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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불가능한 것들과 마주하기 / 김태선

문근영 2013. 10. 31. 17:45

불가능한 것들과 마주하기

김태선

-하재연, ?회전문?(?현대문학? 2012년 12월호)

-유계영, ?생각의자?(?창작과비평? 2012 겨울호)

-이근화, ?산유화?(?문예중앙? 2012 겨울호)

-심보선, ?독서의 시간?(?문학과사회? 2012 겨울호)

-황혜경, ?느낌 氏 차례?(?애지? 2012 겨울호)

 

 

문학은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거나 사회의 변혁을 꿈꿀 수도 있지만, 그 이전에 작가가 세계에서 벌어지는 알 수 없는 것들, 이해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물음을 던지는 한 가지 방식이다. 문제는 이 물음에 대한 답이 구해질 수 없다는 데에 있다. 본질적으로 인간은 언어로 사유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헤겔과 코제브의 영향을 받은 바타유는 인간의 존재 조건을 “언어로 인해 존재의 연속성이 깨졌다는 사실”(박준상, ?에로스의 말?, ?문학과사회? 2011 겨울호, p.206)로 이해한 바 있다. 즉 인간은 언어로 인해 사물과 단절되고 ‘찢긴 존재’가 되었다.

언어는 세계의 모든 사물들과 관념들을 추상화시킴으로써 단순하고 명료하게 사유-소통할 수 있게 한다. 그러나 이로 인해 그것들이 갖는 단독성들은 사라지고, 빈 껍데기만 남는다. 우리가 대화할 때에도 상대의 말을 맥락에 의지해서 그 의미를 파악할 수 있을 뿐, 개별적으로 떨어져 나온 말만으로는 온전히 그 의미를 파악하기 힘들다. 뿐만 아니라 맥락을 어느 정도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각자가 하는 말을 서로 다르게 이해하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난다.

니클라스 루만 식의 이야기로 하자면, 소통이란 두 개의 블랙박스가 각자의 기록을 쏟아내는 가운데 우연히 말이 일치하는 것이다. 어쩌면 인간은 본질적으로 소통 불가능한 상황에 놓여 있는 게 아닐까. 더 나아가 인간은 타자는 물론 자기 자신마저 잘 이해하지 못하는 숙명을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인간은 이러한 상태를 그대로 두고는 살아갈 수 있는 존재가 되지 못한다. 끊임없이 자신과 세계에 질문을 던지며, 또한 타인과 소통을 하고자 하는 존재이다. 이번 계절에 고른 시들은 이렇게 이해할 수 없는 것들에 다가가는 방식들이 담겨 있는 작품들이다. 더러는 자신에 관해 묻는 것이기도 하고, 더러는 당신에 관해 묻는 것이기도 하다.

당신은 당신의 밖으로 긴 장갑을

던져주기 바랍니다 간직했거나

감추어졌다 펼쳐지는 지문을 우리는 주울 뿐입니다

 

당신이 발을 딛은 바닥은

내 머리 위의 심연

 

가까워지는 당신의 손을 절대

만질 수 없는 투명한 거리가 있습니다

 

하얀 새의 윤곽을 만드는 검은 새들을

알아보지 못하고 우리가 지나치듯이

-하재연, ?회전문?(?현대문학? 2012년 12월호) 중에서

 

회전문은 열려 있지만 동시에 닫혀 있기도 한 기이한 공간이다. ?회전문?의 1연에 나온 “그들이 되기 전에는 결코/ 알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라는 말은, ‘그들이 된다면 알 수 있는 게 있다’라는 말로 바꿀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이라 명명된 타자가 되는 일은 사실 불가능하다. 우리는 회전문 안에 갇힌 존재들이다. 타자는 투명한 유리막 너머에 있다. 회전문의 움직임에 따라 ‘나’는 타인이 있는 그곳으로 옮겨 갈 수 있지만, 그 타인이 되는 일 자체는 불가능하다. ‘나’가 타인이 되는 순간, 그 이는 타인일 뿐 ‘나’는 아니다. 만일 그런 일이 가능하다 하더라도 “알 수 없는 일”은 도대체 알 수 없을 것이다. 다만 그 알 수 없는 일에 가 닿으려는 노력을 하는 일과 그렇지 않으려는 일은 분명히 다르다. 하재연의 시 ?회전문?은 ‘그들’ 혹은 ‘당신’이라 명명된 타자에게 가 닿으려는 불가능한 일을 시도를 하고자 하는 인물이 목소리를 내고 있다. 알 수 없는 것은 도대체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 알 수 없음이 왜 그럴 수밖에 없는지를 알고자 하는 일은 중요하다.

어째서 불가능한 시도일까. 당신과 내가 같은 장소에 있더라도, 이는 “당신이 발을 딛은 바닥은/ 내 머리 위의 심연”이라는 구절처럼 깊은 틈이 둘 사이에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인간을 바타유의 표현처럼 ‘불연속적인 존재’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존재의 불연속성이라는 조건으로 인해 인간은 고독할 수밖에 없지만, 바로 그 고독함 때문에 연속에 이르고자 하는 의지가 추동된다. 시인에게 ‘당신’에게 가 닿으려는 노력은 “당신은 당신 밖으로 긴 장갑을/ 던져주기 바랍니다 간직했거나/ 감추어졌다 펼쳐지는 지문을 우리는 주울 뿐입니다”와 같은 형태로 이루어진다. ?회전문?에서 이 부분은 굉장히 흥미로운 구성으로 이루어져있다. 시행 엇붙임 기법으로 인해 ‘나’와 당신’이 떨어져 있지만 동시에 붙어 있기도 한 형식으로 나타나나는데, 이러한 구도가 마치 회전문 안의 다른 칸에 있는 사람들을 떠올리게 한다.

시인은 물론 ‘당신’과 하나가 되는 만남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안다. “가까워지는 당신의 손을 절대/ 만질 수 없는 투명한 거리”가 두 사람 사이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왜 이렇게 타자와 만나려는 의지가 중요한가. 시의 마지막 연 “하얀 새의 윤곽을 만드는 검은 새들을/ 알아보지 못하고 우리가 지나치듯이”가 그 이유를 증언한다. ‘나’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타인이 있어야 한다. 동일자의 형국에서는 어느 것도 자신의 단독성을 지켜낼 수 없다. 타인의 존재 없이는 나의 존재가 확증되지 않는다. 존재의 본질은 동일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차이에 있다. 그러나 그 차이가 가능하려면 나와는 다른 존재가 필요하다. 그러나 차이 나는 것들은 도처에 있기 때문에 “알아보지 못하고 우리가 지나치듯이” 쉽게 잊곤 한다.

 

나무의 상반신은 구름이 되고 없다

 

어떤 나무의 꽃말은 까다로움이다

 

사람들은 하루를 스물네 마디로 잘라둔 뒤부터

공평하게 우울을 나눠가졌다

나는 나도 아닌데

왜 너를 나라고 생각했을까

 

의자를 열고 들어가 앉자

늙은 여자가 날 떠났다

나는 더 오래 늙기 위한 새 의자를 고른다

나에 대한 가장 아름다운 정의를 내리려고

-유계영, ?생각의자?(?창작과비평? 2012 겨울호) 중에서

 

?생각의자?에서 ‘너’는 단 두 번만 등장한다. 그것도 화자의 진술인 “너를 나라고 생각한 기간이 있었다”와 “왜 너를 나라고 생각했을까”라는 말에서만 등장한다. ‘때’가 아닌, “기간”이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시의 화자는 상당한 기간 동안 ‘너’를 ‘나’로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너’는 누구일까. 세 번째 연에 자신의 몸으로 화자의 시선이 이동하는데, 이로 인해 ‘너’는 ‘내 몸’을 지칭하는 말이라는 점을 유추할 수 있다. 이 순간 화자의 몸은 타자화된다. 불가해한 것으로 변해버리는 것이다.

물론 애초에 몸은 자신의 것이기는 하지만 그에 대해 온전히 안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몸이 자신의 것이기에 알고 있다는 믿음을 갖고 살아간다. 따라서 수수께끼 같은 첫 연의 “불가능해요 그건 안 돼요/ 간밤에 얼굴이 더 심심해졌어요”에서 “불가능해요”라는 말이 겨냥하는 것은 ‘너’, 즉 몸이며, 이 몸과 ‘나’를 동일시하는 것이 이제는 불가능하다는 점을 일컫는다. “간밤에 얼굴이 더 심심해졌어요”라는 말은, 몸과 ‘나’를 동일시하는 시선이 불가해한 몸을 이해 가능한 것으로 바꾸기 위해, 몸이 가진 단독성들을 제거하고 추상화시키기 때문에 일어난 일임을 가리킨다. 이제 시인은 이런 간편한 방식으로 자신의 몸을 사유하는 일을 계속할 수 없다. 더 흥미롭게 바라볼 수 있는 다른 길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몸이 타자화되는 순간부터, 몸은 경이로운 것으로 변한다. “간밤에 얼굴이 더 심심해졌어요”라는 사태는 이제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몸은 도무지 아름다운 구석이라곤 없는데/ 나는 내 몸을 생각할 때마다 아름다움에 놀랐다”라는 말처럼, 이 말은 모순된 것처럼 보이지만, 타자화된 몸은 내가 알고 있는 것들에서 벗어나 그 자체의, 이전에는 미쳐 볼 수 없었던 단독성들을 내보인다. 내 지식의 포획망에서 벗어난 스스로의 생명을 갖는 것처럼.

그리고 이 몸은 곧바로 의자로 연결된다. “나는 고작 허리부터 발끝까지의 나무를 생각할 수 있다/ 냉동육처럼 활발한 비밀을 간직한 나무의 하반신을 생각할 수 있다”에서 “나무의 하반신”은 의자를 가리킨다. 비밀을 간직하고 있지만, 그것 자체로도 불가해한 것이지만, 형상이 있으므로 생각하는 것 자체는 불가능하지 않다. 그러나 “나무의 상반신은 구름이 되고 없다”처럼 의자 위의 빈 곳은 그 생각할 수 있음의 형상이 없는 곳, 따라서 도저히 사유할 수 없는 지점이다. 그런데 그 빈 곳이야 말로 나무의 하반신을 생각할 수 있게 해주는 근거가 된다.

“어떤 나무의 꽃말은 까다로움이다” 까다로움이라는 꽃말을 가진 나무는 매자나무이다. 쌍떡잎과의 이 식물은 매우 아름다운 꽃을 피어낸다. 그러나 그 나무의 사실 자체보다, 우리는 그 꽃말을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나무를 생각하는 것, 의자를 생각하는 것, 나무의 상반신?빈 곳을 생각하는 일은 까다롭다. ‘나’를 ‘나’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러기에 ‘나’는 너무나도 까다로운 주체이다. 그러나 인간의 이성은 세상의 모든 것을 명료하게 밝히고자 끊임없이 분절하고 움직임을 정지시킨다. 분절할 수 없이 움직이는 시간마저도 “하루를 스물네 마디로 잘라둔” 것처럼. 그리고 이러한 분절로 그 대상을 동일자에 귀속시킨다.

그러나 사실 세계를 이렇게 명료하게 사유하려는 일은 많은 것들을 놓치게 만든다. 시인은 이러한 방식의 사유에 의문을 던진다. “나는 나도 아닌데/ 왜 너를 나라고 생각했을까” 타자는 애초에 동일자에 온전히 포획될 수 없는 존재다. 포획하려하는 순간 단독성은 상실되고 빈 껍데기만 남을 뿐이다. 이러한 사유는 낡은 것, 곧 “늙은 여자”다. “늙은 여자가 날 떠났다”라는 말처럼, 시인에게 이제 이러한 사유 방식은 남지 않을 것이다. 새로운 사유를 위하여, 그리고 새로운 시를 위하여. 몸에 대한 가장 아름다운 정의를 내릴 수 있는 방법은 이제 대상을 동일자의 논리에 귀속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려는 노력을 하는 것이다.

내 마음속에 꽃이 피었네

불가능한 꽃

불가해한 꽃

 

저만치 버려진 팬티는 내 것이 아니다

나를 모른다

그런데 내게 주어진 단 하나의 꽃잎은

누구에게 던질까

누가 될 거니

오늘 나의 산책과 명상에는 무늬가 없다

내일 우리의 논쟁과 수다는

테이블 위의 접시를 몇 번이나 갈아치울지

주인을 잃은 이름들이 하나둘씩 떠오르는데

비가 와도 젖지 않는

더 이상 떨어질 곳이 없는

꽃잎의 어지럽고 어려운 방향을 따라가본다

-이근화, ?산유화?(?문예중앙? 2012 겨울호) 중에서

 

 

?산유화?는 시인이 아파트 단지를 산책하다 발견한 “버려진 분홍 땡땡이 팬티”에 대한 생각에서 시작한다. 팬티는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으며, 그 사물이 갖는 사회적 맥락으로 인해 쉽게 손대기 곤란한 물건이기도 하다. 시인이 바라보고 있는 장소에 그 팬티가 놓이게 된 나름의 사정이 있긴 할 것이다. 그러나 그 사정은 쉽게 알아차리기도, 밝힐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시인은 그 팬티를 “꽃인 듯 한참을 바라”보지만, 그 사물에는 “젊음도 늙음도”, “향기도 주인도” 없다. 팬티의 전후 사정을 전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찌된 일인지 시인은 팬티를 꽃처럼 보고 있다. 꽃은 그것이 그곳에 있는 전후 사정을 알지 못하더라도 향기를 맡을 수 있고, 그것에 내재한 시간도 읽어낼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이가 주인이기도 하다. 아마도 시인이 버려진 팬티를 꽃처럼 바라보는 이유는, 그 안에 숨겨진 이야기를 읽어내기 위해서가 아닐까. 그러나 그 이야기는 도대체 읽어낼 수 없는 것이어서, 시인은 우선 버려짐 그 자체에 먼저 주목한다. 이 단계를 거쳐야만 그 안에 숨겨진 시간을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

시인은 버려진 것들을 생각한다. 가령 “아이들이 불다 버린 본드를 보면/ 마음이 공연히 깡통처럼 뒹굴고/ 검은 비닐봉지를 밟은 듯 발이 꺼진다”에서처럼 버려진 것들은 애초에 그 쓰임과 상관없이, 오히려 상관관계를 잃어버린 채 더 이상 쓸모없어진, 세상에서 가장 무의미한 것이 된다. 이런 흐름이 시인으로 하여금 삶의 허망함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버려졌을지도 모를 자신의 시간을 돌이켜보게 한다. 어쩌면 산책하고 있는 이 시간도 저 팬티처럼 버려지는 시간이 아닐까. 삶이 낭비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나의 존재도 이렇게 버려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죽음이 끝까지 눈물을 모르겠지”라는 생각처럼. 그런데 버려진 팬티는 그것으로 쓸모를 다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러한 생각의 연쇄 가운데 숨겨져 있던 어떤 힘을 드러낸다. 시인의 “마음속에 꽃”을 피워내는 것이다.

“불가능한 꽃/ 불가해한 꽃”처럼 그 팬티는 이제 자신의 존재 가능성을 박탈당한 것이기도 하지만, 그리고 그 정체를 더 이상 이해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하지만, 밝힐 수 없는 존재 가능성과 이해 가능성으로 인해 사물 그 자체인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간 것이기도 하다. 사물 그 자체는 상징계의 수준에서는 온전히 포획되지 않는 잉여를 갖는다. 잉여라고 표현했지만 이는 우리의 인식 수준에서는 포획할 수 없는 초과를 의미한다. 사물을 이해 가능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는 그러한 초과들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는 존재의 불가능성으로 귀착되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쓰임을 알 수 없는 것은 버려지는 것이라는 생각에 이를 수 있다. 이때 삶이 불가해한 것이라면 버려지는 것이라고 이야기해야 할까. 그러나 이해할 수 없는 것, 알 수 없는 것이라고 해서 쉽게 버림을 용납한다면, 우리의 삶에서는 아무 것도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알지 못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마주해야 할 것이다.

꽃이 피어남과 동시에 시인은 팬티로부터 거리를 둔다. “저만치 버려진 팬티는 내 것이 아니다/ 나를 모른다” 그러나 그 팬티는 시인의 마음에 꽃을 피웠다. 그 꽃을 내버려둔다면, 팬티와 마찬가지로 버려질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그 꽃을 “누구에게 던질까/ 누가 될 거니”라고 묻는다. 의미 없음에서 의미를 만들기. 불가능한 시도, 불가해한 시도처럼 보이지만, 이러한 노력을 통해 의미가 없는 것들은 나름의 의미를 획득하고, 버려짐이라는 필연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무의미한 것에 의미를 찾으려는 노력은 결국 ‘누구’를 찾는 일이 될 것이고, 타자를 만나고자 하는 의지로 나아갈 것이다.

 

책을 읽을 시간이야

너는 말했다, 그리고 입을 다물었다

네가 조용히 책을 읽는 동안

 

나는 생각한다

이상해, 정말 이상해

나는 이혼했는데 결혼한 기억이 없어

이혼보다 결혼이 훨씬 더 좋았을 텐데

 

그 책에는 이별 이야기가 있을까

어쩌면 네가 지금 막 귀퉁이를 접고 있는 페이지에

 

나는 생각한다

온갖 종류의 이별에 대해

모든 이별은 결국 같은 종류의 죽음이라는 사실에 대해

-심보선, ?독서의 시간?(?문학과사회? 2012 겨울호) 중에서

 

심보선의 시에서 ‘너’는 책을 읽고 있다. 시의 화자는 독서중인 ‘너’를 읽으려 한다. 이때 ‘너’는 일종의 책이 된다. 독서는 단순히 활자를 눈으로 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와 텍스트가 서로 소통을 하는 행위이다. 텍스트에 쓰인 활자를 독자는 나름의 방식으로 이해하고 질문을 던지며, 지면에서 그 답을 찾고자 한다. 그런데 화자의 독서에서는 그런 행위가 일어나지 않는다. ‘너’는 책을 읽는 것 외에는 나에게 어떠한 정보도 제공하지 않는다. 심지어 ‘너’가 읽는 책이 무엇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소통 불가능한 독서행위인 것이다. 그런데 이런 일이 가능한가. 물론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불가능성이 화자로 하여금 더욱 그런 독서에 매달리게 한다. 여기서 욕망은 결핍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물음에서 비롯한다. 이 말을 수정해야할지도 모르겠다. 물음 역시 지식의 결핍에서 비롯한다. 그러나 이는 채워질 수 없다. 때문에 독서의 시간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소통이 불가능한 것일까. 헤겔과 코제브의 “언어는 살해한다”라는 명제를 이어받은 바타유의 ‘찢긴 존재’와 같은 심층적인 차원도 있겠지만, 시에 나타난 상황은 이보다는 더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바로 ‘이혼’이라는 사건이 여기에 개입한다. 그런데 화자는 자신의 이혼을 떠올리면서 이상하다고 이야기한다. “나는 이혼 했는데 결혼한 기억이 없어”라는 이상한 이야기. 표면상 나타나는 이별 이전에 ‘나’와 ‘너’는 분명 결혼을 했었을 것이다. 결혼한 기억이 없다는 것은, 그 사실을 지워버리는 행위가 아니라, 그 이전에 둘의 만남이라는 사건이 애초에 불가능했다는 것을 증언하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만남이 없었다면 어떻게 이별이 가능했을까. 혹시 만남보다 이별이 먼저 일어나는 고유한 사건이 아닐까.

?독서의 시간?은 무엇보다도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 이야기의 변주곡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에우리디케가 저승으로 갔을 때 최초의 이별이 일어난다. 오르페우스는 산 자는 죽은 자의 세계에 갈 수 없다는 법을 위반하고, 저승에 가서 에우리디케를 다시 이승으로 데려오려 한다. 그러나 이 때 오르페우스는 또 한 번 법을 위반한다. 뒤를 돌아보면 안 된다는 하데스의 법. 그러나 오르페우스는 자신이 다시 데리고 오는 이가 에우리디케가 맞는지 확인하고 싶어 하는 욕망에 굴복하고, 에우리디케를 이승으로 데리고 오는 일에 실패한다. 이로 인해 오르페우스는 영원히 에우리디케를 잊지 못하고, 그에 대한 노래를 하는 일을 멈출 수 없는 존재가 된다.

기묘하게도 심보선의 모든 연애 시는 이별과 만남의 불가능성이라는 상황에서 이루어진다. 그리고 독특한 점은 이런 불가능성의 상황에서 만남에 이르는 노정이 드러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이러한 만남은 현실의 차원에서는 불가능한 것이다. 그 만남은 오직 바깥에서만 이루어진다. 문학이라는 바깥의 공간. 시인은 “천성 바깥에서 너와 함께 일생을 헤맬 것이다”라고 이야기한다. 이 지점에서 ‘너’는 이혼한 배우자라는 ‘어떤 이’의 개별 주체에서 ‘작품’이라는 보편 주체로 모습이 바뀐다.

 

흔들어도 흔들리지 않을거야,는 또 흔들면 흔들려 줄게,로

안락의 기원과는 다른 뜻으로 양쪽 다 느끼고 마음을 적는다

부음의 간격은 기쁨의 간격보다 좁아지지만

눈물의 한계를 시험하듯이 무엇에 의지해야만 할 때에도

다치지 않으려고 밖에 나가지 않을 때에도

특히 조심해야 할 취약한 상태로 감정을 끌어안고

무릎을 구부려 나를 껴안고

그래도 나는 어서 나 다음에 낙엽이 지길 기다리지

느끼고 눈이 내리면 더 좋고

그때 느낀 네가 내민 사과를 깨물었더라면 더 파란만장이었을까

더 느꼈을테니 다양한 이야기를 할 수 있었을까

나는 거쳐 간 과거가 되어주기로 하고 지나간다

그리고 나 다음에 느낌 氏 차례

-황혜경, ?느낌 氏 차례?(?애지? 2012 겨울호) 중에서

 

황혜경의 시는 느낌이라는 현상에 특별한 관심을 보인다. 느낌을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느낌은 주체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외부의 감각자극을 수용한 데에 따른 반응의 양상이다. 여기서 외부라고 할 때 이는 신체의 바깥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와는 다른 모든 것들을 포괄한다. 심지어 홀로 있을 때조차 우리는 호르몬 작용에 의해 여러 감정을 느끼곤 한다. 그런데 이러한 느낌이란 것은 상당히 주관적인 작용이어서, ‘기쁨’이라 할지라도 매번 느끼는 그 감정을 같은 것이라 이야기할 수 없다. 일반화하기 힘든 것이므로, 느낌은 매우 모호하고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성질을 띤다. 가령 고독하다고 느끼는 나를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고독은 사람을 만나지 않을 때에만 벌어지는 형상일까. 그렇다면 우리는 대부분 홀로 시간을 보내므로, 오히려 고독이 평상적인 느낌의 상태가 아닐까. 고독하다고 느끼지 않는 일이 오히려 특별한 상황이지 않을까.

?느낌 氏 차례?는 크게 두 덩어리로 구성되어 있다. 달팽이 이야기로 시작하는 1연과 느낌에 관해 많은 이야기를 쏟아내는 2연. 1연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아픔을 눈치 채주는 친구가 있다면 자신을 활짝 열겠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런 이야기는 다소 환상적이다. 이런 상황은 쉽지 않다. 때문에 2연의 이야기들이 필요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아픔은 눈으로, 이성의 논리로 포착하기 힘들다. 불가해한 것이기에. 이런 불가해한 것은 오직 느낌으로만 전해져 온다. 언어 이전의 언어. 그러나 불가해한 만큼 모호한 것이어서 이를 알아차리기도 어렵다. 그러나 그 느낌의 정체를 알 수 있을 때까지 해야 할 일은 오직 느끼는 것이다. “나도 모르니까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많으니까” 때문에 시인은 느낌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파악하려는 노력보다는, 우선은 잘 느끼고자 한다.

인간의 기준에서 달팽이는 한낱 미물이어서 투명한 피를 흘려도, 달팽이가 아픈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피를 흘린 이상, 그것이 통각을 느끼는지의 여부와는 관계없이, 아픈 것은 아픈 것이다. 시인은 “아플 때 눈치채주는 친구를 만나면/ 눈으로 목소리로 쓰다듬어주지”라고 이야기한다. 문제는 그 아픔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 아는 일이 아니라, 그 아픔을 느끼는 일이다. 분류하고 정리하는 이성의 논리에 따른 것이 아닌, 느끼고 반응하는 감각의 논리가 중요하다. 아마도 만남은 이런 식으로 가능할 것이다. 타인과의 만남은 우선 이성적인 논리, 즉 필요에 의한 것이기보다는 느낌에 의한 감성의 논리에 따른다.

느낌은 외부의 감각 자극에 의한 것이기는 하지만, 전적으로 주관적인 작용이어서 “전염병에 걸린 아이가 몰래 놀이터에 나와 노는 것”과 같다. 주관적인 작용인만큼, 객관화하기 힘든 것인 만큼 그 느낌의 정체가 무엇인지 쉽게 알기 힘들다. 우리의 이성은 느낌에 대해 전적으로 무능력하다. 따라서 시인은 그 불가해한 느낌을 이해하고자 한다. 느낌에 대한 사태들을 장황한 언어로 나열하는 일은 그 느낌의 메커니즘에 접근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다. 그러나 이렇게 서술되는 느낌의 양태들에 시인은 확정된 답을 내놓기보다는 망설이는 듯한 태도를 취한다. 이는 느낌을 알려는 일에 실패했기 때문일까. 다가갈 수 없는, 망설임의 이러한 움직임이, 그러나 그 불가해함을 가장 잘 포획해내고 다가가는 방식이다. 우리는 이성에 따른 논리 정연한 언어로 그 불가해한 것에 다가갈 수 없다. 명백한 것은 항상 불명료한 것들을 사상시킨 후에나 획득할 수 있는 것이다.

 

附記

이와 같이 살펴본 시들은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마주한 이들이 그것들을 어떻게 맞이하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지만, 그러한 것들에 어떤 확정된 답을 내놓지는 않는다. 때문에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은 여전히 이해 불가능한 것으로 남는다. 때문에 아무리 쉽게 쓰인 시라 할지라도 여전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들이 남는다. 그러나 시의 언어는 알 수 없는 것에 대해, 알 수 있는 방식으로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해하기 힘든 것들을 우리는 나름의 방식으로 재단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대상을 명백하게 만드는 일은 그것이 갖고 있는 고유한 단독성을 놓치고 마는 편법일 뿐이다. 우리가 그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많이 돌아가더라도, 때로는 그 주변에서 맴돌 뿐이더라도, 그것이 갖고 있는 그 자체의 모습을 잘 지켜보려는 노력이 우선이어야 할 것이다. 물론 그것은 아무 소리도 내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침묵마저도 귀 기울여 들어야 한다.

 

김태선 (roquen@korea.ac.kr)

2011 세계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부문 당선

고려대학교 일반대학원 문예창작학과 박사과정 재학중

 

 

출처 : 삼각산의 바람과 노래
글쓴이 : 흐르는 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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