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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홍일표의 좋은 시 찾아 읽기 (77) - 연민의 시학

문근영 2014. 1. 20. 08:25

연민의 시학

홍일표의 좋은 시 찾아 읽기(77)

 

 

아메리카노
 
박진성

최승자 시인을 참 좋아하는 후배랑
엔젤리너스에서 커피를 마시는데
인터넷으로 주문한 시집 한 권이
아메리카노 한 잔보다 싸다고
시집 선물 하는 마음이
마른 날 땡볕 같다고
나에게 괜스레 미안해했다
후배의 눈동자가 어디
사진에서 본 아프리카
커피 노동자 눈처럼
슬퍼 보였다
 
 
# 팔만대장경 경판도 그걸 모르는 사람에게는 한낱 빨래판에 지나지 않지요. 불교의 대중화에 큰 역할을 했던 법정 스님이 누구나 알아듣기 쉬운 글로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은 것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시 역시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시가 있고, 긴장하여 읽어야 하는 시가 있습니다. 경판과 빨래판의 차이를 곰곰 생각하면서 쉬운 시 한 편을 만나봅니다.
 
화자와 마주 앉은 후배가 최승자 시인을 좋아하는 걸 보니 예사 독자는 아닌 모양입니다. 어느 문학 행사장에서 갓 등단한 신인이 시단의 한 원로에게 “선생님도 시인이세요? 어디로 등단하셨어요?”라고 물었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가 전해지는 현실은 마구잡이로 신인을 배출하는 척박한 시단 현실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징표입니다. 최승자는 커녕 백석이 누구인지 김수영이 누군인지도 모르는 시인들이 한둘이 아닌 것은 엄연한 현실이지요.
 
이 시의 핵심은 시집 한 권 값이 커피 한 잔보다 싸다는 사실에서 촉발된 것입니다. 적게는 3, 4년, 많게는 7, 8년 만에 시집을 내는 것이 일반적인 경우이고, 한 권의 시집을 내기 위해 시인들은 숱한 불면과 신고의 나날을 보내게 됩니다. 그러한 과정을 통해 세상에 나오는 시집들은 나오자마자 천대받기 일쑤이고 대형서점에서조차 천덕꾸러기가 되었습니다. 경제적 가치로 봤을 때 시집은 젬병입니다. 시집은 이미 돈이 되지 않는 물건이 된 지 오래입니다. 이런 현실을 화자의 후배는 정확히 꿰뚫고 있는 겁니다. 커피 한 잔 값보다 못한 한 권의 시집이 오늘의 현실이고, 거저 얻은 시집도 아예 들여다보지 않거나 라면 냄비 깔판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고작입니다.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한 사람조차도 시를 읽지 않으니 다른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겠지요.
 
그래서, 그래서 다행입니다. 커피값만도 못하니 아무도 훔쳐가지 않고 아무도 탐내지 않고 아무도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아무 가치도 없으니 시의 가치는 무한합니다. 화자를 바라보는 후배의 눈은 ‘아프리카 / 커피 노동자 눈처럼’ 한없이 슬퍼 보였지만 그 감정은 화자의 연민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본래 연민이 상대의 슬픔을 내 것으로 끌어안는 능동적 수용이라면 결국 슬픔의 새로운 주체는 곧 화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화자의 고단한 시쓰기는 계속 될 것이고, 시의 생명 또한 영원할 것입니다. 해 뜨고 해 지는 일처럼 정신의 내밀한 밀실은 486년 후에도 여전할 테니까요.

홍일표 편집위원

 
(1992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전문지 『시로 여는 세상』 주간)

 

 

-'문화저널21'에서
 

출처 : 시하늘
글쓴이 : 보리향(菩提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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