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이성부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
어디 뻘밭 구석이거나
썩은 물 웅덩이 같은 데를 기웃 거리다가
한눈 좀 팔고, 싸움도 한판하고,
지쳐 나자빠져 있다가
다급한 사연 들고 달려간 바람이
흔들어 깨우면
눈 부비며 너는 더디게 온다.
더디게 더디게 마침내 올 것이 온다
너를 보면 눈부셔
일어나 맞이할 수가 없다
입을 열어 외치지만 소리는 굳어
나는 아무것도 미리 알릴 수가 없다
가까스로 두 팔을 벌려 껴안아 보는
너, 먼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아
-출처 : 시집『우리들의 양식』(민음사, 1974)
--------------------------------------------------------------------------------------
1974년이라면 세상의 봄이 아직은 요원할 때다
세상이 요동치고 있을 때
이 시는 시대의 암울함을 예견하며
세상의 봄은 오고야 만다는 노래를
너무나 곱게 조용히 내뱉었다
그러던 그도 봄에 세상과 하직했지만
무던히도 애창하던 시가 아니던가?
이 시도 현실과 관련시켜보면
자유롭고 이상적인 세계에 대한
굳은 믿음을 보여 주는 시라고 할 수 있다
너는 화자가 기다리는 대상이고
다급한 사연은 화자가 처해 있는 고달픈 상황과 현실이다
나는 너를 기다리고 있지만
너는 아직 오지 않은 상태인데
화자는 너가 올 것이라는 믿음을 버리지 않는다
너는 반드시 올 것이라는 걸 확신하고 있다
조금 더디게 올지라도
다급한 사연을 듣게 되면
언젠가는 기필코 오리라는 것이 그 믿음이다
여기서 ‘너’는 ‘봄’과 같은 긍정적인 모습일 수도 있겠고
사랑하는 임, 민족의 독립, 유토피아 같은 것일 수도 있겠다
너라는 봄은 누구에게나 오는 것이지만
오는 속도와 그 내용이 다 다르다
바로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두고 시인이 노래한 것이 아닐까
우두커니 기다리기만 하는 바보가 되어서는 안 되겠다
'좋은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스크랩] [복효근] 로또를 포기하다 (0) | 2013.09.10 |
|---|---|
| [스크랩] [이은봉] 혼자 있는 시간을 갖지 못했다 (0) | 2013.09.10 |
| [스크랩] [김은상] 외상(外傷) (0) | 2013.09.09 |
| [스크랩] [정일근] 기다린다는 것에 대하여 (0) | 2013.09.09 |
| [스크랩] [홍성란] 해우소 (0) | 2013.09.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