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 난 몸 안에서 월동하는 시린 말의 새순
『물금』 최서림 『세계사』
이경호(문학평론가)
언어에 대한 자의식과 초로(初老)의 생에 대한 회한이 도드라지고 때로는 겹쳐진다는 점이 최서림 시인이 펴낸 이번 시집의 가장 뚜렷한 특징일 것이다. 특히 두 가지가 겹쳐지는 지점에서 그의 시세계는 지난 번 시집 『구멍』이 그러했던 것처럼 하나의 주제를 자연스럽게 끌어안는 효과를 빚어내기도 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다음과 같은 시편에 반영되어 있다.
‘푹’이라는 말의 품은 웅숭깊고도 넓다 둥글어서 뭐든지 부딪히지 않고 놀기에 좋다 묵은지 냄새가 담을 넘어가는 이 말은 詩가 알을 슬기에 딱 좋다 뭐든지 푹 익은 것은 시가 되는 법, 항아리 속에서 멸치젓갈이 푹푹 삭고 있는 마을마다 시가 넘실대던 시절이 있었다 집집마다 다른 손맛으로 익어가고 있었다 속을 삭히고 말을 삭히는 솜씨 따라 하늘과 땅의 기운을 빌려 오는 솜씨 또한 달랐다 청도에 가면 파리 잡는 끈끈이가 바람에 흔들리는 추어탕집이 있다 성미 급한 시간조차 한 숨 푹 자고서 가는 반질반질 닳은 마루가 있는 집, 소금같이 짠 김치 한 종지에 손님이 파리 떼처럼 득시글거린다 울퉁불퉁한 세월 따라 곰삭은 인생, 할머니가 담그는 멸치젓갈의 비결은 그 집 며느리도 모른다 아직 푹 빠질 줄 몰라서이다
- 「푹」전체
<‘푹’이라는 말>에 대한 자의식이 무엇보다도 <웅숭깊고도 넓다 둥글>다는 속성에 주목하고 있는 점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그 속성은 형상적이면서 세월의 역할을 연상시킨다. <묵은지>와 <익은>, 그리고 <삭고 있는> 같은 낱말들이 뒤를 받쳐주고 있는 까닭도 그 때문이다. 그렇다면 세월이 마련해준 깊고 넓고 둥근 모양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마음의 모양일 것이다. 마음의 모양이 그렇게 마련되는 것을 최서림 시인은 <집>이라고 불러본다. 그렇게 마련되는 집은 <마음의 집>이기도 하고 <시의 집>이기도 하다. 이번 시집이 지어 보이는 집 한 채의 모양이 바로 그것이다.
세월이 마련해주는 <마음의 집>과 <시의 집>이 깊고 넓고 둥글다고 해도 그 모양이 현실태(現實態)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것은 이상태(理想態)로 보일 뿐이다. 이번 시집에서 흥미롭고 의미로운 부분은 집의 현실태를 그려보이는 흔적들이다. 그 흔적들은 집의 이상태와 길항하면서 <마음의 집>이나 <시의 집>을 구체적으로 쌓아가는 재목의 역할을 환기시켜준다. 세월에 부대끼면서 마음과 시를 구체적으로 쌓아가는 재목(材木), 이번 시집에서 정직하고 절실하게 노정되어 있는 재목의 정체는 바로 초로의 생을 구체적으로 겪어내는 몸이다.
이번 시집에서 특히 주목할 내용은 세월에 부대끼는 마음과 몸의 증상이 하나로 겹쳐질 듯하면서도 길항하는 속성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마음과 몸의 증상이 길항하는 까닭은 시와 삶에 대한 지향이 서로 갈등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우선 시집의 「자서」부터 살펴보도록 하자. <가시 같은 말//잠들지 못하는 말에 이끌려//여기까지 걸어왔다//내 안의 푸른 노새가 말의 이파리를 뜯어먹고 있다>에서 <내 안의 푸른 노새>는 초로에 이른 시인의 몸보다는 그것을 뛰어넘으려는 마음의 결기를 상징하고 있다. 이러한 마음의 결기가 생의 현실 그 자체보다는 시쓰기를 대상으로 삼고 있는 점이 주목할 만하지만 시쓰기와 연루된 언어 의식이 이러한 마음의 결기와 사뭇 다른 지향점을 드러낼 때가 있는 점도 주목을 요한다.
가랑비같이 천천히 적셔오는 말이다 비에 젖은 돌, 비에 젖은 물푸레나무같이 구멍 많은 말이다 부서지고 바스라진 生이 스며들어가서 한 천년 잠들고 싶은 말이다 마음 속에 숨어 날뛰는 식칼을 잠재우는 말이다...(후략)...
- 「촉촉한」부분
<마음 속에 숨어 날뛰는 식칼을 잠재우는 말>을 의식하는 마음은 <내 안의 푸른 노새>를 의식하는 마음의 결기와는 대조적인 속성을 암시하고 있다. <한 천년 잠들고 싶은 말>을 기리는 마음은 삶의 휴식과 안정을 지향하는 초로의 몸과 포개지고 있다. <집>을 대상으로 작성된 시편들도 대조적으로 나뉘기는 마찬가지다.
내 몸은 이미 녹슬고 덜커덕거리고 있어
흘려보내야 할 것들, 더 이상 붙잡지 말아야할 것들을
살비늘 속에 다 떨쳐버리고 싶어
...(중략)...
밥물 끓어 넘치듯 부글거리는 욕망들,
빈 도마를 정신없이 두들겨대는 내 안의 식칼소리들,
어느덧 앙금으로 가라앉아
남을 것만 남아있기를
- 「오래된 집」부분
주인 얼굴을 닮아 삭아버린 집이 있다
새마을 운동 때 슬레트와 벽돌로 후딱 쌓아올린
시멘트 독을 먹고 이끼가 검버섯처럼 자라는 집
왼팔처럼 반쯤 떨어져 나간 월남전 사진이 너덜거리고 있다
늙고 못생긴 조강지처모양 버리지도 떠나지도 못하는 집
깨어진 농약병이 여기저기 뒹굴고
퀴퀴한 냄새로 울타리 쳐져 있다
복숭아나무를 캐내고 직불금으로 연명하는
그 집 사람들 가슴의 길 잃은 불과
총알에 스친 듯한 혼이 파고들어간 집, 대대로
상처투성이 여린 생명들이 할딱할딱 숨을 고르고 있는 집
가족들의 검고 붉은 내력을
침묵으로 말하고 있다
...(중략)...
간간이 신음처럼 새어나오는 찢어지고 바스라지는 말들,
-「말하는 집」부분
두 편의 <집>에 관한 작품들은 우선 <집>이라는 대상에 대한 거리감부터가 다르다. 「오래된 집」은 처음부터 시인의 몸으로 육화되어 있다. <내 몸은 이미 녹슬고 덜커덕거리고 있어>로 시작되는 내용에는 구체적인 대상으로서의 <집>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반면에 「말하는 집」에는 구체적인 대상으로서의 <집>을 바라보는 면밀한 시선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화자의 <몸>과 <집> 사이에는 거리감이 존재하며 <집>은 화자로부터 <타자성>을 부여받고 있다. 나중에 다시 언급하겠지만 이렇게 부여되는 <타자성>의 존재의의는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우선 <집>의 세세면목을 부각시켜준다. 남루함과 상처의 흔적들이 선명한 세세면목은 화자의 몸과 마음이 쉽사리 삼투될 수 있는 여지를 허락하지 않는다. 그렇게 분리되어 있는 <타자성>을 화자는 <집>의 <침묵>이라 증언하는데 만족하고 있을 따름이다. <타자성>으로 존재하는 <가족들의 검고 붉은 내력>, 혹은 <침묵>에서 <간간이 신음처럼 새어나오는 찢어지고 바스라지는 말들>의 내력을 찾아나서는 이번 시집의 여정이 나로서는 소중해 보인다. 그것이 세월의 흐름에 쉽사리 동화되기 쉬운 시인의 몸과 마음을 일으켜 세워 가파르거나 울퉁불퉁한 삶의 <타자성>과 시쓰기의 <타자성>을 향해 나아가도록 재찍질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인은 그러한 역할을 지체 높은 상전의 장례식에서 길을 열어주며 울어주는 <곡비(哭婢)>의 행위에 비유하고 있다. 흥미로운 부분은 <나이보다 더 지친 내 살가죽을 만들기 위해/그동안 내 詩는, 너무 오래/내 안에 갇혀 살았다>(「곡비(哭婢)1」)는 자책을 토로하고 있는 내용이다. 초로의 몸에 너무 순응하려는 마음과 시쓰기를 경계하는 자책이 <이젠 남을 위해/울어줘도 되리라>는 각오를 이끌어낼 때, 그러한 각오의 구체적인 실천은 두 가지 방향으로 시의 여정을 펼쳐 보인다. 먼저 주목해야 할 방향은 <타자성>을 갖는 대상들의 구체적 실존이다. 시인은 그것을 소리와 언어를 토해내는 존재의 모습으로 그려내고 있다.
고비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에는
...(중략)...
홀쭉하니 여윈 사람들의 천 개의 소망
천 개의 모아진 손이
버들개지로 피어나고 있다
얼었다 녹았다를 되풀이하고 있는
재개발구역 시장통 사람들처럼
브라더 미싱으로도 봉할 수 없는
아프게 벌어진 천 개의 입을 가지고 있다
입을 가진 모든 것들은
꽃샘바람에 이리저리 부딪히는 버들개지처럼
잠들지 못하고
바람 속에다 울혈을 토해내고 있다
-「천 개의 입」부분
<천 개의 소망>이 <버들개지>와 <천 개의 입>으로 변주되는 시의 대상화는 섣불리 통합되거나 조화될 수 없는 존재의 개별성을 의식하고 교감하려는 의지의 산물이라는 점을 눈여겨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한 차별화의 교감 의지는 <천 개의 소망>을 <아프게 벌어진 천 개의 입>으로 전이시켜 놓은 표현에서도 입증이 된다. <소망>을 섣불리 받아들이지 않고 <울혈>의 자리로 옮겨놓으려는 시선은 삶의 역동적이거나 복합적인 갈래들을 면밀하게 챙기려는 노력의 발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시적 여정의 두 번째 방향인 <천 개의 소망>과 <울혈>을 토해내는 현실의 소리와 언어들은 어떻게 그의 시쓰기로 육화될 수 있을까? 초로의 생에 갇혀 있는 그의 몸처럼 아직은 <마대자루 같은 몸 안에 갇혀 쩔쩔매는 그의 말들>(「아카시아 숲」)은 어떻게 <천 개의 소망>과 <울혈>을 오고가는 시쓰기의 행로를 터놓을 수 있을까? 바로 같은 시편에서 우리는 초로의 <살점을 헤집고 다니는 사금파리 같은 말들/속으로 아작아작 씹고 또 씹어 먹>는 언어의 가열한 식욕이 그러한 행로를 개척해나가는 진풍경을 목도하게 된다. 초로의 몸에 상채기를 만드는 <사금파리> 언어를 끔찍하게도 씹어대는 풍경이라니!(나는 오래 전에 어느 술자리에서 술잔의 유리를 씹으면서 피투성이 입술로 분노를 표출하는 시인을 보고 소스라친 경험이 있다.) 자해로 초로의 생을 극복하는 언어 행위, 그것이 시인의 전략이라면 다음 시편이야말로 그런 전략의 절정을 구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더 이상, 이름이 이름이 아닐 때
찢어진 말과 말 사이, 눈발 몰아친다
어긋난 늑골 속 허허벌판을 빙빙 돌며
가시 걸린 목소리로 울고 있는 저 검은 새,
발을 붙이지 못하고 바람 속을 떠도는
가슴 속 다 토해내지 못해, 새까맣게 타버린 저 떠돌이 새,
모든 색깔을 삼켜버린 빛깔로 캄캄하게 울고 있다
더 이상, 말이 말이 아닐 때
- 「대한(大寒)」전체
가장 가혹한 생의 처지를 절기(節氣)의 명칭에 부여하고 있는 이 작품에서도 가혹함의 내용은 언어의 존재 조건으로 표현되어 있다. <찢어진 말과 말>이 <눈발>, <어긋난 늑골>, <허허벌판>, <가시 걸린 목소리>로 변주되다가 마침내 <새까맣게 타버린>과 <모든 색깔을 삼켜버린>으로 절망과 부정의 클라이맥스에 도달하는 순간 초로의 몸은 얼어붙고 언어를 비롯한 모든 삶의 소통관계는 단절되어 버린다. 하지만 스스로의 몸을 상처내고 얼어붙게 만드는 언어에 대한 절망과 부정은 <끝없이 미끄러져 어긋나버리는 말들./얼어버린다 쓰레기로 쌓인다 밟혀서 짓뭉개>(「붉은 날들」)지는 풍경을 목도하는데 안주할 수 없다. 같은 시편에서 언어에 대한 가열한 자해의 욕망이 <몸 안에서 월동하는 시린 말의 새순>을 마련해놓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예비전략은 <새 술을 새 부대에 담기 위한> 언어의 전략인 셈이다. 초로의 몸이 감당해야 하는 새로운 언어 전략을 <몸 안에서 월동하는 시린 말의 새 순>이라고 규정할 때 가파른 몸의 현실에 대처하는(<몸 안에서 월동하는>) 언어의 속성으로 <시린>이라는 표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같은 시편의 마지막 행에서 <생채기보다 더 아리다>고 규정한 표현도 흡사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렇다면 언어의 <새 순>이 시리고 <생채기보다 더 아>린 속성으로 빚어낼 수 있는 시쓰기의 모양은 어떠한 것일까? 아마도 그 모양은 다음의 시편에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바닷물이 숭어 떼처럼 파닥파닥 밀려올라오다 허리쯤에서 기진해 멈춘다 날숨과 들숨으로 강물과 혼몽히 몸을 섞는다 썰물을 내려 보내는 갯벌이 그리움으로 구멍이 숭숭 뚫려있는 곳, 그녀와 나 사이 매일 보이지 않는 선이 그어진다 내 그리움도 그곳까지, 그 선까지만 밀물져 가다가 해매다 돌아오고 만다 그녀가 사는 곳이 곧 물금이다 대추나무 잎에 반짝이는 햇살처럼 영혼에 일렁이는 물결무늬처럼 떠있는, 어느새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버리는 물금, 물금 한복판에서 찾아 헤매이게 되는 물금, 농익은 감이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해 철퍼덕 맨땅에 떨어져 산산이 흩어지는 곳, 초로의 적막이 물푸레나무 회초리로 자신의 종아리를 후려치는 그곳이 물금이다
- 「물금」전체
이 작품에서 사물들은 쉽사리 시의 화자에게 유인되지 않는다. 자연을 대하는 초로의 생이 제일 먼저 경계해야 할 마음가짐이다. 자연을 시인 자신의 마음으로 끌어들여 위안을 얻으려는 태도는 자연을 죽이고 시인을 죽이며 둘 사이를 잇는 언어도 죽이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그런 마음을 내치고 <매일 보이지 않는 선이 그어진다 내 그리움도 그곳까지, 그 선까지만 밀물져 가다가 헤메다 돌아오고 만다>는 고백처럼 자연과 시인이 이루는 관계의 예민한 경계를 의식하고 자연의 <타자성>을 인정하는 태도, <어느새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버리는> 자연의 존재성을 주목하는 태도, 그리고 시인의 마음속에서가 아니라 자연의 <한복판에서 찾아 헤메이게 되는> 자연의 존재성을 귀하게 여기는 태도, 이 모든 것이 시 속의 사물들로 하여금 스스로를 절실하게 드러내고 자유롭게 어울리는 관계를 이룩하는데 이바지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농익은 감이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해 철퍼덕 맨땅에 떨어져 산산이 흩어지는> 풍경과 <초로의 적막이 물푸레나무 회초리로 자신의 종아리를 후려치는> 풍경이야말로 <시린 말의 새순>이 적실하게 빚어낸 사례에 해당할 것이다. <농익은>과 <철퍼덕>의 대극이 절실하게 어울리는 장면, 그리고 <초로의 적막>과 <종아리를 후려치는> 기발한 어울림의 장면도 언어를 <생채기보다 더 아리>게 벼려내는 솜씨로만 그려낼 수 있기 때문이다. 초로의 생에 안주하지 않으려는 몸이 구가할 수 있는 자연의 서정과 언어의 탐구는 이러한 결실을 얻었다. 초로(初老)의 생이 초로(初露)의 언어를 구가한 셈이다.
이경호(문학평론가)
1955년 서울 출생. 고려대 영문과 및 同 대학원 비교문학 전공. 현재《작가세계》 편집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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