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시

[스크랩] [최승호] 겨울산

문근영 2013. 8. 22. 11:48

겨울산


최승호


문을 열자

바다코끼리의 긴 이빨처럼

고드름들이 눈에 들어왔다

눈 쌓인 아침 숲속에서

고요의 해일이

귀 속으로 차갑게 밀려 들어왔다

꽝꽝하다 이 겨울

묵은 눈 덮힌 산들은 빙산만큼씩한 흰 봉우리들을

치켜들고 우뚝 솟아오르고


두껍게 얼어붙은 얼음장을 깨고 항아리에

마을 아낙네들이 물을 긷는다

꽝꽝하다 이 겨울

산들은 문을 닫고

다람쥐는 빙산 깊이 잠들어 있다


무너지듯 산비탈을 미끄러지며

녹아내리는 눈더미와 덩치 큰 얼음장들이

화강암덩어리의 이 산 저 산을 치받을 때

골짜기 가득 쩌렁쩌렁한 산의 울음 소리 울려퍼질 그 때까지


- 최승호 시집 『대설주의보』, 민음사, 198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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꽝꽝한 겨울이 찾아 왔다. 온통 세상이 싫어질 때 맨 주먹을 불끈 쥐고 깊은 산으로 들어가 하룻밤을 묵어본다. 눈이 와서, 눈이 오고 또 와서 눈 덮인 높은 산봉우리들은 사람을 압도한다. 남도의 다정한 엄마 품 같은 산들과는 반대로 영동의 깊은 겨울산들은 특히 더 그렇다. 눈발은 공평하게 내려 온 세상의 슬픔과 기쁨을 하얗게 덮어준다. 그러나 얼마나 치가 떨렸으면 고드름이 낯선 바다코끼리의 긴 이빨처럼 보였을까. 잠시 눈으로 덮여 있으나  우리들의 분노와 아픔들은 봄이 되면 산이 되어 봉우리들을 치켜들고 솟아올라야 한다. 세상사 모순과 긴장 속에서도 일상의 삶은 이어져야한다. 두꺼운 얼음을 깨고 물을 긷고  밥을 앉혀야한다. 다람쥐도 동면을 할 만큼 혹독한 겨울이다. 깊은 산골의 겨울 아침, 방문을 열며 아직 시퍼런 처마의 고드름을 보며 다짐한다. 언젠가 저 꽝꽝한 얼음도 눈도 녹아서 요지부동일 것 같은 바위 덩어리의 산을 치받고 그 치받는 소리가 쩌렁쩌렁 산이 포효하는 듯 온 천지에 울려 퍼지는 그날을 우리는 기다린다. 문학은 그 시대의 정신적 모습을 담아내는 그릇이다. 시는 그 문학 장르 중에 가장 선두에서 때로는 시대의 폭력에 맞서서 창조적으로 담아내야 한다. 한국 근대사의 가장 엄혹한 시기에 이 시는 쓰여 졌을 것이다. “대설주의보”로 제 6회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한 최승호 시인의 이 시집은 1983년 4월에 출판되었고, 이 시는 그 시집의 가장 마지막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다.

다시 봄이 올 것이다.

출처 : 시하늘
글쓴이 : 김경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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