삭 발
이복희
머리를 조금 잘랐더니
어느새 시가
짧아졌습니다.
긴 머리만큼이나 길었던 시
이제는
한 줄의 시도 쓰지 않기 위하여
비구니처럼
나는
푸른 삭발을
꿈꾸고 있습니다.
- 이복희 시집, 『사랑도 아프터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면』, 문학마을, 199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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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책꽂이에서 묵은 시집들을 뒤지다가 한 권의 시집을 꺼내어 뒤적여 본다,
언제 내가 읽었는지 기억조차 희미한 저 너머에서
먼지를 뒤집어 쓴 페이지들은 이제야 얼굴을 내민다,
그러다가 손에 잡히는 시 한 편 꺼내 컴퓨터에 올리려는데
툭! 하고 누렇게 오래된 제본이 떨어져 나간다.
나만큼, 아니 한 때 나의 것이었으나 나의 기억 밖에서
이 많은 활자들이 나의 무관심 속에서 버려져, 저 먼지 너머 아득한 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구나, 오래된 시집들을 읽으며 새삼 놀란다.
나도 젊었던 한 때, 긴 머리를 가진 여자들에게 로망이 있었지,
긴 머리를 바람에 살짝 날리며, 안녕하며 작별 인사를 하고
돌아서던 여자의 뒷 모습과
그 뒤로 한없이 흘러가던 무채색 배경들......
머리를 자르고 나면 허전할 것이다, 이 시를 쓴 시인도 오랜 고심 끝에
머리를 잘랐을 것이다, 늘 초대받지 않은 외로움과 잠시 무대의 공연이 끝난
막간의 눈물과 한숨과 이별의 순간들을 곱씹으며.
시가 자꾸 길어지려고 한다, 긴 머리만큼 시가 길게 자란다.
그러나 감정의 과잉에서 이제는 벗어나야 한다.
비구니 스님처럼 "푸른삭발"로 나의 시의 감정선을 다스릴 때가 왔다.
이제 동안거에 들어가면 한 줄의 시도 쓰지 않을 것이다.
아니 한 줄의 시를 쓰기 위하여 오늘도 생각의 푸른 삭발을 한다.
90년대초 청춘들에게 이 시집은, 이 시집에서
「통화」와 「온라인」이라는 제목의 시는 많이 읽히기도 했다.
아직도 두 제목의 시편은 온라인에서 시를 사랑하는 카페에 애송시로 가끔 등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제는 오십을 바라볼 나이가 된 최근의 이 시인의 흔적은 찾을 수가 없다.
이 시집에 "사랑도 아프터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면"이라는 제목의 시는 없다.
사랑은 아프터 서비스를 받을 수 없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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