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침묵/이성선
영혼은 내 안에서 침묵한다.
가장 고요한 시간
목숨의 심지에서 영혼이
깨어나
불꽃으로 타오르면
나의 육체는 그릇이 되어
이끼 낀 샘물로 맑게 고이 떤다.
그를 위해 조금씩 몸을 비운다.
기도 속에
촛불이 그림자 떨듯
그는 내 안에서
물을 길으며 노래한다.
내가 하나의 갈대로 서서
사색하며
별을 지키는 밤에도
바람으로 아니 눈물을 넘어서서
나를 밟고 신비한 피리 분다.
등잔이 비어 있을 때만
영혼의 아름다운 피리소리가 들린다.
타오르는 춤이 보인다.
그 밤에만 그에 귀를 밟히고 섰거니
나의 몸은
이 영혼을 모시는 사원
그를 위해 여기 돌아와 섰다.
그가 타오르면
조금씩 나를 하늘로 길어가고
다시 우주의 침묵을 내려
내 등잔을 채우는 시간
나는 이 땅에 떠 있는 석등
조용히
그를 불 밝히는 그릇.
-『이성선 전집』(서정시학, 2011)
이성선 시인은 일찍이 “내가 시를 쓰는 시간은 이 잃어버린 나에게 다리를 놓는 시간이고 나의 시는 이 다리를 통한 만남의 노래이다.”라 하였다. 그가 말한 ‘이 잃어버린 나’는 본디 하늘(우주)과 하나였던 영혼을 말한다.
우리는 하늘로부터 왔다. 하늘로부터 와서 하늘의 영양으로 자랐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오직 하늘에서 이곳으로 나를 인도한 통로일 뿐이다. 우리는 진정 하늘에서 왔다. 우리를 태워 보아라. 우리 몸은 겨우 한줌도 안 되는 재만 남기고 모두 하늘로 돌아간다. 우리 몸은 거의 대부분 이 보이지 않는 세계가 돌아와 지어 놓은 신비의 집이다. -「나의 시세계」
그는 삶의 모든 고통과 방황의 원인이 하늘과의 분리에서 비롯된 것이라 말한다. 그래서 그는 늘 ‘하늘과 본디 하나였던 나’를 찾고자 시로써 희구한 것이요, 특히 ‘하늘로 돌아가는 불의 의미’를 노래한 이 시는 그러한 성향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의 하나일 것이다.
목숨의 심지에 영혼의 빛이 타오름을 노래한 시. 온 마음을 모두어 ‘그(님)’를 위해 하늘로 타오르는 영혼의 등잔! 그는 왜 잃어버린 나를 찾기 위해, 등잔의 불을 노래하는 것일까?
오직 나무가 탈 때 나무는 불을 통하여 하늘을 만나고 불의 인도로 한 부분씩 하늘로 돌아감을 볼 것이다. 타고 있는 초를 보라. 등잔을 보라. 불은 조금씩 초와 기름을 녹여 하늘로 길어 올리고 그 빈 자리를 우주의 음악으로 채우고 있다. 불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두를 하늘로 인도하는 길이요 깨어 있음의 상징이다. -「나의 시세계」
우리의 몸도 다 타고 나면 한 줌 재를 뒤로 한 채 허공(하늘)이 되어 버리듯, 완전한 연소는 나무뿐 아니라 모든 사물을 하늘로 돌려보내는 귀천(歸天)의 길이다. 그래서 불은 ‘나’를 하늘로 길어 올리고 그 빈 자리를 다시 우주의 입김으로 채우는 신성한 현상이 된다. 기실 무한한 우주에 한 점과도 같을 지구별도, 다 타고 나면 무한한 허공의 품에 호젓이 다시 안길 것이 아닌가.
그런데 이 시의 표제가 되는 ‘영혼의 침묵’은 무엇을 말하는 것이며, 그것은 왜 필요한 것인가?
불은 가장 고요한 시간에만 살아 타오른다. 한 생명이 깨어나 타오를 때 세계 전체가 그를 돌아본다. 우주 전체가 돌아와 그를 빛내주며 찬양하여 노래한다.
가장 고요할 때만 영혼은 깨어난다. 영혼이 깨어날 때 세계 전체가 돌아와 그의 빈 그릇에 꽃을 던진다. 우리는 이 고요함을 만나야 한다. 자주 만나야 한다. 자주 깨어나야 한다. 고요한 순간은 오래 달리던 자동차가 주유소에서 급유하는 순간처럼 우리의 육체가 우주로부터 그의 젖과 영양분을 공급받는 시간이다. -「나의 시세계」
내면의 불은 고요할 때 가장 잘 타오른다. 즉 내 영혼이 침묵의 시간 속에 깃들 때 나는 활활 타오르는 불의 되어 조금씩 하늘로 스며들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등잔이 비어 갈 때 타오르는 춤과 함께 영혼의 피리소리가 들린다고 한 것이다. 영혼의 고요함 그것은 나를 하늘로 연소시키는 길이요, 연소된 빈 자리를 ‘하늘’로 채우는 삶의 더없이 소중한 일이다. 그렇기에 우리의 몸은 누구나 ‘하늘에 닿는 영혼’을 모시고 있는 사원이며, 그 사원의 빛은 영혼이 고요로 깨어날 때만 켜지는 것이다.
시를 쓰는 시간은 고요함의 시간이다. 이 고요의 춤을 통하여 문을 열고 불인 영혼과 하나가 되며 우주와 하나가 되어 타오르게 된다. 춤이 어느 순간에 일어나는지 보라. 그것은 완전 자유 속에 놓일 때 자신도 모르게 일어난다. -「나의 시세계」
본디 하늘과 하나였던 나의 영혼은, 그(님)와 둘로 분리되지 않는 ‘둘이면서 하나’인 존재이다. 그 둘이면서 하나로 이어져 있는 본래의 나를 찾기 위해 시인은 고요한 시간을 가려 시를 쓰는 것이다. 불은 수직의 꿈, 승천의 꿈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내 목숨의 심지에 불을 밝혀 나를 연소시키는 일로부터 시작된다. 완전한 자유란 이렇듯 나를 비우는 일이며 나를 완전히 놓는 데서 생성되는 것이다.
우주의 침묵이 내려 나라는 등잔을 채우는 시간, 나를 하늘로 길어가는 시간, 그 시간을 위해 우리는 기도하듯 영혼의 침묵 속에 ‘고요 아닌 것’을 비워내며 마음을 밝혀야 한다.
나에게 있어 해탈이란 체념 속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수많은 환희의 속박 가운데 자유로움의 포옹을 느끼고 있습니다.
당신은 언제나 나를 위하여 여러 종류의 빛깔과 향기가 감도는 신선한 술을 부어주고 있습니다.
이 잔에 가득히 채워주고 있는 것입니다.
나의 세계는 당신의 불길로 인하여 수많은 등불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당신 사원의 제단 위에 바칩니다. 나는 감각의 문을 닫지 않을 것입니다.
보고 듣고 손길이 닿는 기쁨은, 당신의 환희를 전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나의 모든 환상은 기쁨의 불꽃으로 타오를 것이며, 나의 모든 욕망은 사랑의 열매가 될 것입니다.
-타고르, <기탄잘리·73>
내가 고요해 지는 시간은 우주의 침묵이 내 안에 내래는 시간이다. 정녕 우리가 그러한 영혼의 침묵 속에 깃들 수 있을 때, 우리의 세계 또한 모든 환상을 넘어 기쁨의 불꽃으로 높이 높이 타오를 것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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