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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장석주의 詩와 詩人을 찾아서 (54) 정호승 〈수선화에게〉

문근영 2014. 1. 20. 08:23

장석주의 詩와 詩人을 찾아서 (54) 정호승 〈수선화에게〉
외로움에서 도피 마라. 자기를 온전히 느끼는 충만한 시간이니…
장석주  시인·문학평론가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걷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갈대숲에서 가슴 검은 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
 
  네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 퍼진다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라고 직설하는 구절을 보라. 시인은 외로움을 사람의 본질로서 통찰한다. 외로운 이들은 대개 혼자 있는 사람들이다. 사람은 혼자여서 외로운 게 아니라 외롭기 때문에 혼자라고 느낀다. 둘러보면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우주 만물은 다 외롭다. 갈대숲의 검은 도요새도, 하느님도, 산 그림자도, 종소리도 다 외롭다. 그러나 외로움은 고립과 불안에 빠진 영혼의 전유물이다. 외롭기 때문에 우주 만물이 다 외롭게 보이는 것이다. 산 그림자는 그저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오고, 종소리는 그저 울려 퍼질 따름이다. 산 그림자나 종소리가 외로울 까닭이 없다. 바라보고 듣는 이가 외로운 제 심사를 덧씌우니 산 그림자가 외롭고, 종소리가 외롭다고 느껴지는 것이다.
 
  실향과 소외는 외로움의 기본 조건이다. 사람은 고향을 떠나 있을 때나 혼자 있을 때 외로움을 느낀다. 외로움은 낯익은 세계, 혹은 정서적인 유대에서의 이탈로 인해 쓸쓸함과 서글픔을 동반한다. 고향이 공존과 공생의 장소라면 타관은 배타적 개별자의 공간이다. 진화한 고등 인간은 고향을 파괴하고 그 자리에 도시를 세우고 문명 세계를 건설한다. 우리는 그렇게 상징적 장소 결속에서 풀려나 영원한 디아스포라가 되었다. 고향을 떠나는 순간, 그 인격과 상관없이 누구나 떠돌이 장돌뱅이 처지와 다름없이 되어버린다. 삶에서 신성성은 사라지고 세속성이 달라붙고, 가변(可變)과 유동(流動)이 많은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고향을 잃은 자는 자기 정체성에 손상을 받는다. 물화와 고독은 그 손상의 결과들이다. 영원히 부적응하는 육체와 영혼으로 오랫동안 타관을 떠돌며 “만인은 만인에 대해 늑대”와 같이 서로에 대해 으르렁거리며 점점 더 고립무원(孤立無援)의 상태에 빠진다. 고립무원의 상태에서는 타인은 말할 것도 없고 자신마저 자기의 적으로 변신한다.
 
  고향을 잃은 무적자(無籍者)들은 탈아 상태에 빠진다. 즉 정신적 불구로 살아야 하는 운명에 처해진다. 모든 익명의 타자들을 잠재적인 적으로 규정하고 늘 의심하고 경계하며 으르렁거린다. 그래서 외로움은 병적이고 소모적이고 파괴적인 감정으로 받아들여진다. 외로움은 늘 나쁜 평판을 달고 다닌다. 외로운 이들은 불면에 시달리고, 우울증을 앓고, 자살 충동과 싸워야 하고, 더러는 약물에 중독된다고 한다. 이것들은 외로움에 대한 반쪽의 진실이다. 외로움의 본질은 타자의 도움이 필요 없는 자기 안의 충만이다. 온전히 자기 자신이 되어 자기를 바라봄이다. 외로운(Einsam)이라는 독일어는 자기 자신과 하나가 되는 사람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외로움은 사람의 무리에 종속되지 않고 저 스스로 자의식의 주체로 꿋꿋하게 설 수 있는 사람이 누리는 감정이다. 분명한 것은 외로움의 한 본질이 매우 독립적인 기질과 맞닿아 있다는 것이다.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외로움은 모든 위대한 정신의 운명이다”라고 말한다. 외로움은 “안식, 아름다움, 집중의 장소”(울프 포샤르트, 《외로움의 즐거움》)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위대한 시나 그림, 음악과 같은 예술의 창조는 외로움에서 나온다. 외로움은 예술 창조를 낳는 정금(正金)의 시간이다. 모든 그리움은 외로움에서 배태된다. 누군가를 간절히 그리워하는 순간, 외로움은 감미로워진다.
 
  자주 강가에 나가 강물이 흐르는 것을 바라본다. 강물은 그치지 않고 출렁이며 흘러간다. 나뭇가지에 앉아 노래하는 새들의 소리를 듣는다. 새들은 어느 하루도 쉬는 법 없이 지치지도 않고 노래한다. 나는 외로운가? 그렇다. 외로움은 내 존재가 불가피하게 품은 그늘이다. “나는 그늘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 나는 그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 나는 한 그루 나무의 그늘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 햇빛도 그늘이 있어야 맑고 눈이 부시다 / 나무 그늘에 앉아 나뭇잎 사이로 반짝이는 햇살을 바라보면 / 세상은 그 얼마나 아름다운가 // 나는 눈물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 나는 눈물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 나는 한 방울 눈물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 기쁨도 눈물이 없으면 기쁨이 아니다 / 사랑도 눈물 없는 사랑이 어디 있는가 / 나무 그늘에 앉아 / 다른 사람의 눈물을 닦아주는 사람의 모습은 / 그 얼마나 고요한 아름다움인가”(정호승, 〈내가 사랑하는 사람〉) 나는 나무 그늘 아래 호젓하게 앉아 그늘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그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노래하는 시인의 시를 읽는다. 시인은 쓴다. “울지 마라 /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사람은 늘 자기 안에서 외로움이라는 체내시계가 끊이지 않고 똑딱거리는 소리를 듣는다. 외로움에서 함부로 도피하지 마라. 술에 취하는 것, 폭식, 난잡하게 사람을 만나는 것은 해결책이 아니다. 모든 형태의 중독은 도피다. 외로움과 꿋꿋하게 마주 서라. 외로울 때야말로 내면을 성찰하고 존재의 자양분을 우주에서 취할 때라는 것을 기억하라.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다면 자기 스스로 고향이 되어야 한다. 외로움을 당신의 실존이 뿌리를 내리고 정주하는 “있음의 고토(故土)”, 즉 이상향으로 가꾸라. 그때 외로움은 존재에서의 소외가 아니라 자기 안의 충만, 허무와 절망에서 벗어나게 하는 동력이 될 수 있다. 
  
   
  정호승(1951~ )

 

은 경상남도 하동에서 태어난다. 대구에서 청소년기를 보내며 문학 소년으로 자라난다. 정호승의 이름을 처음 알게 된 것은 학생잡지 <학원>이다. 정호승은 대구에 있는 대륜고등학교에 다니던 중에 <학원>에서 시행하는 학원문학상을 받았다. 경희대학교 국문학과에 문예장학생으로 입학해서 어렵게 대학을 마쳤다. 더러는 잠잘 곳이 없어 학교의 빈 강의실에서 자기도 했다고 한다. 1973년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시 〈첨성대〉가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1973년에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한 시인들과 동인 ‘1973’으로 활동하다가 해체하고, 1976년에 다시 김명인·김창완·이동순 등과 함께 ‘반시(反詩)’ 동인으로 활동했다. 첫 시집 《슬픔이 기쁨에게》가 나온 것은 1979년이다. 주요 시집으로 《서울의 예수》(1982)와 《새벽편지》(1987), 《별들은 따뜻하다》(1990),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1997), 《외로우니까 사람이다》(1998),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라》(1999) 등이 있다. 이 밖에도 여러 시집과 동화집이 있다. 정호승의 시들은 쉽고 따뜻하다. 그래서 소통의 힘이 세고, 정서적 감화력이 넓다. 소외의 감정들을 품고 보듬어 안으며 위로한다. 그 시적 어조는 모호하지 않고 투명하다. 정호승 시인에게는 독자가 많은가 보다.

  
  사진 : 김선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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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시하늘
글쓴이 : 보리향(菩提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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