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을 바꿔 입다/ 이기철
시는 못 바꾸고
옷만 바꿔 입는다
여름 가고 가을 온다
한 줄도 못 바꾸고
양복만 바꿔 입는다
저녁놀이 다 써놓은 시를
내가 베껴도
시는 바뀌지 않는다
저녁은 낯익다
저녁은 다정하다
다감하다고 쓰려다
다정하다고 쓴다
늘 이렇다
시는 못 바꾸고 애인도 못 바꾸고
와이셔츠만 바꾼다
저녁은 어둑어둑 다 모은다
옆구리에 작은 새들과
소쿠리에 밤껍질 호두껍질 다 모여 있다
내 시가 놓친 것들
다 모여있다
한때 나는 시가 나라를 바꾸리라 믿었다
조광조도 김수영도 그랬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들도 나도 그런 점에서는
낭만주의자다
혁신과 혁명은 낭만주의자가 아니면
못한다 나폴레옹도 그렇다
비유컨대 봄풀만큼 혁신주의자도 없다
풀씨만큼 개혁주의자도 없다
하느님은 아무 것도 도와주지 않는다
하느님은 시를 읽지 않는다
나는 하느님보다 시를 믿는다
우물에 낮달이 비친 것 보고
시를 생각하는 사람이
진실로 시인이다
혁명공약은 시가 아니다
군벌주의자가 아니면 혁명공약을
믿지 않는다
저녁 가고 밤 온다
곧 명석한 별이 뜰 것이다
잠든 새들을 사랑할 시간이다
공포들이 칼날을 내려놓을 시간이다
물소리가 높아질 시간이다
침대가 활발할 시간이다
마누라는 못 바꾸고
자식은 못 바꾸고
빤쓰만 바꿔 입는다
마흔 해를 써온 서정시를 바꿔야 하는데
못 바꾼다
마흔 해를 입은 양복을 버리고
청산별곡을 외며
서정시 쓴다
-월간『현대시학』(2011,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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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있을 직장의 첫 처총 모임
진심으로 사양했는데
섭외하고 싶다는 후배의 말에
함께 한다 했다
내 외모가 좀 덜 오래돼 보였으면 좋겠다
그 욕망이 촌시러우면서도 웃음이 난다
여자는 옷에 따라 느낌이 많이 달라진다
입어야 할 옷의 패턴에 대해서
아버지, 어머니, 이모, 고모, 동생, 나를 아끼는 분들의
많디 많은 조언 덕에 다소 엄선이 되었지만
아직 나는 다양한 옷과 머리를 꿈꾼다
요즘은 클래식한 롱펌 가발을 자주 떠올린다
생각만 하고 안 사게 되는 가발처럼
강렬하게 맴도는 시들을 머리에 쓰지 않은지 오래인 채
요즘은 시하늘에 게시된 역대 시들을 고맙게 입고 있다
트인 시하늘을 한참 바라보는 동안
내가 줄줄 달아매고 있는 것들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주로 깨닫는다.
시가 좋아서 등단하고 싶었던 20대 어느 계절
명예욕과 결합한 30대,
지금 생각해보니 등단은
시의 큰 산으로 들어가는 매표소인 것 같다
개인적으로 '시인' 이란 말에 대한 거부감이 좀 있다.
시에 대한 결벽증 같은 것?
시인이라는 말을 쉽게 쓰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저녁놀이 다 써놓은 시'라는 구절처럼
태초부터 있는 시들를 붙잡는 우리들의 몸짓
시인
등단을 했지만 시답지 않은 사람
판단하고 있는, 여기 이 사람
모두 시의 근원을 좇고 있는 지도
설레는 사람, 시, 옷 등을 허겁지겁 만나며 뒤죽박죽인 내가
오늘도 여기에서 이렇게 글을 엮고 있는구나
내 시의 목적은 뭘까
현실과 이상의 조화?
'혁명'과 '일상'의 화해?
현실은 이미 넘쳤고
이상적으로! 탕 털고
신대륙행 유람선 위
맨 몸으로 출항하는 뱃머리에서
시원한 바람 맞으며 먼 바다를 본다
이 봄
나의 승선권! 시만 남기고
가지런히 가지런히
여름 출항의 경적을 울린다
부우웅--!
- 김선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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