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일표의 좋은 시 읽기(136) 검은 상징의 비의
검은 꽃
유병록
죽은 자의 폐에서 발견되는 다량의 흙은
산 채로 매장된 흔적
산 자의 기억과 죽은 자의 꿈이 뒤섞이는 자정의 세계에서
눈 감으면
검은 공기의 구덩이에 파묻히는 느낌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검은 공기가
목구멍을 가로막으며 걸어 들어오고
벗어나려 애쓸 때마다
숨통을 잠식하며 밀려드는
검은 모래는
쌓이고 쌓여 비탈을 만드는 습성을 가지고 있다
점점 폐활량이 줄고
기침의 순간을 지나 침묵에 다다를 때
검은 공기의 구덩이는 내가 팠다는 생각
빛이 찾아오고
소란이 나를 일으켜 구덩이 밖으로 꺼낸다면
누가 내 가슴을 열어
검은 비탈을 발견한다면
자, 받아라
검은 꽃 한 송이
# 유병록 시인은 시의 급소를 아는 시인이다. 급소를 찾지 못하고 이리저리 헤매다가 슬그머니 꼬리를 내리고 돌아서는 시들이 많은데 그의 시는 탄탄한 내공의 저력을 가지고 있다. 유병록은 호흡의 장단과 완급을 조율할 줄 알고 치고 빠지는 기교가 능란하며 술이부작(述而不作)의 진경을 아는 시인이다. 물론 좋은 시에 대한 기준은 상대적이고 시대나 향수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그러므로 과도한 상찬이나 이것은 시도 아니라는 식의 단순하고 경직된 비평의 잣대는 위험한 흉기가 되는 것이다.
실험과 전위가 없는 시단은 예외나 별종을 인정하지 않는, 꼰대들의 정치판처럼 위험하다. 고루한 시문법만을 하나의 전범으로 삼는다면 시의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다양한 시의 세계를 유연하게 수용하지 못하고 별종이라는 이유로, 또는 불편한 시문법을 구사한다는 이유로 낯선 유형의 시를 배제하고 단순 논리로 재단한다면 새롭게 돋아나는 시의 싹을 밑동부터 베어버리는 일이다. 단지 특정한 개인의 입맛에 맞지 않는다고 시 아닌 시로 규정한다면 그것은 횡포이며 문학적 독재이다. 왜냐하면 갓 태동을 시작한 그들은 현재진행형이지 완료형이 아니기 때문이다.
「검은 꽃」의 분위기는 암울하고 절망적이다. “검은 공기의 구덩이”에 “산 채로 매장된” 화자의 모습은 현실의 폭압적 질서와 부조리한 삶의 질곡에서 아무런 희망도 갖지 못하고 좌절과 실의로 죽음을 맞이하는 자의 모습이다. 그러나 이 시는 극한의 상황을 초래한 원인이 ‘나’에게 있음을 밝히면서 칼끝을 바깥 대신 안을 향해 겨눈다. 이 시가 여타의 시와 구별되는 지점이다.
또한 화자는 상황을 외면하거나 회피하지 않는다. 고통의 다리를 건넌 척 어설프게 낙관적 전망을 제시하는 거짓 포즈도 없다. 다만 견디고 감내하면서 묵묵히 죽음의 검은 시간을 온몸으로 통과한다. 설사 그 행위가 죽음의 상황으로 끝난다 할지라도 누군가는 “검은 비탈”을 발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화자는 마지막 순간까지 “빛”에 대한 지향의 의지를 꺾지 않는다. 그리고 최후의 순간 화자는 “검은 꽃 한 송이”를 내미는 것이다. 산 채로 매장된 자가 극도의 절망 속에서 버둥거리면서 피워낸 가장 찬란한 꽃 한 송이를 독자는 받아들게 된다. 그 꽃은 지상의 화려한 꽃이 아니다. 절망의 검은 피를 먹고 자란 희망이며 통증의 자리에서 타오르는 눈부신 불꽃이다. 「검은 꽃」을 받아든 영혼들이 쉽게 잠을 이루지 못하는 봄밤이 한정 없이 길어지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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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일표 편집위원
(1992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전문지 『시로 여는 세상』 주간)
ㅡ 출처:문화저널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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