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시

[스크랩] 깨끗한 영혼/이성선

문근영 2013. 8. 6. 12:47

깨끗한 영혼 /이성선

 

영혼이 깨끗한 사람은

눈동자가 따뜻하다.

늦은 별이 혼자 풀밭에 자듯

그의 발은 외롭지만

가슴은 보석으로

세상을 찬란히 껴안는다.

저녁엔 아득히 말씀에 젖고

새벽엔 동터오는 언덕에

다시 서성이는 나무.

때로 무너지는 허공 앞에서

번뇌는 절망보다 깊지만

목소리는 숲 속에

천둥처럼 맑다.

찾으면 담 밑에 작은 꽃으로

곁에서 겸허하게 웃어주는

눈동자가 따뜻한 사람은

가장 단순한 사랑으로 깨어 있다.

 

-『이성선 전집』(서정시학, 2011)

 

무엇이 깨끗한 영혼을 만들까? 깨끗한 영혼을 가진 이는 무엇과 비슷할까? 그것은 쉽게 답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요, 우리의 눈에 또렷이 보이는 것도 아니기에, 시인은 이에 대한 함축적인 답을 몇 개의 작은 비유에 담아놓았다.

 

시에서 따르면, 영혼이 깨끗한 사람의 가장 두드러지는 첫 번째 특징은 ‘따뜻한 눈빛’에 있다. 이는 시각을 촉각(온도)으로 전환한 표현으로, 눈빛은 우리의 신체 기관 중에서 유일하게 마음의 빛과 온도를 전달할 줄 안다. 슬픔과 기쁨과 흥분과 멸시와 사랑과 애욕의 모든 감정의 그림자가 눈빛에 비쳐진다. 눈은 실로 오묘하기 짝이 없는 무색 영혼의 창이다. 신은 무엇으로 이러한 눈의 신비를 만들었을까?

 

어느 소설가도 이르길 ‘그 어떤 화장품으로도 아름다운 눈빛’은 말들 수 없다고 한 바 있다. 따뜻한 눈빛이란 내면 속에 깊게 자리 잡은 따뜻한 영혼의 기운이 눈동자의 창에 어떤 빛으로 비쳐지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비록 눈동자는 육신의 것이나 그 아름다움은 내면에 속한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외부가 아니라 내면을 가꿀 때만 만들어질 수 있다.

 

늦은 별이 혼자 풀밭에 자듯 외로울지라도, 보석 같은 마음으로 세상을 껴안을 수 있는 사람. 저녁엔 아득한 말씀에 젖고 새벽엔 동터오는 언덕에 서성이는 나무 같이 순박한 사람. 때로 무너지는 허공 앞에서 절망보다 깊은 번뇌에 빠지기도 하지만 목소리는 언제나 숲 속에 천둥처럼 맑은 사람. 어디 있나 하고 찾아보면 담 밑에 작은 꽃으로 늘 곁에서 겸허하게 웃어주는 사람.

 

시에서는 깨끗한 영혼의 결론 격으로, 눈동자가 따뜻한 사람은 ‘가장 단순한 사랑’으로 깨어 있는 이라고 하였다. 하여 ‘따뜻한 눈빛’과 ‘가장 단순한 사랑’은 동격의 의미를 가진다. 그런데 단순한 사랑도 아니요 ‘가장 단순한 사랑’이라 했으니 이는 무슨 의미일까?

 

사랑은 본디 순수하고 진실할수록 더 단순해지는 것이다. 순수하고 진실할수록 그 사랑은 무욕의 ‘조건 없는 사랑’이 되기 때문이다. 조건 없는 사랑이란 나의 욕망이 끼어 있지 않는 사랑이며, 어떤 조건 없이 언제 어디서나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다하는 사랑이다. 그것은 아무 조건이 없기에 늘 가장 순수한 형태의 단순한 사랑이 될 수밖에 없으며, 영혼의 가장 깊고 맑은 곳에 닿는다.

 

깨어있는 사람만이 새벽을 볼 수 있듯, 가장 단순한 사랑으로 깨어 있는 사람은 영혼의 새벽을 여는 사람일 것이다. 이런 사람의 눈빛에는 따뜻한 향기가 날 것이며, 눈빛뿐 아니라, 그의 말과 행동에서도 어떤 아취가 풍길 것이다. 깨끗한 영혼은 이렇듯 순수한 사랑으로 깨어있는 이이기에, 기꺼이 자신을 낮춰 담장 밑의 작은 꽃처럼 겸손하게 웃어주는 것이다. 그런 사람이 곁에 있다는 것은 삶에 얼마나 큰 행운인가?

 

다음의 시에서도 우리는 깨끗한 영혼이 지닌 따뜻한 눈동자가 주는 축복을 느낄 수 있다.

 

우다이푸르 정류장에서

푸쉬카르행 버스를 기다리는 나에게

가까이 다가와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쳐다보며

 

맑게 웃어주는 저 남루한 아이의

이슬 같은 눈동자 속에 살짝 숨어 들어가 목욕하고 나오다

 

비로소 이 먼지의 땅이 연꽃 속이구나

이제 나무를 바라보는 법으로 사람을 바라본다

-<연꽃잎 속 이슬>

 

비록 형색은 남루하지만 이슬 같은 눈동자로 타인의 찌든 마음과 한 영혼을 씻어줄 수 있는 아이. 먼지의 땅을 이슬의 연꽃 속으로 만들 수 있는 눈동자의 마법! 세상에 어떤 보석이 이와 맞먹을 수 있으리요.

 

때론 눈빛이 입보다 더 많은 말을 한다. 눈동자가 따뜻한 사람은 말 이상의 말을 눈으로 할 수 있는 사람이며, 그 눈빛으로 사람의 마음에 온기를 전할 수 있는 사람일 것이다. 눈동자 속에 맑고 따뜻한 사랑의 등불을 켠 이들, 그런 사람이 많을수록 세상은 점점 더 아름다워지리라.

 

순수한 사랑으로 깨어날 때 우리는 누구나 깨끗한 영혼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깨끗한 영혼만이, 아니 깨끗한 영혼을 되찾은 이만이 따뜻한 눈빛으로 연꽃 속 이슬처럼 세상을 맑게 적실 수 있을 것이다.

 

 

-이성선 시 읽기 에세이. 김주수

출처 : 시하늘
글쓴이 : 취루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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