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올 때
신현림
그리운 손길은
가랑비같이 다가오리
흐드러지게 장미가 필 땐
시드는 걸 생각지 않고
술 마실 때
취해 쓰러지는 걸 염려치 않고
사랑이 올 때
떠나는 걸 두려워하지 않으리
봄바람이 온몸 부풀려갈 때
세월 가는 걸 아파하지 않으리
오늘같이 젊은 날, 더 이상 없으리
아무런 기대 없이 맞이하고
아무런 기약 없이 헤어져도
봉숭아 꽃물처럼 기뻐
서로가 서로를 물들여 가리
- 신현림 시집, 『해질녘에 아픈사람』, 민음사, 20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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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떽쥐페리의 『어린 왕자』에서 어린왕자는 쓸쓸할 때면 해질녘 풍경을 바라보는 것을 좋아한다 하였다. 어떤 날은 의자를 몇 번이나 옮겨가며 해가 지는 서녘을 바라보았다고 하였다. 그날은 그렇게 쓸쓸하더냐고 물었으나 어린왕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늦가을에서 초겨울로 접어드는 어스름이 내리는 스산한 저녁의 풍경은 왠지 쓸쓸함을 안겨준다. 지금 누구를 사랑하고 있는 이가 있거나, 지금 누구와 이별하고 있는 이가 있거나를 불문하고 원초적인 이 서글픔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오늘은 남문시장 네거리, 오래된 거리의 가로수, 커다란 플라타너스 잎들이 초겨울 바람에 사정없이 떨어져 거리에 나뒹굴다 발에 채이며 바람에 굴러가고 있다.
어디로 가야하나? 나는 지금 어디쯤 와 있는가? 사랑할 땐 그 사랑이 그렇게 그립고 아득한 손길로 다가와서, 술 마시고 쓰러지는 것을 두려워 않고 사랑을 앓다가, 문득 깨고 나면 그 마음의 상태가 두려워 지는 것일까. 그러나 두려워도 사랑하자. 마음껏 물들고 마음껏 기뻐하자. 지금 사랑하는 이 순간은 우리 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젊은 날이니. 그대라고 부르는 이름이 있다면 흠뻑 젖어 버리자.
시집『세기말 부루스』로 더 유명한 신현림의 시 중에서 보기 드문 아름다운 사랑의 詩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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