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시

[스크랩] [이진엽] 아름다운 끝

문근영 2013. 9. 7. 15:31

아름다운 끝

 

이진엽

 

 

가을산 가득히 바람이 불고 있다

클라라, 함께 천천히 숲길을 걸어보자

우린 오늘 아침 고해성사를 보았지

마음은 가쁘고 발걸음도 가벼워라

곱게 물든 잎새들 어깨 위로 내릴 때

클라라, 우리의 끝도 한 사흘만 흔들리다가

저토록 아름답게 떠나갈 수 있을까

조용히, 허공에서 떨어지는 엽서 몇 장들

지난 세월 가슴에 붙은 숱한 가시들도

지금 숲길에선 물살처럼 흘러내린다

클라라, 그래그래

잎은 땅에서 왔으니 대지로 돌아가고

우리는 빛에서 왔으니 하늘로 돌아가야지

목숨은 신비한 것

그리고 밤이 되면 맑은 비누로 손을 씻고

클라라, 낙엽 몇 장을

하얀 책갈피에 따뜻이 끼워 둔 채

추하지 않은 끝을 위해 기도하지 않으련

 

 

 

-출처 : 시집『겨울 카프카』(시학,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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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을 추구하는 시인의 마음 자세

-이진엽의 시 「아름다운 끝」을 읽고

 

위의 시는 시인이 어떠한 마음 자세로 빛을 추구하면서 살아가는지를 단적으로 말해주는 대표적인 시다.

인생을 아름답게 끝맺음하려는 시인의 고백이 담채화처럼 처리된 시다.

이 시에서 ‘가을산’은 오십 중반을 넘어선 시인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 주는 공간이다.

시인은 단풍이 든 잎새들이 바람이 불어 어깨 위로 떨어질 때 마치 그 나뭇잎의 모습이 자신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그때 그는 클라라라는 여성에게 “우리의 끝도 한 사흘만 흔들리다가 저 나뭇잎처럼 아름답게 떠나갈 수 있을까”하고 묻는다.

여기서 클라라가 어떤 여성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가톨릭의 성녀와 같은 존재일 수도 있겠고, 슈만의 아내 클라라처럼 헌신적이고 지고지순한 여인일 수도 있으며, 고해성사도 같이 보는 시인 주변의 실제 인물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빛에서 왔으니 하늘로 돌아가야 한다”는 시인의 의식이다.

이것은 빛이 그에게는 절대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것이며, 그의 신앙이 철저함을 내보인 것이기도 하다.

빛의 추구는 이번 시집의 제목이기도 한 시 「겨울 카프카」에서 확실히 드러난다.

 

 

밤새 한파는 몰아치고

아침이 되어도 길들은 좀체 풀리지 않았다

눈바람 부는 플랫폼

낮게 드리워진 한랭전선을 밟으며

낡은 열차에 몸을 실었다

프란츠 카프카*

그 쓸쓸한 이방인을 생각하며

나는 어느새

주머니 속의 동전 몇 낱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성에와 함께 녹아내리는

차창 밖 세상의 고달픈 시간표들

불현듯 손등으로 창문을 조금 닦아 내자

겨울강 한 자락이 판화처럼 찍혀 왔다

어디로 가는 것일까

내 젖은 생애에 뜨거운 증기를 끼얹으며

낡은 열차는 어디로 향하는 것일까

차창이 몹시 덜컹댔다

승냥이 몇 마리가 눈밭을 헤치며

목을 젖힌 채 벼랑 끝에서 우는 환영이

유리창에 어른거렸다

카프카여, 지금은 깊은 겨울

모두가 무표정하게 조간신문을 읽거나

두터운 외투 속에 얼굴을 파묻고 있는데

멀고 먼 프라하**

허무의 그 거리에도 눈이 내리고 있는가

쓸쓸한 침묵의 도시

바람과 불확실만이 뼛속을 파고드는

회색빛 종착역으로 열차는 자꾸만 빨려들었다

그렇다, 모든 것은 저마다

깊이도 알 수 없는 눈보라 속으로

순간순간 내던져질 뿐

아무도 따스한 포옹으로

이 낯선 시대를 껴안을 순 없다

나는 나,

다만 혼자서 터널 밖으로 신호를 보내며

어두운 시간을 뚫고 끝없이 빛을 찾아야 한다

다시 차창이 흔들렸다

아직도 사람들은 표정 없는 얼굴로

껌을 씹거나 나른한 잠에 빠져 있고

퍼붓는 눈발을 사납게 헤치며

낡은 겨울열차는 기적 소리를 길게 울렸다

 

*프란츠 카프카(1883-1924):체코의 작가

**체코의 수도

                                              -「겨울 카프카」전문

 

 

왜 하필이면 카프카일까.

인간의 절망적 실존을 「변신」과 같은 작품을 통해 보여준 숙명적 비관론자가 그가 아니던가.

그러나 시인이 제시하는 이 시의 분위기를 파악하면 카프카의 등장이 어렵지 않게 이해가 된다.

지금은 깊은 겨울이고, 눈보라 속에서 사람들 모두가 무표정하게 조간신문을 읽거나 두터운 외투 속에 얼굴을 파묻고 있다.

‘쓸쓸한 침묵의 도시“, ’바람과 불확실‘, ’회색빛 종착역‘ 같은 어구는 더욱 이 시의 배경을 극한적 실존의 상황으로 몰아가고 있다.

이 상황을 대변해 줄 인물로 실존문학의 선구자인 카프카만큼 적절한 인물이 어디 있겠는가.

그리고 시인 역시 카프카와 마찬가지로 이 낯선 시대를 아무도 껴안을 수 없다고 비관론적 전망을 내놓는다.

그렇다고 시인 역시 좌절의 늪에 빠진 것은 아니다.

“나는 나”이므로 혼자서라도 터널 밖으로 신호를 보내면서 “어두운 시간을 뚫고 빛을 찾아야 한다”.

신실한 신앙인이기에 가능한 태도다.

이러한 빛의 추구에서 우리는 ‘세계-나-존재’로서 그의 ‘양심의 부름’을 발견할 수 있다.

 

-시인이며 문학평론가인 박호영 님이 쓰고 詩하늘에서 엮음

 

출처 : 시하늘
글쓴이 : 가우/박창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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