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리
배한봉
용추계곡 숲길에서 내 운동화 한 짝만 한 어린 산토끼와 만났다
좁은 길 한가운데 앉아 나를 바라보는 토끼
나도 꼼짝 못하고 토끼만 바라보는 시간
어린 토끼가 가던 길 어서 마저 가기를 간절히 바라는 시간
가볍게 바람을 쐰 뒤 얼른 돌아가야 하는, 내 사정 따위는 아랑곳없다는 듯 보드랍게 토끼의 잿빛 털을 쓰다듬고 있는,
바람의 저 천만 개 가느다란 손가락
허공을 유영하는 멸치 떼 같은 은빛 바람의 손가락
지상의 파란을 모두 기억하는 바람도 어린 토끼 놀랄까봐 그런 자세로 한참을 궁리하는 시간
-『유심』(2011. 11/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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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리란 일을 처리하거나 밝히기 위하여 깊이 생각한다는 뜻이다
참신한 궁리, 산뜻한 궁리는 좋은 것이다
좁은 산 길에서 어린 또끼를 만났는데
사람끼리 마주쳤다면 서로 비켜가면 된다
그런데 상대가 서로를 잘 모르는 사람과 동물이다
서로에게 해를 가하지 않으면
한참을 바라보다 헤어져 갈 길을 가면 되겠으나
사람이 배려 차원에서 어린 토끼를 놀라지 않게 하는 것이 무엇일까 한참을 궁리했다면
반대로 어린 토끼도 그러했을까 생각해보지만 그건 아닐 것 같고
사람이 가가이 가면 어린 토끼는 그만 물러나 도망가기 바쁠 것 같다
그런데 사람과 동물이 한데 어울려 지내는데
서로를 이해하고 다가가도 아무렇지도 않게 되는데는 꾀 오랜 시간이 걸린다
집에서 동물을 길러 봐도 그렇다
잘 모를 때, 어릴 때부터 같이 살면서 이뻐해 주고 귀여워해주면
사람에게 따르게 된다
내가 다 큰 진돗개를 데려다 키워봤는데
결정적일 때는 야성을 발휘해서 나를 곤란하게 한 일이 한두 번이 아님을 잘 알고 있다
서로 경계를 하면서 바라보는 사이에 화자가 생각한
기특한 생각이 바로
'보드랍게 토끼의 잿빛 털을 쓰다듬고 있는,/ 바람의 저 천만 개 가느다란 손가락/ 허공을 유영하는 멸치 떼 같은 은빛 바람의 손가락'이다
이것은 바로 어린 토끼가 놀랄까봐 배려하는 바람의 처신, 곧 궁리다
궁리를 해도 좋은 것이 떠오르지 못해 늘 낭패를 당하는 사람도 있는데
화자는 기다려 주는 배려와 바람의 궁리를 한꺼번에 읽고 있다
거기에다 바람의 행동을 멋있게 표현한 부분이 이 시를 더 시답게 하는 것 같다
산 길에서 만난 사건을 이야기처럼 술술 풀어갔는데
마음에 와 닿는 시가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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