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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정일근] 기다린다는 것에 대하여

문근영 2013. 9. 9. 18:13

기다린다는 것에 대하여

 

정일근

 

 

먼 바다로 나가 하루 종일
고래를 기다려본 사람은 안다
사람의 사랑이 한 마리 고래라는 것을
망망대해에서 검은 일 획 그으며
번쩍 나타났다 빠르게 사라지는 고래를
첫사랑처럼 환호하며 찾아왔다
이뤄지지 못할 사랑처럼 아프게 사라진다
생의 엔진을 모두 끄고
흔들리는 파도 따라 함께 흔들이며
뜨거운 햇살 뜨거운 바다 위에서
떠나간 고래를 다시 기다리는 일은
그 긴 골목길 마지막 외등
한 발자국 물러난 캄캄한 어둠 속에 서서
너를 기다렸던 일
그때 나는 얼마나 너를 열망했던가
온 몸이 귀가 되어 너의 구둣발 소리 기다렸듯
팽팽한 수평선 걸어 내게로 돌아올
그 소리 다시 기다리는 일인지 모른다
오늘도 고래는 돌아오지 않았다
바다에서부터 푸른 어둠이 내리고
떠나온 점등인의 별로 돌아가며
이제 떠나간 것은 기다리지 않기로 한다
지금 고래가 배의 꼬리를 따라올지라도
네가 울며 내 이름 부르며 따라올지라도
네가 울며 내 이름 부르며 따라올지라도
다시는 뒤돌아보지 않겠다
사람의 서러운 사랑 바다로 가
한 마리 고래가 되었기에
고래는 기다리는 사람의 사랑 아니라
놓아주어야 하는 바다의 사랑이기에

 


 

-출처 : 시집『기다린다는 것에 대하여』(문학과지성사,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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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바다와 고래

세상과 사람의 사랑

첫사랑과 이뤄지지 못할 사랑

 

그리움과 기다림

그리고 뒤돌아보지 않고 놓아주는 것

사람의 사랑과 바다의 사랑

 

이 시를 읽어보면 팍 들어오는 중심 어휘가 위와 같다

기다리는 사람에게 시간은 더디 오고

옛 추억에 대한 기억은 가끔 우리를 아프게도 한다

그 기억에 매달리느니 보내주는 것이 진정한 용기가 아니겠는가

이 시에서의 깨달음이 바로 이것이다

 

허무의 바다에서 고래를 기다리는 일이나

그 긴 골목길 마지막 외등
한 발자국 물러난 캄캄한 어둠 속에 서서
너를 기다렸던 일이나

모두 열망의 상처다

그 상처를 잊으려는 시도가 다시 기다리는 일인데

마음으로 받은 상처는 시간은 걸리나 잊게 마련이다

잊는다는 건 놓아주는 것이다

훨훨 날아 새로운 삶으로 새로운 사랑에게로 가도록 놓아주는 일이다

그러한 작용은 상대를 위해서라기 보다

오히려 내가 더 위로받기 위한 고육책일지도 모른다

 

떠나갔던 사람이 뒤늦게 후회하고 돌아온 경우를 본 적이 있다

그런 후 더 좋아진 것을 확인한 적이 있긴 하다

새 사람 만나면 더 좋을 것이라 여기겠지만 그게 그거다

대상은 남자고 여잔데

남자에게서 여자는 여자에게서 남자는 각기 다른 뉘앙스를 가지는 건 분명하지만

큰 상처가 아니라면 자신을 되돌아보는 것이 먼저일 것 같다

 

고래는 놓아주어야 하는 바다의 사랑이고

사람도 놓아주어야 하는 세상의 사랑이다

고래가 다시 보여도 잠시일 뿐 머물지 않는다

사람도 그럴 것이라 여겨진다

떠나간 사람이 따라올까 봐 걱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사랑하기 때문에 떠나고 헤어진다는 건 말짱 거짓말이다

그것은 말장난에 불과하다

이제 기다린다는 것에 대하여는 미련을 두지 않으려고 한다

 

우리가 그리워했던 그리움의 대상들이 다양하다

그것들이 모두 기다림의 대상이긴 하나 시차가 엄청나다는 걸 안다

살아온 날이  많은 나에게는 갈 날이 더 가까워지고 있어서

그리움들 하나씩 내려놓거나 놓아주는 게 상책일 것 같다

내가 겪은 이런 일들이 다른 사람도 같은 경험을 한다는 것이다

사람 사는 게 그게 그건데 우리는 글이나 행동으로 너무 미화한다

이제 이런 것도 놓아주어야겠다


 

출처 : 시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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