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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눈이 온 다음날 비치는 햇살 /이성선

문근영 2013. 8. 5. 20:13

눈이 온 다음날 비치는 햇살

 

눈이 온 다음날 솔잎에 빛나는 햇살

산협에 내려와 두근거리는 하늘

가지의 속삭임을 비추는 조용한 물빛

거울 속에 담긴 하늘을 차고 날아가는 새

새소리 새소리 사이로 피어오르는 물소리

물소리 물소리 사이로 젖는 향기

 

 

이 시는 이성선 특유의 섬세한 감각이 돋보이는 시이다. 흔히 우리는 시를 이야기할 때 감수성의 의미를 이야기한다. 감수성이란 외부 세계에 대한 감각적인 내면의 반응이다. 그런데 왜 시에선 유독 감수성(혹은 감성)이 강조되는 것일까? 그것은 ‘무엇을 느낄 수 있는 것’도 하나의 중요한 정신적 능력이기 때문이다.

음악가는 음을 듣는 능력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고, 화가는 색과 선을 보는 능력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쪽의 감각이 발달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엄연히 그들이 가진 남다른 능력이듯이, 시인에게 있어 외부 세계에 대한 ‘뛰어난 감성’은 필수불가결한 시인의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시인은 남다른 감성을 가지고 있기에, 남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며 남이 듣지 못하는 것을 들으며, 남이 느끼지 못하는 것을 느끼는 사람이다. 즉 시인은 이 세계를 더 깊이 느끼고, 더 풍부하게 향유 수 있는 감성을 가진 사람이며, 그것을 정제된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언어의 건축가이자 세공사인 것이다.

시는 그래서 사진처럼 외부의 모습 그대로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시인의 마음에 비쳐진 내면 세계를 보여준다. 시인의 ‘마음속에 비쳐진 세계’는 필히 시인 개인이 지닌 감성의 프리즘을 거쳐서 시의 언어로 새롭게 담긴 것이기에, 우리에게 외부 세계와는 또 다른 마음의 진경(眞境)을 보여준다.

이 시 속에 들어있는 감각의 세계는 이성선이 내면에 지녔던 ‘감성의 프리즘’이 어떤 것이었는가를 또렷이 보여준다. 눈이 온 다음날의 정결한 솔잎에 햇살은 빛나고, 소리 없는 산협엔 하늘이 낮게 내려와 두근거리는 듯하다. 눈 내린 산협의 정밀한 느낌을 시각과 촉각의 느낌으로 담아내고 있는데, 특히 3행의 “가지의 속삭임을 비추는 조용한 물빛”은 감각의 전이가 빚은 공감각적 심상을 사용하여 빼어난 감각의 세계를 보여준다. 가지의 속삭임도 아무나 들을 수 없는 것이지만, 그 ‘가지의 속삭임을 비추는 물빛’은 청각과 시각이 어우러진 감각의 새로운 경지로 실로 남다른 감성 없이는 느낄 수 없는 미적 세계이다.

시인은 이어 물결에 비친 하늘을 차고 날아가는 새의 시각적 심상과 연이어 들려오는 새소리와 그 소리 사이로 울리는 물소리와 그 물소리 사이에 젖는 향기를 이야기한다. 새소리 사이의 물소리도 소리와 소리 사이의 진폭과 결 속에 또 다른 소리를 인지할 수 있는 섬세한 귀가 있어야만 들을 수 있을 것이며, 그 물소리 사이로 젖어드는 향기 또한 청각과 후각의 뒤섞인 감각 전이의 촉수가 있어야만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아울러 이 시는, 산협으로 내려온 두근거리는 하늘의 심상과 물거울 속에 담긴 하늘 또 그 하늘을 차고 날아가는 새의 묵시를 통해 천상과 지상의 세계가 흰 눈과 햇살을 사이에 두고 정결하게 결합되어 있다. 섬세한 감각의 향연 속에 어떤 웅장한 세계가 웅숭깊게 함께 담겨 있는 것이다.

여러 가지 감각이 잘 맞물려 있는 ‘한 폭의 담백한 수채화 같은 이 시’는, 이처럼 섬세한 감각의 포착과 전이를 통해 더없이 정결한 산수의 진경을 보여주고 있다. 이 속엔 자연의 아름다움만 있는 게 아니라, 이러한 세계를 지향하는 시인의 맑고 단아한 정신과 이상이 담겨져 있으며, 그것은 소리 없는 깊고 잔잔한 영혼의 울림을 간직하고 있다. 시의 미덕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느낄 수 있는 아름다운 감각의 세계를 통해서, 아주 적은 말로도 내면세계를 깊이 표상할 수 있다는 것!

 

  시인이란 그 가슴에 맑고 깨끗한 감성의 프리즘을 가지고 다니는 사람이다. 그리고 시란 그 프리즘에 비쳐진 혹은 굴절되어 나온 고운 빛 한 자락일 것이다. 하여 시를 읽는 일이란 그 프리즘에 비친 빛 한 자락으로 우리의 마음을 비추는 일이요, 그러한 빛 자락들을 모으고 모아, 우리의 가슴에도 깨어지지 않은 맑은 감성의 프리즘 하나를 간직하는 일일 터이다.

―아, 정녕 그럴 수만 있다면 세상을 담아내는 우리의 내면 세계가 더 아름답고 풍요로워지지 않겠는가!

 

-이성선 시 읽게 에세이, 김주수 

 

출처 : 시하늘
글쓴이 : 아기비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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