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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홍일표의 좋은 시 찾아 읽기(78) - 나는 없다 / 박세현

문근영 2014. 1. 20. 08:23

홍일표의 좋은 시 찾아 읽기(78)

 

 

나는 없다
 
 박 세 현
 
이제, 나는 세상과 좀 떨어져 있어야겠다
세상이라기보다 세상을 떠받들고 있는 손들과
헤어져야겠다
다 마신 커피잔을 들어서
바닥을 한번 더 들이켤 때가
지금이다 다시는 입에 들어올 것이 없다는 것을
마지막으로 확인하는 입술처럼, 나는
입맛을 다시겠다
아침에는 커피 대신 무를 한 컵 마시고
무즙도 괜찮겠다 무의 즙은 겁 없이 늙은 남자의
소담한 폐허를 다스리기에 좋을 것이다
오후에는 아파트 뒷길을 걸어가서
논어를 읽고 있을 당신과 막국수를 먹고
당신에게서 갚지 못할 약간의 용돈을 빌리고
비브라토가 빠진 휘파람을 연습하겠다
식은 국물 같은 삶을 조심히 떠먹으면서
음악 없이 잠들도록 애쓰고
진짜로 꿈꾸지 않겠다고 서약한다
아무래도 나는 내가 아니다
찾지 마라, 나는 없다
 
 
# 박세현의 시는 묘한 흡입력을 지닌다. 무슨 거창한 담론을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고 낯선 감각으로 현란한 수사나 기교를 드러내는 시도 아니지만 시적 매력만큼은 독보적인 지점에 있다. 한때 그의 시를 읽으면서 흠뻑 매료된 적이 있다. 현실에서 몇 발자국 벗어나 냉소로 때론 관조의 시선으로 비루한 삶의 안쪽을 들여다보는 그의 시선은 상당히 섬세하고 깊다. 그 과정에서 슬픔, 쓸쓸함, 그리움 등의 원초적 정서가 교교한 달빛처럼 또는 저음의 바순 연주곡처럼 나타난다. 그리고 시인은 삶의 현장에서 시치미 떼며 슬그머니 돌아서지만 (그래서 그의 얼굴 표정은 잘 보이지 않지만) 손에 만져질듯 시인의 상처와 아픔은 더욱 명료해진다.
 
「나는 없다」에서도 허무의 일단을 본다. 시의 모두에서 화자는 ‘이제, 나는 세상과 좀 떨어져 있어야겠다’ 라고 선언한다. 이 말의 이면에는 생에 대한 회의와 오랜 절망과 좌절의 이력이 숨어 있다. ‘다시는 입에 들어올 것이 없다는 것을’ 화자는 이미 아프게 깨달은 것이다. 이제 ‘겁 없이 늙은 남자’에게 남은 것은  ‘소담한 폐허’일 뿐이다. 그러나 화자는 허무주의로 치닫거나 현실 밖으로 도망치지 않는다. ‘무즙’ 곧 ‘무의 즙’ 더 확장하여 읽으면 無의 즙으로 폐허와 같은 현실을 극복하고, 일상의 소소한 삶을 이어간다. 즉 ‘식은 국물 같은 삶’을 살아가는 것인데 그 삶은 ‘음악’도 없고 ‘꿈’도 없는 그야말로 알맹이 없는 껍데기로서의 존재인 것이다.

 화자는 마지막으로 반전의 도발적 선언을 한다. ‘아무래도 나는 내가 아니다 / 찾지 마라, 나는 없다’ 이 자조적 독백을 선적 수사로 볼 수도 있지만 실은 존재의 내밀한 아픔을 툭 던지듯 한 마디 하고 돌아서는 것이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휘적휘적 걸어가는 화자의 뒷모습이 마치 어느 선승의 모습처럼 애틋하지만 그는 여전히 생의 안팎을 넘나들며 ‘쪽 팔릴 때마다 민낯으로 / 숭고해지는 생’(「숭고한 생」)을 살아가는 시인인 것이다.
 

홍일표 편집위원
 
(1992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문화저널21'에서

출처 : 시하늘
글쓴이 : 보리향(菩提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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