 사람에게 곁을 주지 않는 게 책에 홀린 사람들의 습성이다. 책에 빠진 ‘나’와 책 밖에서 나를 기다리는 ‘어린 동생’의 운명을 공속으로 묶을 수 있는 것은 어두운 골목에서 나눠가진 “허기”일 것이다. “나도 안다, 허기진 몸에 부는 바람은 살갗을 뚫는다는 것을”, 살갗을 뚫는 날카로운 바람은 “죽어서도 그치지 않을”것이며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시의 끈질긴 동력이 될 것임을 예감한다. 부재와 상실감과 죄의식과 두통은 그의 시를 ‘마중’하는 마중물과 같은 것들이다. 무엇을 기다리는지도 정확히 모르면서 누구를 기다리는 동안, 그리워하는 동안 허기를 메우기 위해 ‘짐승’이 아닌 ‘사람’에게는 시가 필요한 것이다. 바람 부는 골목을 시원으로 두고 있는 시인은 비가 오면 “혈관 안까지 젖는 사람”(「비에 젖는 것은 틀린 일이다」)이며 “단어의 뼛속”을 달리는 사람이다.
우린 그 단어의 뼛속을 질주했다.
세상 어떤 것도 우릴 쫓아올 순 없었고, 어떤 시인이 그 속도가 광속 B612라고 했지만,
뒤에서 ‘네가 봤어’ 하는 소리에 울음을 터뜨렸다. 아무래도 좋았다.
우린 맨발이었고 낄낄거렸다. 그러다가도 엉엉 울었다. 미친 것 같았다.
아니, 미쳐 있었다.
우린 그 단어의 뼛속을 달렸고, 그곳엔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걸릴 것이 없었단 말이다. 하지만 우린 너무도 빠르게 달려서,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이상한 줄도 몰랐다.
우린 뼛속을, 바로 죽을 것처럼 질주했다. 어쩔 수가 없었다. 속에선 간지러운 더운 피가 돌고 돌고, 이 별은 우리가 맨발로 뛰어 돌리지 않으면, 낮과 밤이 바뀌지 않았기에.
우린 엉엉 울다가도 갑자기 꽈리 꽃처럼, 웃음을 터뜨리며 질주했다.
사랑.
그 아무것도 없던 말의 뼛속을.
-「그 단어의 뼛속」-전문
신승우에게 사랑은 ‘곤란한’ 것이다. 너무 많이 새어나올까봐, 새어나오는 슬픔의 강도를 앞서 제어하고 조절하는 그에게 ‘눈물’이 곤란한 문제인 것처럼 사랑 또한 그러하다. “사랑 영화였다. /사랑은 언제나 곤란한 문제다./ 가만히 찾아쥐는 손이, 축축해서 쳐다보니,/울고 있다./슬픔이 터졌다./팝콘이 터졌다.”(「영화를 보다」) “곤란한”이라는 표현 속에는 섬세한 감정의 무수한 잔뿌리가 은폐되어 있다. 곤란하다는 것은 살갗을 뚫고 혈관 안까지 파고드는 감정이다. 그 파고듬으로 그는 언젠가 사랑이라는 단어의 “뼛속을 질주했을 것이다.” 그의 표현에 의하면 광속 B612로. 단어의 뼛속이라니. 단어의 뼛속은 아무나 함부로 갈 수 있는 세계는 아니다. 신승우는 자신의 불구로 대지의 말에 세계의 말에 더 깊이 다가간다. . 세계의 기운과 생기를 그는 더 세밀히 더 깊이 감지하게 되는 것이다.
그는 뼛속을 달려본 그 단어 때문에 울음을 터뜨린 적 있다. 그때의 울음은 정말 뼈아픈 울음이었을 것이다. 등 뒤에서 확인하듯 “(사랑을)네가 봤어”하는 소리에 그는 그만 울음을 터뜨렸다. “아무래도 좋았다. 우린 맨발이었고 낄낄거렸다.” 그는 사랑을 아는 자이다. 그는 정말로 달려본 자이다. 왜냐하면 사랑의 뼛속은 정말 아무것도 없으므로. 사랑의 뼛속을 그는 보았다. 뼛속에서 그는 달린 적 있다. 광속으로. 그 속도는 동화 속 어린왕자의 별에 가닿을 수 있는 속도이다. 비현실적인 속도이다. 그 속을 달리는 자들은 “맨발이었고, 낄낄거렸고 그러다가도 엉엉 울었다. 미친 것 같이.” 사실 이 문장에 표현에 사랑의 속성이 다 들어있다. 사랑은 속도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속도밖에 없으므로. 사랑은 동화에서 다른 것으로, 어른의 것으로, 질주하는 속도로 성장한다. 맨발로 낄낄거리며 미친 듯 서로에게 함닉되다가 “네가 봤어” 하는 질문에는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는 것. 그것은 어떤 예감 때문이다. 불안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 단어의 뼛속에는 아무것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없는 말의 뼛속을 달리는 일이 사랑일 것이기 때문이다.
근본적으로 아무것도 없는 뼛속을 달리는 것이므로 신승우는 우리가 보내는 이 별에서의 모든 저녁이 문장의 저녁인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생각이 너무 많은 문장의 저녁. “쉬어터지도록 사랑해도, 죽어 잊혀지고 마는, 별의 하루가 가는구나./삭힌 홍어를 코에 담아 나온 저녁은, 밤보다 어두웠다...산꼭대기에 올라서서 너에게 편지를 쓰는 것, 바다 깊숙이 들어앉아/ 네 이름을 불러주는 것과, 어느 쪽을 택하겠니......”(「문장(文章)의 저녁」) 삭힌 홍어에서, 홍어를 맛볼 수 있는 골목의 저녁에서 그는 문장을 읽는다. “홍어가 그냥 삭은 게 아니라 몹시 번민한 것 같아.” 그는 “몹시 번민하는” 현생을 별에서 보내는 한철이라고 여긴다. 이 별에서 보내는 일생 혹은 하루가 “문장의 저녁”인 것이다. 사실 우리가 지나온 이야기, 꽃의 서사가 하나의 문장일 수 있다. 누군가를 “처음 안았던 셔츠의 땀 냄새” “최루가스에 땀이 버무려진 맛” 홍어가 데려온 오래 전의 서사가 결국은 하나의 문장으로, “홍어를 먹는저녁”으로 남게 되는 것이다. 무수한 골목들로 이어진 지상에서의 일생이 “생각이 너무 많은” 듯해도 사실은 “별의 하루”에 지나지 않는다면 두고 온 것, 상실의 아픔은 금방 아물 것이다. 간혹 상처의 아문 자리가 뜯어져 상처가 홍어처럼 거슬러 올라온다 해도 “그날 멀어져 가던 문장의 뒷모습” 으로나 남아 있어 어느 골목 끝에서 그 잔상을 오래 지켜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다른 골목을 가리키며 “여기 이 골목으로 가자.”(「문장의 저녁」)며 다시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이다.
그는 로터리를 천천히 돌며 가까운 성벽을 바라본다. 아마 그가 살고 있는 수원의 수원성곽을 자주 돌며 “이 이야기의 뜻은 무엇인가”(「성(成)을 돌다」)곰곰 되묻곤 할 것이다. 성成이라는 단어의 뼛속을 탐구할 것이다. “큼지막한 돌들이, 성안과 밖으로 갈라놓고, 꼼짝않은 고집이, 역사로 불리운다.” 그는 자신의 “전부”로 누르거나 눌린, 돌들의 뼛속을 들여다본다. “어떤 탐구자의 세계는 가장 강력한 현미경을 통해서만 밝혀질 수 있을 정도로 아주 작을 수 있고, 어떤 아픈 자의 세계는 비록 그의 세계가 그의 팔이 닿는 곳에서만 펼쳐지는 것이라 할지라도, 꽉 차 있을 수 있다.” 나는 그의 시편들을 읽으며 롬바흐의 문장을 떠올렸다. 어떤 의미에서 모든 시인은 탐구자이며 아픈 자이다. 나는 그가 부디 언어의 뼛속 깊은 곳까지 탐구하기를 파고들어가기를 기원한다.
【웹진 시인광장 Webzine Poetsplaza SINCE 2006】
권현형 시인
1966년 강원도의 주문진서 출생. 강릉대 영문과를 졸업. 경희대 대학원 국문과 석사, 박사 과정을 수료. 1995년 《시와 시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중독성 슬픔』(시와시학사, 1999)과 『밥이나 먹자, 꽃아』(천년의시작, 2006) 가 있음. 2006년 한국 문화예술위원회 창작지원금 수혜. 2009년 제2회 미네르바작품상 수상.
*출처 :http://seeingwangj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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