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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월평|時調] 치렁치렁한 멋,허한 맛 / 홍성란

문근영 2013. 10. 31. 17:46

 

 

[월평|時調] 치렁치렁한 멋,허한 맛 / 홍성란
[59호] 2013년 03월 01일 (금) 홍성란 srorchid@daum.net

   

홍성란
시조시인

말하지 않은 말

오래전에 어느 시인

의 작품론에서 〈눌변의 수사학, 혹은 정열의 시혼〉이라는 제목을 쓴 적이 있다. 그 글에서 미당 서정주의 ‘달변의 혓바닥’을 함께 이야기했다. 달변의 혓바닥보다는 조금은 어눌한 듯 더듬더듬 말하는 데 진정성이 엿보일 수도 있다는 생각과, 그런 어눌한 듯 보이는 말부림에서 혼신을 다하는 모습을 본다는 생각을 적었던 것이다. 최근 어느 시 전문지에서 1행시론을 기획했는데 한 시인은 “눌변의 수사학, 달변의 침묵”이라 썼다. 달변의 침묵이란 말은, 말하지 않는 게 낫다는 말로 이해할 수도 있다. 재밌다. 말하지 않고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그러나 좋은 시란 그래야 한다. 말하지 않고 말하는 법을 시인은 알아야 한다. 그 절제된 말과 말 사이에서 독자는 시인이 ‘말하지 않은 말(言外言)’을 찾아내는 기쁨을 누리고 싶어 한다. 비록 ‘작자는 한 가지 생각으로 쓰고 독자는 각자의 감정에 따라 이해한다(作者以一致之思, 讀者各以其情而自得)’ 해도, 독자는 보물찾기처럼 제 빛깔대로 시인이 말하지 않은 말을 찾아서 느낄 때 흐뭇하여 자신이 그 좋은 시를 이해한 것으로 안다. 공감(共感)한다는 것이다. 공명(共鳴)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말이라는 것이 어떤 이 말처럼 속내를 감추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일 까? 다른 장르라면 모를까 적어도 시에서는 장난질 삼가고 새로운 말로써 시다운 첫 마음을 잘 보여주기 위해 언어의 두레박을 퍼 올려야 한다면 너무 소박한가? 특별히 시조에서는 처음 마음 안에 떠오른 어떤 의상(意象, image)을 곡진하게 드러내되 새로운 말, 세상에는 없던 첫소리로 질러내기를 바라며 그 고고성(呱呱聲)이 언어문자로 겸허하고 정갈하게 드러나기를 바라는 것이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하듯이, 새로운 것은 없다. 변주가 있을 뿐. 그러니 시마(詩魔)의 울음을 받아 적되 자신의 고유한 음색으로, 세상에 없던 노래로 다르게 울어야 한다는 것이다.

 

 

시인이라는 곡비, 시라는 울음

 

문학은 인간 삶의 역사다. 시는 사람 사는 이야기다. 맵고 짜고 쓰고 신, 사람 사는 이야기가 빠진 시는 가볍기 그지없다. 시란 시인이라는 곡비(哭婢)가 나 대신 울어주는 울음이다.  

 

가느다란 가지 끝에 새처럼 앉아 있었다
가지들 흔들릴 때면 옮겨가며 앉아 있었다
옮겨간 그 가지마다 너는 나와 함께 있었다

 

이제 남은 반백과 희미해진 지문 앞에서,
손 흔들 사이도 없이 빠져나간 시간 앞에서,
나라고 외치는 너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지상에서 나의 기거를 증명해온 기록이여
숨 가쁘게 그려온 내 삶의 향방이여
수십 번 넘어지면서도 웃고 있는 얼굴이여.
— 이우걸 〈주민등록증〉(《현대시학》 2013년 1월호)

 

사람 사는 냄새가 진하게 우러나는 시다. 주민등록증을 가만히 바라보노라면 살아온 내력이 보인다. “숨 가쁘게” 살아온 “내 삶의 향방”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간다. 이사를 하도 자주 다녀 뒷면에 주소를 기재할 난이 없던 때가 있었지. 2000년에 주민등록증이 카드식으로 바뀌고 2001년에 주소변경란에 적은 주소지가 천재지변이 없는 한 바꾸고 싶지 않은 나의 현주소다. 그러네. 주민등록증은 “나의 기거를 증명해온 기록”이네. 시인도 나처럼 주민등록증을 몇 번씩 바꾸고 주소지도 열두 번씩이나 바꾸었을까? “가느다란 가지 끝에 새처럼 앉”은 고단한 생에 차마 여기 적을 수 없는 곡절이 생길 때마다 그 “가느다란” 발목을 움직거려 자리를 “옮겨” 앉는 작은 “새처럼” 조바심 많던 시절. 어언 칠흑 같던 머리는 “반백”이 되고 주름살 많은 손등과 “희미해진 지문”으로 “수십 번 넘어지면서도” 그냥 “웃고 있는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사람. “반백”은 “희미해진 지문”은 부정할 수 없는 “나”이기에 “나라고 외치는” 것만 같은 플라스틱 얼굴.

 

우리는 “수십 번 넘어지면서도” “웃고 있는 얼굴”을 해야 하는, 속도전의 경쟁과 불화와 균열을 피할 수 없는 고해(苦海)에 산다. 그러나 “웃고 있는 얼굴”은 삶에 대한 끝없는 긍정을 표상하기도 한다. 같은 지면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시인은 “시조의 현대성을 작품으로 실천하려 노력”해 왔다. 어머니 말씀처럼 긍정의 힘을 믿고 “진실”과 “감동”이라는 명제를 가슴 깊이 새기고 “진솔한 시”로써 가감 없이 시대를 증언하고자 했다. 이러한 노력을, 삶의 구체적 국면을 다룬 〈만년필〉 〈혈연〉 〈관계〉와 같은 다른 시편들도 증명한다. 〈주민등록증〉은 시인이 말하는 ‘현대성’을 담보한 시조의 모델인 동시에 그만그만하게 살아가는 독자 대중의 신산한 삶을 대변해주는 곡비의 울음이다. 이 곡비에게는 낭만이 있다. “수십 번 넘어지”며 “숨 가쁘게” 살아왔으나 “손 흔들 사이도 없이 빠져나”가 버리는 “시간”에게 “손 흔들”어 주고 싶은 마음도 낼 줄 아는 낭만이 있다. 멋이 있다. 이 시조의 맛이 리얼하다면 이 시조를 풀어 쓰는 언어는 낭만적이다. 시조가 시조의 맛을 내는 일은 당연하지만, 부러 꾸며 쓰지 않았듯 아무렇지도 않게 시조의 멋을 낸다는 것은 넘볼 수 없는 가치다.

 

목포항 허름한 여관 불 끄고 누워보면
익숙해진 어둠이 물살을 더듬다가
마음의 한쪽 긁어내는 파도를 몰고 온다

 

가위눌린 꿈들을 여관방에 남겨두고
선창 어귀 혼자 앉아 담뱃불을 붙일 때
아득한 전생의 꿈인가, 용골이 나를 본다

 

미싱 소리 하나 없이 별을 박은 밤하늘
나는 문득 부표처럼 흔들리다 돌아와
창문에 흘러든 바람의 주름살을 읽는다
 — 박현덕 〈목포항에서〉(《유심》 2013년 2월호)

 

시인의 내면 풍경은 유달산이나 삼학도나 여객터미널, 카페리 스타크루즈호 같은 데 닿아 있지 않다. 〈송정리 시편〉과 같은 일련의 작품들이 결핍과 소외와 고독의 창변에 닿아 있는 것처럼 시인은 지금 허름한 여관방과 어둠과 물살과 가위눌린 꿈들에 닿아 있다. 아득한 전생의 이루지 못한 꿈처럼 부표처럼 흔들리는 생의 부두에 닿아 있다. 이런 생의 불협화음이 시 전반에 깔려 있음에도 태연자약 아무렇지도 않고 담담한 언어가 정연하게 의상을 드러내고 있다. 작위와 구태를 벗은 언어의 묘용이 지극하다.

 

왜 시인은 목포항 허름한 여관에 투숙하게 된 걸까. 한두 번이 아닌가 보네. 불 끄고 누운 여관방의 어둠이 익숙해졌다니. 방파제에 부딪는 파도소리가 시인의 마음 한쪽을 긁어대니 잠 못 이루는 시인은 선창 어귀에 나앉아 담뱃불을 붙인다. 얼마나 앉아 있었을까. “나”를 보고 있던 “용골”과 눈이 맞았네. “나”에게도 저 거대한 선체를 잡아주는 “용골” 같은 강골의 등뼈가 있었으리. 있었으나 그것은 “전생”의 일. “허름한 여관”이나 “익숙해진 어둠”이나 “가위눌린 꿈들”이나 “부표처럼 흔들리”는 모양이 지금 “나”를 둘러싸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간 것은 돌아오고, 높아지면 반드시 낮아지고, 끝 간 데까지 갔다면 새롭게 변하리니 두려워하지 않으리. 그러니 시인의 내면 의지는 아름다운 “밤하늘”에 “미싱 소리 하나 없이” 빛나는 “별을 박”아 두고 새롭게 “돌아”오는 “나”를 기다렸으리. 아득한 꿈처럼 멀리 간 “나”는 “돌아와” “바람의 주름살”이 “읽”어 주는 해도(海圖)를 따라 순항하리.

 

그렇다. 시인은 한 가지 생각으로 쓰고, 독자는 각자의 감정에 따라 이해한다. 작품은 불확정적이며 개방적이어서 감상자가 발굴하고 해석해 주기를 기다리는 존재다. 감상자의 텍스트를 둘러싼 전-이해(preunderstand)는 텍스트와 소통함으로써 새로운 진리를 만들어낸다고 보면, 작품도 자신과는 다른 감상자를 통해 자신의 고유한 의미를 초월하게 된다. 작품은 계몽자도 오락의 대상도 감정 이입의 대상도 아닌, 소통자다(장파(張法)). 아무리 고달픈 삶의 질곡에 처해 있다 하더라도 담담하게 생을 반추하며 그 누추한 자리에 아무렇지도 않게 “돌아와” “앉”는 “나”의 낮고 겸허한 자세 또한 내면 의지의 표현이다. 이 모양은 감상자에게 한없는 연민을 불러와 그 가슴에 그렁그렁한 “별”을 달아주고 “바람의 주름살”이 일러주는 해도를 따라 순항하게 한다.

 

구슬구슬 치렁치렁한 멋

 

사설시조는 말을 사슬처럼 구슬구슬 치렁치렁 엮어 말수가 많아진 시조를 가리킨다. 근엄하고 아정한 평시조로써 못다 푼 정감을 수다스럽게 풀어놓으며, 기쁨의 정서이거나 슬픔의 정서이거나 해소해버리는 것이다. 사설시조는 평시조의 확장형이어서, 3장 형식을 고수한다. 종장의 첫 마디는 3음절로 고정한다. 옛 사설시조나 현대 사설시조나 대체로 중장이 길어진 경우가 많으나, 3장이 모두 4음4보격 평시조의 수준을 훨씬 뛰어넘어 길어지는 예도 많다. 특별히 현대 사설시조에 와서는 초장과 종장을 평시조의 형식에 맞추어 쓰며 중장에서 사설을 길게 풀어쓰는 경향이 있다. 이는 오늘의 자유시와 변별성을 가지기 위한 노력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사설 확장으로 인한 방만을 다잡아 평시조와 같이 완결구조를 갖추려는 의식적 노력이기도 하다. 교사 신양란은 스스로 “선생 똥은 개도 안 먹는다”고 말할 만큼 탁 트인 생각을 가진 천생 사설시조시인이다. 〈웃은 죄〉의 말부림은 가히 현대사설시조의 전범이 될 만하다. 마치 판소리마당의 소리광대가 아니리를 풀듯 자재한 사설을 풀어놓고 있다. 원번호를 붙여 사설시조의 장별(章別) 네 마디 형식 구조를 표시해 본다.

 

① 민영이 ② 웃음보는
③ 톡 건들면 ④ 탁 터진다네.

① 우스워 웃은 죄는 그냥저냥 용서하되, 별 것도 아닌 일에 푸하하하 웃은 죄는 죄질이 심히 무겁도다. ② 네 죄를 네가 알렷다. 제가 어찌 죄를 짓고 모르쇠로 나자빠지랴. 고개를 푹 숙인 채 벌을 청하는구나. ③ 아무렴 그래야지, 그런대로 기특한 지고, 용서하려 맘먹고 왜 웃었느냐 물으니, 지난 시간에 웃다가 혼난 생각나서라나. ④ 그러면서 또다시 푸하하하 터뜨리니, 저 놈의 부실한 웃음보를 어찌하면 좋단 말가.

 

① 그래도 ② 뚱한 놈보다는 ③ 백 번 낫지. ④ 그럼, 그럼…….
(* 원번호는 인용자)
— 신양란 〈웃은 죄〉(《시조시학》 2012년 겨울호)

 

사설시조 또한 평시조와 같이 각 장은 네 마디 형식이되, 4음4보격의 구조를 잘게 쪼개어 2음보격으로 촘촘히 말을 주워섬기는 것이다. 민영이는 “톡 건들면 탁 터”지는 “웃음”이 참 많은 밝은 아이다. “톡”에서 “탁”으로 넘어가는 적확한 시어 구사가 사설을 감칠맛 나게 한다. 덩궁 딱, 궁딱 따닥, 궁쿵 탁, 구웅 궁! 고수가 북을 울리고 추임새를 넣으며 아니리광대 구슬구슬 엮는 사설이 일품이다. 중장에서 구슬구슬 엮이는 사설의 말본새는 마치 판소리마당의 소리광대가 아니리로 청중을 휘어잡는 듯하다.

 

웃음이 헤픈 민영이는 걸핏하면 웃는다. 참 “부실한 웃음보”를 가졌다. 웃어서 혼난 아이가 또 웃어서 “왜 웃었느냐 물으니” “지난 시간에 웃다가 혼난 생각”이 나서 웃었단다. 참, 기막힌 학생이다. 이쯤 되면 선생도 그냥 웃어버릴 수밖에 없을 것. 그래서 선생님은 “그래도 뚱한 놈보다는 백번 낫다”는 결론을 내리고 만다. 정겨운 교실 풍경. 교사 신양란은 지금 아이들과 장난도 치고, 속도 상해 하면서 지내온 시절이 그립다. “선생 노릇도 예전 같지 않”다는 그의 교실에는 요즘 어떤 풍경이 펼쳐지고 있을까. 부디 교사와 학생 간에 따스한 웃음이 오가기를 바란다.        

 

여운, 그 허한 맛보기

 

글은 다 했어도 뜻의 여운이 남는 시가 있다. 시인이 본 것[觀]은 다만 본 것이 아니다. 풍경을 보고 느낀 것이 시인의 내면으로 들어와 그 풍경의 의미를 곱씹게 하고[咀味] 그 의미를 알아 느끼게 하고 함께 울게 한다[共鳴]. ‘실질적인 보기’에서 ‘허한 맛보기’로 전화(轉化)하는 것이다.  

 

선릉역 5번 출구에
다리 없는 남자가 앉아 있다

 

저도 제가 이렇게 될 줄 몰랐습니다

 

못 본 척
지나치는 나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 권영오〈공명(共鳴)〉(《유심》 2013년 2월호)

 

지하철 3호선 안국역 입구 계단에서 동전통을 놓고 엎드린 이를 가끔 본다. 육신이 멀쩡한 이도 있지만 가끔 불구가 된 신체 일부를 드러내놓은 이도 더러 본다. 바로 그 장면이었을 것이다. 선릉역 5번 출구에 다리 없는 남자가 앉아 있다. 어쩌다 저렇게 되었을까. 그냥 지나갈까, 지폐 한 장이라도 넣고 갈까 망설이는 사이 그냥 지나쳐온 적이 한두 번인가. 그런데 그 남자는 “저도 제가 이렇게 될 줄 몰랐습니다”라는 문구를 골판지에 적어 놓고 있다. 가다 멈칫, 아니면 천천히 지나가며 그 골판지에 적힌 글을 본다. “저도 제가 이렇게 될 줄 몰랐습니다.” 극한의 사정을 이렇게 한마디로 요약하다니.

 

“못 본 척/ 지나치는 나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이렇게 되다니. 화자가 어떻게 되었단 말인가. 감상자는 의문의 미궁에 빠진다. 작자가 어떻게 되었단 말인가. 멀쩡한 두 다리로 걸어 못 본 척 지나치는 나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니. 아마 화자 또한 다리는 있되, 다리 없는 남자의 처참한 사정에서 그리 멀지 않은 상황에 있나 보다. 그래, 못 본 척 지나치는 화자도 그 남자를 보고는 제 모습인 양 아파 뼈저리게 속울음 울었으리. 공명. 

 

그러니 어쩌란 말인가. 이렇게 될 줄 몰랐다는 상황은 최소한 만들지 말아야 한다는 말인가. 물론 상황은 내가 만드는 것만은 아니다. 그러니 가상의 상황을 설정하고 대비해야 한다는 말인가. 그러나 작품은 계몽자도 오락의 대상도 감정이입의 대상도 아닌, 소통자일 뿐. 보기[觀]에서 맛보기[味]로 전화한 이 작품에서 덧없음을 본다. 무상(無常)을 본다. 그 허(虛)한 맛을 오래오래 음미(吟味)한다. 

 

 

홍성란 srorchid@daum.net
시인. 1989년 중앙시조백일장으로 등단. 시조집 《겨울 약속》 《바람 불어 그리운 날》 등이 있고, 시조선집 《명자꽃》 《백여덟 송이 애기메꽃》 시조감상에세이 《하늘의소리, 땅의소리―백팔번뇌》 등이 있다. 유심작품상, 중앙시조대상, 대한민국문화예술상 등 수상. 현재 성균관대 강사, 유심시조아카데미 원장.

 

 

ㅡ출처:『유심』(2013. 3)

출처 : 시하늘
글쓴이 : 보리향/이온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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