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시

[스크랩] [김병호] 재개발지구

문근영 2013. 9. 12. 15:56

재개발지구

 

김병호

 

 

노인을 붙잡아놓고 길자는 국수를 맙니다

 

노독이 뿔처럼 여문 저녁 기슭에 눈이 내립니다

 

국수 한 그릇을 비우는 동안 노인은 고개 한 번 들지 않습니다

 

노인이 슬그머니 놓고 간 껌을 불어 길자는 저녁을 팽팽히 늘립니다

 

그리움도 없이 살면서 자꾸 창밖만 내다보는 병은 겨울에 가깝습니다

 

한자리에 고이는 일 없이 흐르는 가문 울음처럼 눈이 내립니다

 

겨울이 지나면 국수집 길자네도 없습니다

 

 

 

-출처 : 『시인수첩』(2011.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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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는 그림으로 잘 그려지는 시다

목이 메이는 구도의 시다

우리 시에 이런 시편들이 더러 있다

김종삼의 시 「묵화」가 그렇고,

곽재구의 시「사평역에서」가 그러하다

그 시의 내용을 보면

모두가 지쳐있고 말이 없지만 묘하게

따뜻한 정감이 흐른다

고달프고 쓸쓸한 자들이 공유하는 연민과 동지애가 느껴지는

이런 정경을 보면 가슴이 따뜻해진다

그림이 팍 들어오는 인상 깊은 시를 만나서 행복하다

국수집 길자와 껌 파는 노인이 이루는

쓸쓸하고 먹먹한 구도이지만

읽어갈수록 내 속의 따뜻함이 건너가는 듯한 느낌에 휩싸인다

이 풍경은 재개발지구의 아슬한 하루를 말하고 있다

개발되는 동안은 그럭저럭 볼 수 있다 쳐도

완공되면 가건물은 철거되고 모두 뿔뿔이 흩어져야 하는 신세다

똑같은 처지이기에 서로에 대한 정이 더 갈 수도 있다

국수 한 그릇 말아주는 일과 파던 껌 놓고 간 일만 봐도 그렇다

국수는 언제나 가난한 음식이지만 따뜻한 음식이다

얼마나 춥고 배고프고 힘겨웠으면 고개도 들지 않고

한 그릇을 다 비우고

그 따뜻한 정에 감격하여 팔던 껌을 말없이 놓고 갔겠는가

철거를 앞두고 손님이 끊긴 국수집

길자는 노인이 주고 간 껌으로 하루의 적막을 건넌다

여기서 국수와 껌은 서로에게 건네는 위안으로 존재한다

창밖에는 가문 울음처럼 소리 없이 눈이 내리고

겨울이 지나면 길자는 또 떠나야 한다

우리 곁에 이런 현실이 즐비하다

울림을 주는 여백이 있는 시가 좋다

출처 : 시하늘
글쓴이 : 가우/박창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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