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시

[스크랩] [이복희] 삭발

문근영 2013. 8. 23. 15:49

 

삭 발

 

이복희

 

머리를 조금 잘랐더니

어느새 시가

짧아졌습니다.

 

긴 머리만큼이나 길었던 시

 

이제는

한 줄의 시도 쓰지 않기 위하여

비구니처럼

나는

푸른 삭발을

꿈꾸고 있습니다.

 

- 이복희 시집, 『사랑도 아프터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면』, 문학마을, 199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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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책꽂이에서 묵은 시집들을 뒤지다가  한 권의 시집을 꺼내어 뒤적여 본다,

언제 내가 읽었는지 기억조차 희미한 저 너머에서

먼지를 뒤집어 쓴 페이지들은  이제야 얼굴을 내민다,

그러다가 손에 잡히는 시 한 편 꺼내 컴퓨터에 올리려는데

툭! 하고  누렇게 오래된 제본이 떨어져 나간다.

나만큼, 아니 한 때 나의 것이었으나 나의 기억 밖에서

이 많은 활자들이 나의 무관심 속에서 버려져, 저 먼지 너머 아득한 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구나, 오래된 시집들을 읽으며 새삼 놀란다.

나도 젊었던 한 때, 긴 머리를 가진 여자들에게 로망이 있었지,

긴 머리를 바람에 살짝 날리며,  안녕하며 작별 인사를 하고

돌아서던 여자의 뒷 모습과

그 뒤로 한없이 흘러가던 무채색 배경들......

 

머리를 자르고 나면 허전할 것이다, 이 시를 쓴  시인도 오랜 고심 끝에

머리를 잘랐을 것이다, 늘 초대받지 않은 외로움과 잠시 무대의 공연이 끝난

막간의 눈물과 한숨과 이별의 순간들을 곱씹으며.

시가 자꾸 길어지려고 한다, 긴 머리만큼 시가 길게 자란다.

그러나 감정의 과잉에서 이제는 벗어나야 한다.

비구니 스님처럼 "푸른삭발"로 나의 시의 감정선을 다스릴 때가 왔다.

이제 동안거에 들어가면 한 줄의 시도 쓰지 않을 것이다.

아니 한 줄의 시를 쓰기 위하여 오늘도 생각의 푸른 삭발을 한다.

 

90년대초 청춘들에게 이 시집은, 이 시집에서

「통화」와 「온라인」이라는 제목의 시는 많이 읽히기도 했다.

아직도 두 제목의 시편은 온라인에서 시를 사랑하는 카페에 애송시로  가끔 등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제는 오십을 바라볼 나이가 된 최근의 이 시인의 흔적은  찾을 수가 없다.

이 시집에  "사랑도 아프터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면"이라는 제목의 시는 없다.

사랑은 아프터 서비스를 받을 수 없기에. 

 

 

 

 

 

 

출처 : 시하늘
글쓴이 : 김경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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