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릎 위의 시/이성선
네팔의 한 무명 시인
그는 가난하여 설산만 쳐다보았습니다
책도 경전도 가질 수 없어
눈[目] 속에 설산을 경전으로 펼치고 살았습니다
그 빛으로 그는 결국 눈이 멀었습니다
멀리 걸을 수 없어 앉아만 있는 그를
작은 풀꽃들이 동무하여 말을 건네주고
흩어진 머리칼을 바람이 쓸어주고
세월이 와서 얼굴에 주름을 새겼습니다
그는 어느 곳도 가보지 못해
땅의 일에는 귀가 먹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눈에서 몸 안으로 뿌리내린
설산의 말씀 하나가
광막하고 고요한 그의 내부를 가득 울렸습니다
울리는 소리마다 시로 뿌려져 그를 채웠습니다
그것을 시인은 그의 무릎 위에 썼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이 무릎 위의 시를
달빛이 와서 읽어주었습니다
-『이성선 전집』(서정시학, 2011)
일찍이 보지 못한 독특하고 인상적인 시상에 마음이 잔잔한 충격에 젖는다. 책도 경전도 가질 수 없어 오로지 자신의 눈 속에 ‘설산’을 경전으로 펼치고 살다가 결국 그 빛으로 눈이 멀어버린 구도자와 같은 한 무명 시인! 이것이 정말 시인이 경험한 사실인지 아니면 시적 상상이 빚어낸 이야기인지 알 수 없지만, 이 시가 담고 있는 심장을 꿰뚫을 듯한 구도의 진정성에 앞에 숙연함을 느끼게 된다.
마음의 눈을 뜨고 보면 천지의 자연이 어느 하나 경전이 아닌 것이 있으련만, 이 무명 시인은 오직 설산만을 바라보았다. 하얀 빛과 그 정결한 빛이 만드는 거대한 고요가 삶의 전부인 설산(雪山). 그는 그토록 ‘설산바라기’가 되어 무슨 말을 듣고 싶었던 것일까.
장조의 유몽영에 이르길 “꽃엔 나비가 없어서는 안 되고, 산엔 샘물이 없어서는 안 되고, 돌에는 이끼가 없어서는 안 되고, 물에는 물풀이 없어서는 안 되고, 교목엔 덩굴이 없어서는 안 되고, 사람에겐 벽(癖)이 없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거니와, 그는 분명 지독한 벽을 가지고 있는 이인일 터이다. 그 혹독하리만치의 거대하고 짙푸른 고독 앞에 누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설산에 눈이 멀어버려 보지도 잘 움직이지도 못하는 그를 이제 작은 풀꽃들이 동무하여 말을 건네주고, 흩어진 머리칼을 바람이 쓸어주고, 세월이 와서 그의 얼굴을 만져주며 시간의 발자취를 새기고 간다. 세월의 풍화 속에 자연과 말없이 하나가 되어버린 사람. 단 하나 광막하고 고요한 설산의 말씀만으로 내면을 가득 채운 사람. 그 마음으로 자신의 가난한 무릎 위에 시를 쓰는 시인. 그리고 그 시를 읽어주는 달빛….
이성선 시인은 어찌하여 설산 바라기의 벽(癖)으로 눈까지 멀어버린 이 가련한 네팔의 무명 시인의 삶을 이렇듯 초자연적인 신비의 색채를 더하여 노래한 것일까. 혹 그 설산의 하얀 말씀 한 조각을 우리에게도 전해주려 한 것일까?
설산의 하얀 빛에 두 눈을 내어준 그의 삶과 영혼은 속세의 사람들과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그는 비록 눈이 멀고, 가난하여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지만, 광막하고 고요한 설산의 말씀으로 자신을 채우고 그것으로 또 ‘내면의 소리’를 들 수 있는 무욕·청정의 사람이다. 비록 세상을 볼 수는 있지만, 정작 자기 내면의 소리엔 까맣게 귀 먹어버린 사람들이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그는 가지고 있는 것이다.
지상의 일에는 귀가 먹었지만, 자연과 하나되어 자신의 내면의 소리를 들을 줄 아는 사람. 그것을 이루기 위해 자신의 두 눈과 인생을 송두리째 바친 이의 숭고하고 절대적인 고독이 이 시에는 웅숭깊이 담겨 있는 것이다. 이토록 엄정하고 지순한 영혼과 그 삶이 전하는 매운 정신의 진폭이 있기에, 우리는 이 시의 기준으로 다시 한번 우리의 삶의 지평을 되돌아볼 수 있게 된다.
나는 당신 내면의 그곳
우주 전체가 자리한 그곳을 경배합니다.
나는 당신 내면의 그곳
사랑과 빛, 진실과 평화가 깃든 그곳을 경배합니다.
나는 당신 내면의 그곳을 경배합니다.
당신이 당신 내면의 그곳에 있고
내가 나의 내면의 그곳에 있으면
우리는 하나가 됩니다.
우리는 하나가 됩니다.
나마스테.
-<나마스테>
네팔에 전해지는 기도시이다. 나마스테라는 말은 ‘지금 이 순간 당신을 존중하고 사랑합니다.’라는 뜻으로 상대 안에 있는 신을 찬양하는 말이라고 한다. 내면 속을 가득 채운 설산의 말씀으로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시를 쓰는 이 시인의 무릎 앞에 나마스테라고 인사하고 싶어진다, 자연의 빛과 진실과 평화가 깃든 그의 내면을 경배하는 마음으로! ――그리 하면 우리의 내면도 얼마간 비슷한 빛으로 조금씩 물들어갈 것이니…….
-이성선 시를 읽기 에세이, 김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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